“이 집을 고귀하게 빛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밝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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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드니 대성전 제단부. 출처=Juan Jose Jimenez |
거룩한 빛으로 가득 찬 ‘빛의 공간’
생드니 대성전의 제단은 벽으로 구획되어 있지 않다. 제단의 중심에서 7개 경당도, 피어(pier)나 원기둥도 경당 사이의 버팀벽도 방사상으로 배열되어 있다. 경당의 피어도 모퉁이가 잘려져 있다. 주보랑은 두 열로 배열된 가느다란 원기둥으로 나뉘어 있다. 2중 주보랑이다. 모두 밖으로 볼록한 경당의 곡면 벽을 스테인드글라스가 대신하고 있고, 그것을 통해 흘러들어온 빛이 주보랑과 제단 전체를 비추고 있다.
이에 대하여 쉬제르는 이렇게 적고 있다. “경당이 둥글게 연속하는 까닭에 성소 전체가 매우 거룩한 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굉장한 훌륭한 빛으로 끊임없이 가득 차 있다.” 밝게 빛으로 가득 찬 이런 빛의 공간. 이것이 고딕 성당의 가장 큰 본질이다. 이 빛으로 동서의 긴 축이 크게 강조되었다. 그리고 경당 벽과 주보랑 그리고 제단부를 빛의 공간 층으로 지각된다. 바로 이런 현상 때문에 우리는 고딕 건축을 새삼스레 묻게 된다.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빛을 상상하고 구현했는가? 왜 이런 빛이 고딕만이 아닌 모든 성당 건축의 본질이라 여기게 되었는가?
그럴 때마다 로마네스크의 성당 내부는 어두웠으나, 고딕 성당에서는 이처럼 밝은 빛의 공간을 구현했다고 비교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고딕 성당의 내부 공간은 언제나 빛나고 있지는 않다. 엷은 빛이 감도는 스테인드글라스 면은 직사광선이 있을 때만 선명하게 빛나고, 밤이 되면 침묵하는 색깔로 변하고 만다.
생드니 대성전에서 처음으로 실현된 빛은 보통의 빛이 아니었다. 빛이 거룩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순간, 그 빛은 무언가 새로운 것, 새로운 빛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은 가장 고귀한 빛과 색채가 현상으로 통합된 것이다. 시각적으로는 바깥 주보랑을 감싸는 경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창문이 아니다. 그것은 금속을 두드리어 종이처럼 얇게 판판하게 편 박(箔)이 되어 제단을 크게 둘러싸는 벽, 곧 ‘빛의 벽’이다. 이것을 구현한 것이 바로 일드프랑스의 고딕 대성당이고, 이 투명한 건축이 처음으로 실현된 곳이 바로 쉬제르가 재건한 새로운 생드니 대성전 제단부였다.
이 새로운 빛의 근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생드니 대성전의 영감은 분명히 보석의 도시 천상의 예루살렘에 관한 요한 묵시록에서 왔다. “성벽은 벽옥으로 되어 있고, 도성은 맑은 유리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도성 성벽의 초석들은 온갖 보석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 그리고 도성의 거리는 투명한 유리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묵시 21,18-21) 천상의 예루살렘을 지은 영광스러운 건축재료는 스스로 빛나는 보석이다. 따라서 이 땅의 성당은 저 빛나는 심오한 색깔로 덮인 스테인드글라스라는 보석으로 천상의 예루살렘을 바라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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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드니 대성전 주보랑. 출처=urbstrave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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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드니 대성전 주보랑 경당의 '빛의 벽'. 출처=Steven Zucker |
빛을 받아 빛나면서 스스로 빛나는 보석
그래서 생드니 대성전 벽은 보석의 벽이다. 무릇 중세의 민간신앙에서는 보석은 ‘빛을 받아 빛나’면서도 내부에서 ‘스스로 빛나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다. 생드니 대성전 벽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빛을 받아 빛나는’ 보석이며, ‘스스로 빛나는’ 보석 그 자체이기도 했다. 더구나 중세에서는 ‘스스로 빛난다’, ‘빛을 받아 빛난다’라는 현상은 단지 물리적인 것만일 수는 없었다. ‘빛의 벽’이 거룩하게 지각된다고 바로 그것이 반드시 거룩한 공간 현상의 중심은 아니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빛의 벽’에서 빛 바로 그것의 질, 그러한 시각적 공간에서 나타내는 깊이의 현상이었다.
교부들은 보석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이 투과하여, 물질에 감추어져 있던 빛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해석했다. 이런 보석은 곧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다고 보았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이라고 고백하지 않는가? 이것이 고딕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담긴 신학적 의미였다.
이런 이유에서 쉬제르는 이 빛을 그리스도의 빛이라고 생각하고 ‘룩스 노바’(lux nova, 새로운 빛)라고 말했다. 이 빛의 현상은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가장 값비싼 사물인 성소 안의 장려한 보석은 이야말로 거룩한 미사 전례에 어울린다고 믿음과 이해를 그대로 나타냈다. 우리의 정신은 여러 사물의 도움이 있을 바로 그때 진리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또 그는 말했다. “더욱이 각지에서 불러들인 장인들의 훌륭한 손으로 우리는 아래쪽으로나 위쪽으로나 모두 훌륭하고 다양한 새로운 창을 그리게 했다. … 물질적인 것에서 비물질적인 것으로 우리를 북돋우는 곳으로 그들 중의 하나는 바오로 사도가 맷돌을 돌리고 예언자들이 맷돌에 포대를 운반하고 있다.” 무릇 정신은 물질에서 비물질로(쉬제르의 말을 빌리자면 “de materialibus ad immaterialia”) 향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성당은 값비싼 제구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초자연적 세계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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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드니 대성전 주보랑 성모 경당의 '빛의 벽'. 출처=Wikimedia Commons |
빛은 정신적 육체요 육체화된 정신
1140년 이 성당을 헌당했을 때 쉬제르는 이렇게 말했다. “이 집을 고귀하게 빛나게 하시고, 고귀하게 빛나는 이 집이 우리 마음을 밝히게 하소서(Nobile claret opus, sed opus quod nobile claret, Clarificet mentes).” 물질로 빛나도록 만들어진 예술작품이 모든 이의 마음을 비친다는 것이다. 진리는 물질적인 것의 도움 없이는 도달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부조(浮彫)와 같은 것에서는 진실한 빛들(true lights)은 단순히 지각된다. 그러나 그 빛들은 그리스도이신 진리의 빛(True Light)에 이끌려 사람을 해방하고 구원한다.
쉬제르는 자기 생각<꺾쇠 안>을 따로 넣으며 에페소 2장 20-22절을 인용한 바 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나의 벽을 다른 벽에 잇는>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우리가 물질로 더욱더 높고 어울리게 세우고자 한다면>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세우는 것을 배워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려 한 것인가? <하나의 벽을 다른 벽에 잇는>은 물질적 세계와 비물질적 세계를 의미하는 두 가지 성질을,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는 물질로 세우는 것은 정신적으로 세우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여 물질적인 성당 건축안에서 정신적인 하느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쉬제르는 이런 빛의 사상을 어디서 얻었는가? 고딕의 중심 주제였던 이 ‘빛’은 중세 신플라톤주의에서 비롯한다. 5세기 말의 동방 신비주의자 디오니시우스는 요한 복음의 빛의 신학을 플라톤주의와 결합했다. 신플라톤주의는 빛은 자연 현상 중 가장 고귀하고, 가장 물질적이지 않고 순수형상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여겼다. 빛은 육체가 없는 실체와 육체적 실체 사이의 매개자이다. 띠라서 빛은 정신적 육체요 육체화된 정신이다. 바로 이것이 생드니 대성전의 빛의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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