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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성당건축이야기

41. 생드니 대성전 (상)

by 세포네 2023.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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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순교자 성 드니 무덤 위에 세워진 최초의 고딕 성당

최초의 고딕 성당 생드니 대성전 정면. 출처=Wikimedia Commons
성 드니의 순교, 생드니 대성전 북쪽 포탈. 출처=histoiresduniversites.wordpress.com

몽마르트르에서 참수당한 파리의 첫 주교

유명한 프랑스의 노트르담 대성당보다 덜 알려졌지만, 고딕 성당을 말할 때 이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대단히 중요한 성당이 파리 교외에 있다. 최초의 고딕 성당인 생드니 대성전(Basilique-cathdrale de Saint-Denis)이다. 3세기의 순교자인 파리의 첫 번째 주교 성 드니(Saint-Denis)의 이름을 따서 그의 무덤 위에 지어졌다.

성 드니는 3세기에 지금의 프랑스인 갈리아를 재복음화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러나 성 드니와 두 동료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250년경(258년 또는 270년?)에 몽마르트르에서 참수당했다. 그런데 그는 잘린 머리를 들고 계속 설교하면서 지금 대성전이 지어진 곳까지 왔다. 그 후 이 성인의 무덤은 순례자들의 중심지로 성장하여 313년경 그의 무덤 위에 순교자 기념경당(martyrium)이 세워졌다.

더구나 당시 성 드니는 사도 바오로가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 언덕에서 설교할 때 귀를 기울인 “아레오파고스 의회 의원인 디오니시오”(사도 17,34)로 동일시되었고, 또 「천상 위계론」 등 네오플라토니즘 신학서를 썼다고 여겨지는 위(僞)-디오니시우스라고 오해되기도 했다. 이런 배경에서 생드니 수도원은 성 드니의 높은 권위를 자랑하는 수도원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런 성인의 권위에서 프랑스 왕가는 성인의 묘소를 돌보기 시작했고, 5세기에는 여성 귀족들이 성인의 유해 가까운 곳에 안장되었다. 그러자 신앙심이 깊었던 메로빙거 왕조의 다고베르 1세는 632년 생드니 베네딕도 수도원 건립 자금을 지원했고, 나중에는 왕실 지하 경당에 안장된 최초의 프랑스 왕이 되었다. 생드니 대성전에는 수많은 프랑스 왕과 왕비가 묻힌 무덤 60개가 있다. 이렇게 성 드니는 프랑스와 프랑스 군주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10세기부터 19세기까지 프랑스의 거의 모든 왕과 여왕이 묻혀 있다, 생드니 대성전. 출처=EMILE LUIDER/REA/REDUX

12세기 들어 수도원 성당 개축 빠르게 진행

첫 번째 수도원 성당은 지하 경당을 증축하기 위해 754~775년에 확장되었다. 피피누스 3세 브레비스(Pippinus III Brevis)에서 시작되어 샤를마뉴 치하에서 완성된 새로운 로마 바실리카식 성당은 순교자들의 유해가 보관된 지하 경당 주위로 중심을 유지했다. 이때 건물 규모가 커짐에 따라 로마네스크 건축 기술로 구조적 통합을 유지하려고 제한적이고 좁은 창문이 있는 두꺼운 벽을 사용했다. 금과 모자이크로 내부를 장식했지만, 이러한 장식을 비출 수 있는 자연광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생드니 베네딕도 수도원 성당은 12세기에 다시 확장되었다. 이때 기존의 건축 요소를 융합하여 자연광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전례 공간에 통합하였는데, 이는 수도원장 쉬제르(Abbot Suger, 1081~1151)의 독특한 비전에서 비롯되었다. 수도원장 쉬제르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서 이 수도원의 부속학교에서 미래의 국왕이 될 루이 6세의 친구로서 성장했다. 그는 1122년 22세에 생드니 대수도원 원장이 되었을 정도로 이미 루이 6세의 강력한 지원과 함께 부유한 이들과도 강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수도원은 영향력이 매우 커지고 부유해져서, 1135년에 수도원 성당의 개조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시토회의 성 베르나르도는 왕가의 묘소이자 왕립 수도원으로서 다수의 평신도, 순례자, 특히 유해 숭배자를 받아들이고 있던 파리 교외의 생드니 수도원의 부패, 무질서도 엄격하게 공격했다. 쉬제르는 생드니 대수도원의 질서 회복을 완수했으나, 그렇다고 그의 개혁이 성 베르나르도의 요구를 충분하게는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는 예술에 대한 두 사람의 사상이 근본적으로 대립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생드니 대수도원에서 자란 쉬제르는 성당을주님에게, 성 드니에게, 그리고 프랑스 왕실에 어울리는 훌륭한 건물로 다시 세우기를 꿈꿔왔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제단과 제구(祭具)도 하느님께 어울리는 귀금속으로 장식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쉬제르는 이렇게 썼다. “거룩함의 작용에는 믿는 이의 정신, 순수한 마음, 신앙심 깊은 마음이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적 순수함과 외적 광휘로 제구를 장식하는 것으로도 더없는 거룩한 희생에 봉사하고 찬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새의 나무(Tree of Jesse)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려진 쉬제르 대수도원장. 출처=BRIDGEMAN IMAGES

‘빛의 벽’으로 경이적인 빛의 공간 실현

쉬제르는 이윽고 성당 건축 전체를 개축하는 공사에 착수했다. 그는 자연광이 가득한 높은 예배 공간을 상상했다. 그리고 줄지어 선 커다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걸러져서 성당 전체에 아름답고 반짝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색상 패턴을 만들어냈다. 그 빛은 하느님을 드러내고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했다. 이는 전통적인 로마네스크 성당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놀랍게도 새로운 방식으로 기존 건축 기술을 통합하였다. 새로운 파사드는 1135년에서 1140년 사이에 완성되었다. 생드니 대성전은 수 세기에 걸쳐 프랑스의 정신적, 정치적, 예술적 역사를 증언하는 고딕 예술의 보석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고딕의 빛의 공간이다.

다만 쉬제르는 성 베르나르도가 베즐레의 생트 마리 마들렌 대수도원에 소집한 제2차 십자군에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출진한 사이에 섭정하며 국정에 관계하고 있었으므로 성당 건축 전체를 완성할 수 없었다. 건물 중심부는 13세기가 되어서야 성숙한 고딕 양식으로 완성되었다.

그렇다 해도 성당은 물질로 세워진 건물이다. 당시 성당 건축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주님이 우주의 건축가로서 만드신 세계를 본뜨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로마네스크 성당은 돌이라는 건축재료의 물질성을 철저히 긍정하며 이 땅에 거룩한 공간을 실현했다. 이에 성 베르나르도도 성당은 하느님의 세계 질서를 비춰주는 것이며, 수학적·기하학적 질서를 따라 세워지는 건축에 깊은 의미를 인정했다. 단지 지나친 높이나 크기, 장식과 탑은 엄하게 금지하며, 물질적인 것을 완전히 부정하려 했다. 그러나 쉬제르는 하느님을 위해 물질적인 것으로 가능한 한 아름답게 장식해야 하며, 약한 인간은 물질적인 것을 통해서만 비물질적인 하느님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리석은 마음은 물질을 통해 진실에 이르고, 깊은 마음은 진리의 빛을 보고 다시 살아난다”라는 생각에서였다. 이리하여 고딕 성당은 물질성을 부정함으로써 천상에 이르는 통로인 거룩한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석조건축은 벽구조다. 목구조와 철골구조 건축은 기둥과 보로 이루어지는 골조구조이며, 철근 콘크리트 구조는 벽과 기둥이라는 두 구조 형식이 모두 가능하다. 그런데 고딕 성당은 플라잉 버트리스(flying buttress)라는 놀라운 구조법을 발명하여, 돌로 골조구조를 실현하고, 돌기둥과 리브 사이를 스테인드글라스로 바꾼 ‘빛의 벽’으로 경이적인 빛의 공간을 실현했다. 이러한 구조 특성은 모두 고딕 대성당의 본질인 빛의 공간성에 수렴한다. 그야말로 고딕 대성당은 이 세상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기적의 건축이었다.

쉬제르의 생드니 대수도원 성당으로 12세기 고딕 양식 예술이 꽃피고, 수도원 중심에서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는 주교좌 성당, 이른바 대성당 문화로 이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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