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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성미술이야기

영적인 시력

by 세포네 2015. 11. 8.

푸생, <예리코의 눈먼 이의 치유>, 1650년, 캔버ㅅ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을 고쳐주신 장면은 몇 번 나온다. 그러나 이야기의 분위기는 조금씩 다르다. 마태오에서만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려내신 후 바로 눈먼 두 사람을 치유한 이야기와, 말 못하는 이면서 눈먼 사람의 치유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고 벳사이다의 눈먼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마르코에서만 전한다. 요한도 날 때부터 눈먼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그런데 예리코의 눈먼 바르티매오의 치유 이야기는 마태오와 마르코, 루카가 기록하고 있다.

푸생(Nicolas Poussin 1593/94?~1665)의 작품 <예리코의 눈먼 이의 치유>에서는 두 명의 눈먼 사람이 등장한다. 푸생은 데생과 엄격한 형태의 완결성을 중심으로 조화의 미를 표현하는 고전주의 화풍으로 이 기적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예수님, 눈먼 이들, 군중을 균형 있게 배치하고 있다. 마태오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예리코를 막 벗어나려 할 때 길가에 앉아 있던 두 명의 눈먼 사람은 그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듣고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신 다음, 그의 눈에 손을 대신다.

그림 중앙 부분에서 예수님은 눈먼 바르티매오의 눈에 직접 손을 대어서 만지고 계신다. 지팡이에 기대어 무릎을 꿇고 있는 바르티매오는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의 오른손을 통해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는 목청껏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한다. 그의 바로 뒤에서 또 다른 눈먼 사람도 무릎을 꿇고 애원하고 있다. 이미 그는 예수님의 행하실 기적을 예견이나 한 듯, 늘 자신의 길잡이 역할을 한 지팡이가 쓸모없게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뒤에 던져 버려 놓고 있다. 그리고 눈먼 이들이 자신들의 간청을 크게 말하는 것에 짜증이 난 사람들은 그림에서처럼 눈먼 이들의 팔을 잡아 예수님에게서 끌어내려 하거나 입을 다물도록 꾸짖기도 한다.

이들은 비록 눈이 멀었어도 주변에 있던 군중보다 더 분명하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볼 수 있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소리 높여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이들의 간청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간절한 기도의 행동인 것이다눈먼 바르티매오가 예수님께서 부른다는 소리에 흥분한 나머지 자신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 앞에 손을 내민 것이다. 그의 왼손은 예수님의 망토를 만지려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행동은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버리고 예수님과 같은 옷을 입고, 예수님을 따라 걸어가겠다는 의지의 동작이다. 이렇듯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의 손을 통해 육신의 시력을 되찾게 되고, 그 다음으로 그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제자가 되는 영적인 시력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영적인, 믿음의 시력을 받았지만, 이전의 눈이 먼 상태로 되돌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서고있는지……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리라.” (이사 3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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