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미상, <이사악의 희생과 구리 뱀 사이에 십자가 처형>,
세밀화, 13세기경, 비블리아 파우페룸 인쇄본, f. 25r
가난한 자들의 성경이란 뜻의 ‘비블리아 파우페룸(Biblia Pauperum)’은 그림과 말씀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부터 글을 모르는 사람, 가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많은 대중을 위한 묵상 자료로 사용되었다. 비블리아 파우페룸의 초판본의 원저자는 누구인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소실된 첫 번째 사본이 13세기경 독일 바이에른의 베네딕토회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사본들은 라틴어로 되어 있다. 이 책의 구성은 예수님의 생애를 바탕으로 일련의 그림과 본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 페이지에는 세 개의 그림과 아래 위에 네 명의 예언자가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세 개의 그림에서 가운데는 신약의 이야기가, 양쪽 두 개는 구약의 이야기가 자리한다. 신약의 그림은 구약의 예표들로 보완되고 있다.
이 그림 역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는 구약에 언급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예표들이 묘사되어 있다. 바로 왼쪽에는 이사악의 희생이 나타나고, 오른쪽에는 모세의 구리 뱀이 그려져 있다.
왼쪽 이사악의 희생 장면에서 모리야 땅에서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산을 배경으로 이사악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채 제단 위에 올라가 있고, 아브라함은 긴 칼을 들고 있다. 아브라함의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는데, 구름 사이로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의 팔을 잡고 있다. 아브라함의 아래에는 번제물을 사를 장작과 이사악 대신 제물이 될 숫양이 있다.
오른쪽 모세의 구리 뱀 장면에서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고,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백성에게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 민수기에서 이집트에서 나온 백성은 광야를 방황하며 하느님과 모세를 불평한다.
그림에서처럼, 주님께서는 원망하는 백성은 불 뱀에게 물려 죽음의 벌을 받게 한다. 그러나 백성들이 주님과 모세에게 원망한 죄를 회개하자, 모세에게 주님은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민수 21, 8) 주님의 말씀대로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살 수 있었다. 구리 뱀은 긴 기둥 위에 걸려 있다. 구리 뱀 사건의 배경은 광야인데, 장대가 세워진 곳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소인 골고타처럼 작은 언덕으로 그려져 있다. 장대에 달린 구리 뱀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예시한다. 화면 중앙이 십자가에 높이 달려 못 박혀 돌아가신 사람의 아들, 예수님의 장면이다. 이사악의 희생과 구리 뱀은 모두 인간의 죄에 대해 대신 속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은 모세의 구리 뱀이 그랬듯이 자신이 십자가 위에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느님 은총으로 예수님은 인간이 지은 죄를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으로써 인류를 그 죄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기둥 위에 달아놓은 구리 뱀을 바라본 사람들이 독사의 독으로 죽지 않은 것처럼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죄에서 구원을 받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윤인복 소화 데레사 교수 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회와 영성] > 성미술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0) | 2015.08.02 |
---|---|
모두를 이끄시는 분 (0) | 2015.08.02 |
하느님의 소중한 성전 (0) | 2015.08.02 |
[말씀이 있는 그림] (50) 유혹을 이겨내신 예수님 (0) | 2015.02.21 |
[말씀이 있는 그림] (49) 나병 환자의 치유 (0) | 2015.02.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