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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여행이야기

유렵여행 넷째 날(1) - 폼페이

by 세포네 2013.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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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근교에서 폼페이를 가려면 버스로 3시간 정도 달려가야 한답니다.

아침 7시에 숙소에서 출발하여 1번 고속도로를 달려 내려갑니다.

↑ 숙소에서 나오면서 이탈리아의 시골 전원풍경
↑ 산꼭대기에 그 유명한 베네딕도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다

폼페이
베수비오산(Mount Vesuvius)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의 동쪽에 있는 이중식 활화산,  79년에 폼페이를 매몰시킨 대분화 이후 8회의 폭발이 기록되어 있다.  높이는 1,281미터였으나 대규모로 분화할 때마다 높이가 많이 달라진다.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것은 79년 8월 24일이다.
 이 참사의 목격담은 대(大)플리니우스의 조카 소(小)플리니우스가 미네눔의 로마 함대 사령관이었던 대플리니우스의 죽음에 대해서 묻고 있는, 타키투스에게 쓴 2통의 서신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폼페이(Pompeii)는 이탈리아 캄파니아 지방에 있는 고대 도시이다. 1,710년 농부 한 사람이 우물을 파다 금붙이 장식장을 발견하게 되면서 폼페이(Pompeii)라는 도시를 발굴하게 되었다. 그당시 나폴리 국왕 '샤를르(Charles)'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네(Maria Christine)'는 옛 골동품에 관심이 많은 여자였는데 그녀는 왕실 공병부대 지휘관인 '알쿠비에르(Alcubierre)'를 시켜 베수비오스 산(Monte Vesuvio)기슭을 파헤쳤다고 한다. 이 발굴에서 청동 조각품 몇개를 찾아냈고 12월11일에는 ‘헤르쿨레늄 극장(Herculaneum)’이라고 새겨진 돌을 발견하게 된다.
1,748년 4월1일 샤를르 왕의 명령을 받은 '알쿠비에르(Alcubierre)'는 베수비오스산(Monte Vesuvio) 기슭의 또 다른 곳을 파헤치기 시작하게 되었으며 엿새째인 4월6일에 라틴어가 새겨져 있는 돌기둥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 눈부신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진 돌벽이 나왔고 4월19일에는 청동제 조각들과 대리석 조각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처음으로  금화를 잔뜩 움켜쥐고 석고처럼 단단히 굳어버린 남자의 시신이 발굴되었다고 얼마 뒤 원형 극장을 발견한후 기대했던 보물이 나오지 않자 발굴작업을 중단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1860년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가 발굴을 하게 되었다. 그는 발굴지 사이에 놓인 지역을 정비하고 꼼꼼히 기록했다. 폼페이를 9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각 구역을 가구(街區)로 분류하고  거리의 각 문에 번호를 매겨서 각 집의 위치가 3개의 숫자로 편리하게 표시되도록 했다. 또한 피오렐리는 화산재 속의 시체가 분해되어 생긴 구멍에 시멘트를 부어 신체 주형을 뜨는 기법을 개발했다. 스타비아이와 그라냐노 근처의 발굴작업은 카를로 4세에 의해 처음 시작되고, 1749~82년에 12채의 별장이 발굴 되었다. 그후의 발굴작업은 금세기가 되어서야 다시 재개되어 지금도 진행중이다.

↑ 폼페이 유적으로 들어서는 입구

 

 

폼페이 광장(Foro)
폼페이의 정치, 경제, 종교생활의 중심지로 넓이 157m의 광장 주변에는 바실리카, 아폴로 신전, 마첼룸, 성당 등의 공공 건축물로 둘러 쌓여 있다. 
광장의 회랑에는 응회암으로 만든 도리아식의 기둥과 이오니아식 기둥이 있다. 발굴 당시 주변에서 많은 석상들이 발굴 되기도 했다. 포룸의 남쪽 끝에 있는 카피톨리움 반대쪽에는 시 의회와 행정관청 관리들이 모여서 회의하던 장소가 있었다. 중심 방의 사면이 복도로 둘러싸인 거대한 바실리카(basilica)는 이 도시에서 건축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건물이며, 바실리카 양식의 그리스도교 교회당의 기원과 발달을 연구하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
 지붕이 있는 이 건물은 상품거래와 재판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서쪽으로는 폼페이의 수호신인 베누스 폼페이아나의 신전이 있다. 
공공건물들은 대부분 3개 지역으로 나누어져서 남서쪽 의 거대한 평지에 있는 포룸(광장, 해발 34m),

남쪽 방벽 가장자리의 만이 내려다보이는 높이에 있는 삼각 포룸(해발 25m), 동쪽에 있는 원형투기장 및 체육훈련장 등으로 분류된다. 종교·경제·시민생활의 중심이었던 포룸은 2층의 열주가 있는 현관(포티코)에 의해 둘러싸인 커다란 4각형 지역이었다.  카피톨리누스 구릉의 3대 신인 주피터·주노·미네르바에게 봉헌된 신전이 북쪽에서 포룸을 내려다보며 우뚝 서 있다. 동쪽에는 큰 식료품 시장인 마켈룸이 있었고, 남쪽에는 62년의 지진 후 세워졌던 라르 신(도시 수호신)의 작은 신전,  베스파시아누스 신전, 그리고 부유한 후원자인 유마키아가 세운 인상적인 모직물 제조공장이 있었다.

 

 

↑ 길 바닥의 큰 돌 사이의 작고 흰 돌멩이들은 마차가 밤에도 잘 다닐 수 있도록 설치된 야광 역할을 한다고 한다.

 

 

 

2000년 전의 도시인데도 여러가지가 너무 정교하게 건설되었다.
유럽땅 대부분이 석회석이 포함된 습지대이므로 바닥에 돌을 깔아 마차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만든 마차로와 보행로,
사람들의 도로 횡단을 위한 징검다리는 그시대 사람들의 지혜로움을 엿볼 수 있다. 돌판을 높게 만들어 마차가 달릴 수 없도록 하기도 했다.

↑ 오른쪽으로 윤락가가 있다는 표시

 

↑ 벽에 약간 튀어나온 것이 있는 집이 윤락가라는 표시란다

 

 

 

루파노래의 유곽
벽에 포르노 그림과 침실등이 갖춰저 있어 창녀의 집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그 당시의 환락가. 폼페이는 풍요롭고 시치스럼 도시였던 만큼 매춘행위가 많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된 조각품이나 벽화도 많았다고 한다. 
주인이 건물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 하인은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다 식구가 나타나면 바로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 침대의 규모로 보아 당시 이태리 사람들의 체격을 유추해 볼 수 있었는데  신장이 150cm전후였을 것으로 보여진다.당시 이들의 평균수명은 35세

 

 

 

 

 

 

 

 

공중 목욕탕.
폼페이의 목욕문화는 부속 시설로 맛사지실 같은 서비스 공간도 있었고, 올리브 오일을 몸에 바르고 때를 벗기었다고 한다. 냉탕 온탕을 갖춘 목욕탕은 거의 무료에 가까워 로마인들의 위생에 큰 몫을 했다. 천정은 자연채광을 할 수 있고, 벽면에 조각이 있다. 요즘의 다목적 헬스클럽 같은 기능을 갖춘 곳이다.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국교로 되고나서 맨 몸을 드러내는 것을 죄악시 하고, 목욕을 잘 하지않게 되어 유럽인구를 반으로 줄인 흑사병이 유행하게되고, 악취를 줄이는 방안으로 향수가 발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 공중 목욕탕 앞에 잘 가추어진 정원

 

 

↑ 사우나 탕

 

↑ 환기구

 

↑ 아마도 때밀던 곳은 아닐까?

 

 

↑ 목욕을 끝내고 나와 간단하게 식사나 음요를 마시던 곳

 

 

↑ 뻥을 굽는 가마

 

빵집 등에서 밀 같은 곡식들을 갈아내는 멧돌이라고 한다.

 

 

 

↑ 길모퉁이마다 공동 수도전이 세워져 있어 수도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현재의 세상의 모습이나 별 다름이 없는 완벽한 인프라를 갖춘 도시다.

↑ 말 고삐를 매두는 곳

 

 

 

발굴된 유물 보관소 당시 화산재를 덮어쓰고 죽은 사체가 죽는 순간의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1,700년이나 흐른 뒤,사람들은 그 옛날의 모습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나 갑작스레 닥친 재앙이었던지, 새끼 돼지가 오븐에 넣어지려 한 채로 발견되었고, 반쯤 구워진 빵이 발굴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너무나 불쌍한 모습으로 굳어져 있었다.
어머니들은 숨이 막히기 전에 힘껏 아기를 감싸안고 있었고, 어떤 이는 금붙이를 꽉 움켜쥔 채 돌더미에 깔려 있었다. 어느 집 문턱에서는 젊은 여자 둘이 집안으로 들어가 귀중품을 꺼내려고 망설이는 몸짓으로 굳어 있었고, 모든 집이 1,900년 전 8월 어느 날 한때의 모습을 ‘동작 그만’인 채 간직하고 있었다. 도서실에는 두루마리 종이가,작업장에는 연장이, 목욕탕에는 수세미가, 여인숙 탁자에는 손님들이 서둘러 계산한 돈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 발굴로 수집된 유물 보관 창고

 

 

 

 

 

↑ 벌판 뒤로 베수비오산(Mount Vesuvius)이 보인다

 

↑ 폼페이 유적 개념도

 

폼페이 관람을 마치고 근처에 있는 현지식당에서 먹은 해물스파게티,  여행 중 먹은 식사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식사 후 폼페이 역에서 전철을 타고 쏠렌토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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