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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가톨릭 소식들

[순교자성월]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4위 시복 예상 '맑음'

by 세포네 2013.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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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 삶, 우리 삶으로 비춰보면- 순교 정신, '현대적 읽기'부터

 

▲ 강선모 작 '125개의 눈물', 캔버스에 유채, 259×162㎝, 2013년.


한국천주교회 시복 작업은 어디까지 왔나?

 날씨예보로 치자면,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4위 시복은 '맑음', 최양업 신부 시복은 '구름 많음'쯤으로 볼 수 있겠다. 새로 시복에 들어간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와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은 앞으로 10여 년 이상 세월이 걸릴 작업이기에 예보가 사실상 곤란하다. 굳이 전망해 본다면 '대체로 맑음'이다.
 
 #124위 시복 '순조로워'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4위는 1997년 주교회의 가을 정기총회에서 한국천주교회의 시복시성 작업 통합추진을 결정하고 시복에 들어간 지 16년 만에 시복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이르면 2014년 가을께, 늦어도 2015년 초에는 시복될 것이라는 전망이 시복시성주교특위 관계자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아무래도 '순교자'여서 순교 자체가 기적이기에 기적심사의 부담이 없어 훨씬 빠르게 진척됐다. 시성성 역사위원회는 이미 지난 3월에 통과했고, 오는 10월 시성성 신학위원회 심사에서 시복 안건이 통과되면 추기경들과 주교들의 전체회의를 거쳐 교황의 최종 승인이 나는 대로 시복이 이뤄진다. 시복은 관례적으로 시성성 장관이 주관하며, 따라서 시성성 측의 판단과 의견이 중요하다. 교황 방한 문제는 시복식과는 별개 문제이고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124위 순교자는 신유박해 순교자가 53위로 가장 많아 시복이 이뤄지면, 103위를 시성하면서 같은 순교자인데도 아들과 딸, 손자, 손녀 등 후손이 먼저 시복 시성된 아쉬움을 다소 덜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먼 훗날의 얘기긴 하지만 향후 133위 시복이 이뤄지면 후손이 먼저 시복시성된 안타까움은 완전히 해소될 전망이다.

 반면 순교자가 아니라 증거자인 최 신부 시복 건은 '가야 할 길이 멀다'. 최 신부 시복 안건은 현재 시성성 역사위원회에 제출될 포지시오(Positio, 시성성 통상 회의에서 안건의 최종 결정을 위해 보고관이 작성하는 최종 심사자료로서 심문 요항)를 마무리하는 단계로, 올해 말에 역사위원회 심의를 받게 된다. 포지시오가 마무리되면 역사위원회, 신학위원회 등 관련 절차를 거쳐야 하고, 교황이 최 신부의 영웅적 성덕을 선포하면 가경자가 된다.

 그러고나서도 기적적 치유 사실이 증명돼야 하며 이 역시 재판 형식을 통해야 한다. 이어 한국 천주교회에서 기적적 치유 재판이 끝나면 다시 시성성에 보고하고, 시성성 심의가 끝나고나서 인정을 받아야 시복이 된다. 관계자들은 이 기간이 앞으로 적어도 "10년 이상이 소요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214위 시복은 '기초자료 수집단계'

 조선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와 근ㆍ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시복안건은 이제 겨우 시작단계다. 지난 5월 말 교황청 시성성에서 시복안건 추진을 각각의 단일 안건으로 승인 받고 기초자료를 수집하는 단계라는 것.

 124위 시복 안건은 순교자들의 삶과 순교사실에 논란이 없는 경우가 주를 이뤘지만, 133위는 그 삶과 순교 사실에 논란이 있는 이들이 있어 더 많은 조사와 시간이 필요할 전망이다. 다만 지난 10년간 수원교구 등에서 여러 차례 학술세미나와 심포지엄 등을 통해 해당 순교자들에 대한 사료발굴과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져 시복 준비는 어느 정도 진척이 이뤄진 상황이다. '백서 사건' 중심으로만 치우쳐 있던 황사영(알렉시오) 순교자의 경우 신앙인으로서 삶과 죽음에 대한 연구 필요성이 제기돼 최근 심포지엄을 통해 교회법과 영성, 신학, 사회학적 입장과 사료재조명이 이뤄지기도 했다. 신학적 측면에서도 유교와 천주교의 화해, 보다 폭넓은 시야가 필요한 연구가 동반돼야 한다.

 81위 또한 6ㆍ25전쟁이나 제주신축교난(1901년) 당시 신앙의 증오로 처형된 순교자들이 주를 이루지만, 이들은 최종 죽음이 확인되지 않는 이들이 많아 죽음의 증거를 찾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다만 공산 치하 순교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이 그 죽음을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유해조차 유기한 정황이 인정돼 그 죽음이 최종적으로 확인되지 않아도 순교했다는 윤리적 확신만 있으면 시복을 추진할 수 있다는 교황청 방침에 따라 시복 추진이 가능해진 상황이다.

 하지만 단순한 심증만으로는 안 되고 이들의 피랍과 행방불명이 순교로 이어졌다는 개연성에 대한 당시 현지주민들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증언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이와 관련, 2000년 대희년 당시 교황청에 보고된 증언과 자료들이 있으며, 관련 교구에서도 꾸준히 증언 채집을 위해 노력해왔다. 이제 정식 시복재판을 통해 증언의 가치와 진설성을 조사하게 된다.
 
 #자발적 현양과 기도운동이 가장 중요

 순교자들은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고, 특정한 한 교구의 순교자일 뿐 아니라 한국 천주교회 전체의 순교자다. 따라서 모든 교구는 다 함께 시복에 힘과 정성을 모아야 한다. 그러기에 전국 각 교구와 한국 평협은 124위와 최양업 신부 시복에 관심을 갖고 기도 운동에 동참하고 있으며 도보 성지순례에도 함께하고 있다. 특히 한국평협이 순교자 1위당 묵주기도 1억 단을 바치자는 취지로 펼치는 '묵주기도 125억 단 봉헌' 운동은 2010년에 시작돼 현재까지 4년째 각 교구 평협과 단체, 특히 서울 세나뚜스와 푸른 군대 등도 함께하고 있으며, 올가을에 그간 바친 묵주기도를 집계할 예정이다.

 이처럼 순교자 현양과 기도운동은 관련 교구나 단체에서 '자발적으로' 이뤄지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이뤄지고 있다. 그래야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는 신앙쇄신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순교자들의 시복 추진이 한꺼번에 이뤄져 신자들이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시복시성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우리 믿음과 삶의 한 부분이자 영원한 생명에 대한 증거와 선포로 봐야 한다. 관련 교구에서 시복시성을 꾸준히 요청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순교자들 삶, 우리 삶으로 비춰보면

 

▲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

 

 21세기를 사는 신앙인들에게 무작정 "한국교회 순교자 삶을 본받으라"고 한다면, 쉽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이들이 얼마나 될까. 문화 콘텐츠 시대를 맞아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시대에 맞게 '재해석'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총무 김민수 신부는 "한 대학 교수는 '한국에 이런 순교자가 있었나. 이 이야기는 (천주교)신자뿐 아니라 국민이 모두 알아도 좋겠다. 한국교회가 문화 콘텐츠화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며 순교자들 삶과 신앙을 '스토리화'하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순교자들 가운데에는 현대식으로 재해석하면 귀감이 될 수 있는 이야기가 참 많다.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 아내이자, 한국의 두 번째 사제 최양업(토마스) 신부 어머니인 이성례(마리아, 1801~1840)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젖먹이 아들 스테파노와 함께 감옥에 수감돼 갖은 문초를 당한다. 형벌로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해졌으나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한다. 그러나 젖이 나오지 않아 막내아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흔들려 집에 돌아간다. 그 뒤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돼 중국에서 유학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다시 체포돼 용감히 순교한다.

 젖먹이가 더러운 옥에서 굶는 것을 보고 한 번 배교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모성애는 우리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통적 효(孝) 사상이 사라져가고 있고, 부모와 자녀 간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쉽게 낙태를 생각하기도 한다. 신문 사회면에는 부모가 자녀를, 자녀가 부모를 살해하는 등 반인륜적 범죄 기사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런 때일수록 이성례가 보여준 절절한 자녀 사랑은 우리 시대를 향한 '작은 울림'이 된다.

 성폭력과 성매매 등 각종 성 관련 범죄가 만연해 있고 이혼 증가 등으로 참된 부부의 의미가 퇴색해가는 요즘, 동정부부 유중철(요한, 1779~1801)ㆍ이순이(1782~1802, 루갈다)의 삶은 우리를 반성하게 한다. 신앙을 위해 동정의 삶을 꿈꾸던 부부는 1797년 10월 혼인하고, 부모 앞에서 동정서약을 한다. 평생 오누이처럼 살 것을 다짐한 것이다. 이순이는 남편이 서약을 어기려는 유혹에 빠질 때마다 기도와 묵상으로 극복하도록 도와줬고, 결국 신유박해 때 차례로 순교한다.

 이들이 보여준 삶과 신앙은 '어떠한 유혹도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감각적인 것과 쾌락적인 것을 추구하고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신자들에게 유혹이 닥칠 때마다 신앙인임을 자각하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신앙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이다.

 충청도 홍주(현 홍성) 출신 순교자 황일광(시몬, 1757~1802)의 삶에서는 우리 시대 차별로 고통받는 이들과 소외계층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천민 출신인 황일광은 생전에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는 말을 남겼다.

 당시 천민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을 알게 된 뒤 양반, 중인 할 것 없이 자신을 하느님 자녀로서 동등하게 대해주는 것을 보며 하늘나라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죽어서 갈 하늘나라가 하나 더 있다고 말한 것이다. 천한 신분에도 그를 애덕으로 감쌌던 신앙 선조들 삶은 우리 시대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이들과 비정규직이라는 차별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전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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