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9일로 조선대목구 설정 180주년을 맞는다. 한국천주교회의 '뿌리'가 된 조선대목구는 이제 19개 교구(침묵의 교회인 덕원자치수도원구, 함흥ㆍ평양교구 포함)에 이르는 '가지'로 자라나 뻗어간다. 더불어 조선대목구가 서울ㆍ대구대목구로 분리된 지도 꼭 100년으로, 그 시점은 1911년 4월 8일이었다.
침묵의 교회를 제외한 한국교회 16개 교구 신자 수는 2010년 말 현재 520만 5589명이며 복음화율은 10.1%다. 성장엔 명암이 있다. 주일미사 참례자 수는 141만여 명으로 27.2%에 그치고 있고, 신자증가율도 전년도에 비해 1.7%(14만 644명)대로 떨어졌다. 하지만 어려울수록 첫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초심은 조선대목구 설정 당시 오간 서한과 교황 소칙서 등에 그대로 담겨 있다. 이에 이 같은 문건을 중심으로 조선대목구 설정 당시 상황을 살펴 거울로 삼는다.
▲ 그레고리오 16세 교황 |
▲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조선대목구 설정 소칙서. |
#1. 1831년 9월 9일, 로마 성모 마리아 대성전(Santa Maria Maggiore). 사도좌에 착좌한 지 7개월째인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재위 1831~1846)는 조선교회의 이정표와도 같은 두 소칙서를 반포한다. 하나는 조선대목구 설정을 명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시암대목구 부주교였던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대목구장 주교에 임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중국 베이징교구에서 완전히 독립된 대목구를 조선 왕국에 설치하며 이 조치는 현재와 미래 모두에 결정적이고 유효하며 효과적인 것으로 전적인 효력을 발생한다는 내용이었다. 1784년 이벽(요한 세례자)ㆍ이승훈(베드로) 등 주도로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생겨난 지 47년 만이었다. 이로써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한국교회에서 잊을 수 없는 교황이 됐다.
어부 성 베드로(마태 4,18-19; 마르 1,16-17)의 후계자임을 상징하는 어부의 반지를 찍은 짧고 단순한 편지 형식 소칙서를 통해 교황은 "보편교회의 통일성에서 중심이 되는 사도좌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살고 있는 양들을 특별히 더 부지런히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는 마땅히 그러해야 하듯이 양들을 찾아내 사도적 보살핌으로 진리의 양 우리 안에 들어가게 하고 영원한 목자께서 재림하실 때 천상 목장으로 불러 성공적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고 조선대목구 설정 취지를 강조했다.
▲ 유진길 등 조선대목구 신자들이 1624년(혹은 1825년) 말 교황 비오 12세에게 보낸 선교사 파견 청원 서한. 원본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고, 사본만 남아 있다. 사진제공=(재)한국교회사연구소 |
#2. 이에 앞서 4년 전인 1827년. 교황청 포교성성에 몇 통의 서한이 도착한다. 훗날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에 오르는 포교성성 장관 바르톨로메오 알베르토 카펠라리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였다.
서한은 유진길(아우구스티노) 등이 1824년 말(혹은 1825년 말) 교황청에 보낸 것으로, 마카오 포교성성 대표부를 통해 로마에 전달됐다. 마카오 대표부 책임자였던 움피에레스 신부는 1826년 11월 이 서한에 조선교회를 베이징교구에서 독립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덧붙여 로마로 보냈다.
유진길 등이 보냈지만 서한 분실될 경우 신원이 드러날까봐 이름을 가명으으로 쓰기로 하고 '조선교회의 암브로시오와 그 동료들'이라는 이름으로 작성된 서한의 내용은 1811년 교황 비오 7세에게 보낸 신미년 서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조선에 선교사들을 파견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달라고 청원하고 △선교사들의 입국 방법에 관해서는 유럽 선박을 이용하되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사절단과 동행할 것을 요청했다. 또 서한 후기엔 주의사항을 붙여 선교사들이 입국 시 준비할 배의 운용 방법과 당시 조선의 국내 정세 등을 적었다.
1824년 역관 자격으로 사신 행차에 동행한 유진길이 베이징교구를 거쳐 교황청에 보낸 서한은 보잘것없는 한문본 서한 한 통일 뿐이었다. 그러기에 아무도 이 서한이 조선대목구 설정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선교회의 안정적 사목을 위한 방책을 세워달라는 조선교회의 요청은 교황청 내에서 조선을 더 이상 베이징교구에 맡겨놓아 둘 수만은 없다는 공감대를 갖게 했다. 조선에 주문모 신부를 파견한 전임 베이징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재치권도 교황청이 구베아 주교 개인에게 부여한 권한이었기에 구베아 주교 선종과 함께 그 권한도 소멸한 상황이었다. 그러기에 조선교회 신자들이 교황께 보내는 서한을 라틴어로 번역한 움피에레스 신부는 조선교회를 위해 다른 수도회 내지 선교회에 맡길 것을 제안했다.
#3. 유진길의 서한을 받은 카펠라리 추기경은 조선 선교를 단독으로 맡을 수도회를 물색한다. 먼저 1827년 9월 예수회와 교섭을 벌였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어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장상인 랑글로와 신부에 서한을 보내 선교 의향을 타진했지만, 그도 인원 부족과 비용 문제, 입국 정보 미비, 회원들 동의문제 등을 들어 부정적 의견을 보냈다. 다만 랑글로와 신부는 1828년 초 아시아에서 활동하는 회원들에게 포교성성의 제안을 알리고 의견을 묻는 공동서한을 보내 겉으로 드러낸 부정적 입장과 달리 다소 유보적 입장을 취한다.
그렇다고 해도 파리외방전교회는 당시 선뜻 새로운 선교지를 맡을 입장이 아니었다. 각 대목구마다 활동하는 선교사 수가 제한돼 있을 뿐 아니라 박해 탓에 애써 건설한 공동체마저 와해되는 상황이었다. 주교들이나 장상들, 회원들도 부정적 의견이 대세였다.
조선교회로서는 실낱같은 희망도 끊길 위기였다. 그런데 그 때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본부에 서한 한 통이 도착했다. 시암(현 타이)대목구 방콕 신학교에서 브뤼기에르 신부가 보낸 것이었다. 1829년 5월 19일자 편지로, 포교성성과 파리외방전교회 간 교섭이 중단된 지 1년이 넘은 1830년 무렵이었다. 이 편지가 꺼져가던 조선 선교의 촛불을 되살렸다.
▲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문장 |
#4. 브뤼기에르 신부는 이 서한을 통해 랑글로와 신부가 카펠라리 추기경에게 보낸 답변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자신이라도 조선 선교사로 자원하겠다고 밝혔다. 편지를 보낸 직후 갑사(Capsa) 명의 주교에 임명된 것과 동시에 시암대목구 부주교에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후에도 세 차례나 포교성성에 편지를 보내 조선 선교사로 가겠다는 자신의 의사를 거듭 전달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연보」 제25호(1831/7)에 실려 있는 이 서한은 183년이 지난 오늘날에 읽어도 여전히 뜨거운 감동을 준다.
"일찍이 우리 신학교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서 무엇을 거부한 적이 있었습니까?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였던 시기에 우리가 맡고 있던 선교지들 가운데 하나라도 포기한 적이 있었습니까? 의심할 바 없이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 도움을 간청하였습니다. 우리는 착한 사람들을 악에서 구해내시는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우리의 기대는 어긋난 적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선교지들을 도와주려고 기적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우리 하느님의 힘이 약해지셨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신앙과 확신이 줄어들었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기금이 없다는 변명엔 주님께서 새로운 재원을 마련해 주실 것이고 △선교사가 없다는 변명엔 신학교에 있는 모든 젊은 신학생들의 애덕과 열성에 간절히 호소하면 될 것이며 △다른 선교지에도 부족한 것들이 많다는 변명엔 저 불쌍한 조선 사람들의 경우만큼 절박하지 않고 △입국이 힘들다는 변명엔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여러 해 동안 성직을 수행하다가 영광스러운 순교로 과업을 완수했는데 유럽인 신부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이냐고 반문했다.
끝으로 △너무 많은 것을 움켜쥐려고 하면 제대로 잡지 못한다는 변명엔 "저는 우리 파리외방전교회가 아직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또 잘 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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