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남 복음화 뿌리, 새로운 100년 새 복음화 준비
1911년 4월 8일. 조선대목구에서 대구대목구로 분리, 설정되면서 출발한 대구대교구의 100년 역사는 희생과 기도, 순교로 압축된다. 영호남 지역에 신앙의 씨앗을 뿌린 복음화의 본산으로 '새 시대 새 복음화'를 향해 도약의 걸음을 내디딘 대구대교구의 한 세기 역사를 정리한다.
▲ 대구대교구 첫 사제 주재용 신부(제4대 교구장)와 부모. 1918년. |
▲ 1915년 대구대교구 첫 고아원에 수용된 아이들과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 수녀들. |
# 경상도 지역의 복음화 여정
경상도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790년대 경상도 북부 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되면서다. 1791년 신해박해로 충청도 남부와 전라도 북부의 신자들이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그 중 일부가 경상도 북부와 남부의 산간지대에 정착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경상도로 이주하는 신자들이 증가하면서 경상도 지역에 교우촌들이 생겨났다. 이어 경상도 지역 첫 박해인 을해박해(1815)를 시작으로 경신박해, 병인박해가 발발하면서 신자들이 체포되고 이선이(엘리사벳), 이윤일(요한) 등 많은 순교자가 탄생했다.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박해가 그치고 1887년 경상도 지역에 첫 본당인 대구본당(현 계산주교좌본당)이 설립됐다.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인 두세 신부와 로베르 신부가 차례로 경상도 전담 신부로 임명돼 사목을 시작했다. 그 결실로 1910년까지 전주ㆍ부산ㆍ계산동본당 등 경상ㆍ전라ㆍ제주 지역에 18개 본당이 세워졌다. 당시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교황청에 조선교구 분할을 건의했고, 교황청은 대구대목구를 신설했다. 대구대목구는 경상ㆍ전라ㆍ제주도를 관할했으며, 기존 조선대목구는 서울대목구로 이름을 바꿔 대구대목구 관할지역을 제외한 조선 전역을 관할했다.
# 드망즈 주교부터 조환길 대주교까지
"성모님의 도움으로 주교관과 신학교를 건립하고, 주교좌성당을 증축할 수 있다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님께 봉헌하겠습니다.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 동굴 모형대로 성모당을 세워 모든 신자들이 순례하도록 하겠습니다."
초대 대구대교구장 드망즈(1875~1938, 한국명 안세화) 주교가 주교관과 신학교를 세우고, 주교좌성당을 증축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드망주 주교는 뜻하지 않은 은인들 도움으로 1913년 주교관을 완공한 데 이어 1914년 신학교 건립한 후 계산주교좌성당을 증축했다. 드망즈 주교가 성모 마리아에게 의탁해 청한 세 가지 소원이 이뤄진 것이다. 드망즈 주교는 '대구대교구 지도서'를 반포, 교구 사목방침을 정하는 등 교구 기반을 다져나갔다.
1911년 18개 본당 2만 4000여 명 신자로 출발한 대구대목구는 교세가 확장되면서 20년 후에는 3만 7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이에 따라 교황청은 1931년 대구대목구가 관할하던 제주도와 전라남ㆍ북도를 별도의 '전라감목대리구'로 설정했다.
대구대목구는 일제 강점기에 교세 신장을 이루면서도 압제 정치로 인한 시련에 시달려야 했다. 제2대 교구장에 임명된 무세 주교가 교구장 사퇴까지 강요당하는 등 선교사들은 국외로 추방되거나 연금되는 고초를 당해야 했다. 1945년 3월에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모두 남산성당에 연금되기도 했다.
1940~50년대는 왜관 순심여자초급중학교(순심여자중고등학교 전신)와 대구 대건중학교, 경주 근화여자중학교 등 교육기관을 설립해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1945년에는 청년회 기관지 '천주교회보'(가톨릭신문 전신)가 복간되고 대건 인쇄소가 확대 개편되는 등 교육 출판 사업이 활기를 띠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교구 활동은 큰 제약을 받았다. 학교 건물은 병원으로, 대건 출판사는 군용 인쇄소로 바뀌었고, 교구청 내에는 난민들을 위한 급식소가 마련됐다. 교회 건물들은 피난민들의 피난처였다. 본당 신자들과 수도자, 평신도 단체들이 구호 활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미국 가톨릭사회복지협의회 도움으로 난민 및 의료 구호사업을 전개했고, 수산나 메리 영거, 엠마 프라이징거 간호사 등 외국인 선교사들이 속속 입국하면서 고아와 장애인, 한센인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교구 사회복지사업의 밀알이 된 시기였다.
1962년 한국교회 교계제도가 설정되면서 대구대목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대교구로 승격되면서 부산ㆍ청주교구와 함께 대구관구를 형성했다. 현재 대구관구에는 대교구 승격 후 설정된 마산ㆍ안동교구가 포함돼 있다.
교회 쇄신 및 일치 운동과 꾸르실료 운동이 도입된 60년대를 거쳐, 1970~80년대는 포항 성모병원과 대구가톨릭의료원을 개원하고 대구 결핵요양원을 인수하는 등 의료 및 사회복지 사업에 두각을 나타냈다. 1990년대부터 각 사목영역별로 괄목할만한 결실을 냈다. 1997~99년에는 교구 제1차 시노드를 개최했고, 그 결과로 2003년 지역별 특성에 맞는 '맞춤형 사목'인 대리구제를 전국에서 처음 도입했다.
2008년 1월 교구 설정 100주년 준비위원회를 꾸리고, 100주년 준비에 본격 나섰다. 교구는 2008년부터 3년간을 성찰ㆍ비전ㆍ도약의 해로 지내면서 △시노드 준비위원회 △100주년 성전 건립추진위원회 △100년사 편찬위원회를 소집해 100주년 기념사업에 돌입했다.
제7대 교구장 서정길 대주교, 제8대 이문희 대주교, 제9대 최영수 대주교를 거쳐 2010년 12월 제10대 교구장에 조환길 대주교가 착좌하면서 교구 역사는 4월 8일을 기점으로 100년을 넘어섰다. 그리고 지난 4월 '새 시대, 새 복음화'를 기치로 제2차 시노드를 개막, 새로운 복음화를 향한 대장정에 들어갔다.
▲ 대구대교구 첫 본당인 대구본당(현 계산주교좌본당)의 1903년 신축 당시 모습. |
# 신자 45만 시대, 복음화율 10.16%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남부 지역을 관할하는 교구는 2003년 대리구제를 시행함에 따라 교구를 5개 대리구로 나눴다. △1대리구는 대구광역시 중구ㆍ서구ㆍ북구, 군위군 △2대리구는 대구 동구ㆍ수성구, 경산시ㆍ영천시ㆍ청도군 △3대리구는 대구 남구ㆍ달서구, 고령군ㆍ성주군ㆍ달성군 △4대리구는 포항시와 경주시, 울릉군 △5대리구는 구미시ㆍ김천시와 칠곡군을 관할하고 있다.
교구 신자는 2010년 말 현재 45만 8128명(관할 지역 인구 450만 8443명)으로, 복음화율은 10.16%다.
교구 내 가톨릭학교는 대구가톨릭대와 근화여고 등 18곳이며, 사회복지시설은 노인ㆍ무의탁ㆍ여성ㆍ장애인 등 6개 분야 129곳에 이른다. 수도회는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과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대구관구, 예수성심시녀회 등 29개 수도 공동체가 활동하고 있으며, 언론 및 출판사로는 가톨릭ㆍ매일신문, 월간 '빛'잡지와 대건출판사가 있다. 현재 본당은 156곳이며, 교구 소속 사제는 42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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