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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가톨릭 소식들

[자랑스런 신앙유산] 원주교구 대안리공소(등록문화재 제140호)

by 세포네 2007. 3. 11.

100여년 풍상 견딘 보기드문 목조 한옥 성당

 

▲공소 맞은 편 언덕에서 바라본 대안리공소 전경. 공소를 찾는 이들을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은 왼편에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다.

▲ 공소 내부. 천장에는 건물 뼈대인 나무 기둥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 김종현 할아버지와 도용범씨가 썩어들어가는 나무 기둥을 살펴보고 있다.

▲공소 뒷편 성모상 쪽에서 본 공소 모습.

 

 


 "정오에 한강 지류(支流)를 건너 맞은 편 여인숙에서 점심을 들었다. 거기에 대안리 교우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아침에 40리 길을 왔고, 오후에 갈 길은 가까운 30리이다. 10리쯤 남겨 두고 아름다운 무지개와 함께 비가 내렸다. 조제 신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11월 12일, 성당에는 드브레 신부가 만든 신부 방이 딸려 있다. 축성해 달라고 했다. 그것은 진짜 성당이기에 성당 축성 예절로 축성했다. 성당은 성모님께 봉헌되었다. 미사를 드리고 35명에게 견진을 주었다. 성당 축성을 하기 위해 큰 잔칫상이 차려졌다"(뮈텔 주교 1910년 일기 중에서).

 원주교구 대안리공소(원주시 흥업면 대안1리 659) 초창기 역사를 알려주는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그러니까 1910년 11월에 공소 축복식을 가졌다는 이야기인데, 실제로 공소가 설립된 연도는 좀더 거슬러 올라간다. 공소 신자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구전(口傳)에 따르면 대안리공소는 1892년께 설립됐고, 지금의 공소 건물은 1900~1906년 사이에 세워졌다. 뮈텔 주교가 '진짜 성당'이라고 했을 만큼 당시로서는 성당이라고 할 만큼 훌륭하게 지어진 건물이었다. 원주교구에서 1892년 이전에 설립된 본당은 풍수원본당밖에 없다. 어째서 이 시골 마을에 그토록 일찍 공소가 설립됐을까.

 초기 한국교회사에 밝은 이라면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대안리 일대는 교우촌이었다. 신자가 많은 곳에 성전이 세워지기 마련. 박해 시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대안리 근처 덕가산에 숨어 살다가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자 지금의 공소가 있는 마을로 내려와 살면서 교우촌을 형성한 것이다.

 그럼 이제 공소를 둘러보자. 건평 23평 규모 공소 건물은 특이하게도 한옥 형태다. 문화재청은 2004년 12월 31일 대안리공소를 등록문화재로 지정하면서 "1900년대 초에 지어진 목조 가구식 한옥 성당 건축물로, 교회사적 측면에서 가치가 높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공소 마당에 있는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건물의 완성도는 높지 않으나 지역 교회사적 측면에서 가치가 높으며, 건립 당시 원주 지역에 있던 공소 중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공소이다. 1900년대 한옥 공소의 희소적 측면에서도 가치가 있다."

 공소는 10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풍상을 겪었다. 원래 초가지붕이었으나 1950년대에 초가를 걷어내고 기와를 얹었다. 그러나 나무 기둥에 흙으로 벽을 바른 공소가 견디기에는 기와지붕이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1970년대 들어 지금과 같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꿨다. 이에 앞서 1960년경에는 공소를 거의 두 배 가까이 확장했다. 창틀 다섯 개 중에서 입구 쪽 두 개에 해당하는 부분이 이 때 늘어난 공간이다.

 1986년에도 대대적 보수가 있었다. 창틀을 전부 알루미늄으로 교체하고, 내부 흙벽에는 합판을 덧댔다. 그리고 비를 피해 신발 벗을 공간이라도 있어야겠기에 입구에 현관을 따로 만들었다. 미관을 크게 신경쓰지 않은 탓에 멋은 없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실내는 마룻바닥이다. 바깥은 봄날씨였지만 발끝으로 다가오는 마루바닥의 촉감은 싸늘했다. 의자를 놓기도 했었는데, 불편한 점이 더 많아 맨바닥에 그냥 앉는다고 한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니 전통 한옥이 그렇듯 건물 뼈대인 나무 기둥이 그대로 드러난다. 천장이 높아 여름에는 시원할 것 같다. 제대 뒷편에는 제대와 연결된 사제 방이 따로 있다. 과거 일년에 두 번 판공성사를 주러 오는 사제가 묵는 곳이었다. 지금은 한 달에 두 번 원동본당 신부가 미사를 드리러 오는데, 예전처럼 자고 갈 일은 없어 제의방 역할만 하고 있다. 공소 마당에는 성모상과 종탑이 있다.

 대안리공소 최고령 신자인 김종현(베네딕토, 81) 할아버지는 "예전에는 공소를 빙 둘러싼 담이 있었고, 마당에는 사제가 타고 오는 말을 묶어두는 마굿간이 있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이곳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김씨는 또 "돌아가신 아버지가 공소를 지을 당시 마당에서 얼쩡거리면 일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딴 데 가서 놀라고 쫓겨났던 어릴 적 추억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100여년 전 과거와 현재를 잇는 위대한 기억의 끈이 아닐 수 없다.

 대안리공소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 막사로 사용됐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미군 구호물자를 나눠주는 배급처가 되기도 했다. 공소도 사람처럼 그동안 숱한 풍파를 겪었으며, 사람이 아프면 수술을 받듯 수차례 보수 공사를 받았다. 지금도 많이 아픈 상태다. 헤진 지붕에서는 비가 새고, 나무 기둥도 많이 썩었다. 얼마나 오래 지탱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울 정도다.

 공소예절이나 미사 때 50∼60명이 참례하는 대안리공소는 그 어느 공소보다도 단단한 결속력과 우애를 자랑한다. 여느 공소나 마찬가지로 젊은이가 거의 없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행사가 있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들어 자기 일처럼 해내는 끈끈한 유대감은 다른 데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대안리공소의 자랑이다. 최근에는 무농약, 오리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공소로 전국에 이름을 떨치고 있다. 그래서 도시 본당과 교류가 활발할뿐 아니라 농민주일 행사 등을 통해 외지 신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공소 가운데 하나가 됐다.

 대안리공소 총무 도용범(야고보, 59)씨는 "외지에서 찾아오는 신자들을 위해 화장실과 식당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공소의 가장 큰 과제"라고 말했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사진= 백영민 기자 heelen@pbc.co.kr 평화신문 기자   pb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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