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설명)
▲매 신부가 안동 예천본당 사목 시절 맨 앞에서 십자가 행렬을 이끌고 있다. ▲1961년 순교의 땅 한국에 오는 선박 갑판에서(왼쪽에서 세번째가 매 신부) ▲요셉의원 봉사자들과 떠난 소풍 중에 망중한을 즐기는 매 신부.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올해 사순시기 담화에서 "부활의 기쁨에 참여하려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주님 사랑을 이웃, 특히 가장 고통받고 가난한 이웃에게 다시 주라"고 말했다. 하느님 사랑을 품고 있지만 말고 세상에 퍼뜨리라는 것이다. 평화신문은 사순기획으로 받은 사랑을 다시 나눠주는 사람들을 소개한다. 첫 번째 주인공은 침묵과 가난 속에서 소외된 이들에게 주님 사랑을 전하다 1월 26일 73살을 일기로 선종한 매기석(Pierre Mesini,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다. 매 신부는 '사막의 성자' 샤를 드 푸코를 닮은 파란 눈의 선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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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9일 서울 개포동성당, 매기석 신부 장례미사.
재경 예천 천주교 교우회 변철남(비오)씨는 조사(弔辭)를 읽어내려가다 고인이 남긴 마지막 말을 전하는 대목에서 목이 멨다.
"나는 한국 사람이 될 수 없지만 한국의 흙이라도 되고 싶어요.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한 뒤 분골을 나무상자에 넣어 묻어 주세요. 도자기에 넣으면 썩어 흙이 되기까지 너무 오래 걸릴 것 같거든요…."
죽어서도 한국을 사랑하고 싶어하는 프랑스 선교사의 소박한 유언 때문에 성당은 눈물바다가 됐다. 그리고 고인과 40년 넘게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은 그때 처음 매 신부한테서 무엇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아 또 한번 울었다.
변씨는 "고인은 말없이 행동으로 실천했지 누구에게 무엇을 해달라거나 하라고 시키는 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안동교구 예천본당은 고인이 1966년부터 6년간 사목하며 정을 쏟은 곳이다.
매 신부는 1961년 26살 젊은 나이에 선배 선교사들이 피 흘린 순교의 땅 한국에 왔다. 그는 한국 사람들과 문화를 끔찍이 사랑했다. 예천본당에 부임한 지 얼마 안됐을 때 일이다.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이문희 신부(현 대구대교구장)는 예천성당에 프랑스 신부가 왔다기에 인사차 찾아갔다. 그러자 신자들이 대접을 한다고 매 신부와 이 신부를 보신탕집에 데려갔다. 이 신부는 "프랑스 사람들은 개고기 못 먹어요. 개고기 먹는 사람을 식인종보듯 할텐데"라며 걱정스런 눈빛으로 신자들을 만류했다.
그러나 매 신부는 개고기 몇 점을 맛있다는 듯 집어 먹었다. 그리고 곧바로 뒷간에 가서 토악질을 하고 돌아와 또 한 점을 꿀꺽 삼키고는 "한국에 왔으면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줄 알아야 한다"며 웃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 특히 하루종일 허리 휘도록 일을 해도 먹고 살기 힘든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원했다.
그가 꿈 꾼 것은 노동사제다. 노동자들을 사목하는 게 아니라 그들과 똑같이 일하면서 삶을 나누는 길을 걷고 싶어했다. 그러나 서양 신부가 한국에서 노동자들과 똑같이 사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74년 프랑스로 돌아가 청소업체에 취직해 청소부로 살았다. 이어 아비뇽 국립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물리치료 보조사로 일하다 사하라 사막에 갔다. 사막에서 돌아와서는 병원에 재취업해 꼬박 10년간 주방 설거지를 담당했다.
매 신부가 사막에서 3개월간 기도하고 나온 이유는 '사막의 성자' 샤를 드 푸코(1858~1916) 영성을 깊이 호흡하기 위해서였다. 매 신부는 기도나 관상보다 활동에 치우칠 수밖에 없는 선교사였으나 푸코 영성을 따랐다.
푸코 신부는 사막에 들어가 유목민들의 친구이자 형제로 살고, 한때 나자렛에서 예수처럼 노동자로 살았던 위대한 영성가다. "내 온 삶을 통해 복음을 외치고 싶다"고 말했듯이 복음을 입으로 전한 게 아니라 가난한 이들 속에서 관상기도와 행동으로 증거했다.
은수자들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절대고독의 장소로 사막을 꼽는다. 매 신부에게 사막은 쓰레기 널린 거리와 음식물 냄새 진동하는 주방이었다.
그는 병원에서 60살 정년을 맞아 은퇴했다. 그러나 친지와 동료가 있는 고국의 은퇴 사제관에 들어가지 않고 1995년 다시 한국에 왔다. 받은 것을 다시 주기 위한 재입국이었다.
그는 서울 영등포 요셉의원(빈민 자선병원)을 찾아오는 가난한 이들과 목동의 집(요셉의원 부설)에서 생활하는 알코올 의존자들 곁에서 임종 직전까지 동고동락했다.
목동의 집 김 아무개씨는 "새벽에 일어나 3~4시간 성체조배하는 신부님, 몸이 편찮은 데도 식사가 끝나면 행주를 들고 설거지를 거드는 신부님이었다"며 "가족 중에서도 가장 몸이 아프고 사정이 딱한 가족과 대화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요셉의원 원무과 봉사자 변수만(바오로)씨는 지난해 연말 마지막 후원금을 들고 온 매 신부 모습을 잊지 못한다.
"암이 폐까지 전이돼 호흡이 무척 힘드실 때였다. 숨을 헐떡이며 3층 원무과에 올라오셔서 여느때처럼 '안녕하십니까?'하고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셨다. 그리고 12월분 후원금 80만원을 내미셨다. 병원비로 쓰시라며 만류했지만 황소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신부님은 1999년부터 매달 80만원씩 도와주셨다. 우리는 그 돈의 출처를 모른다. 신부님은 무척 가난하셨다. 1년 365일, 심지어 프랑스에 가실 때도 개량한복만 입으셨다. 또 대중교통만 이용하시기 때문에 지하철과 버스 노선을 우리보다 더 잘 아셨다."
후원금 출처는 아비뇽 국립병원 퇴직연금으로 추정된다.
요셉의원 약사 심명희(마리아)씨는 매 신부가 메고 다니던 가죽가방을 유품처럼 간직하고 있다.
"어느날 '그 가방은 100년을 써도 안 떨어질 것 같다'고 했더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지품을 꺼내고는 '마리아씨 가져요'하고 주셨다. 답례의 뜻으로 고급 초콜릿을 선물했더니 다음날 목동의 집 가족에게서'초콜릿 잘 먹었다'는 전화가 왔다. 신부님은 누구에게 무엇을 받으면 곧장 뒤(가난한 사람들)로 돌리셨다."
심씨는 '침묵' '가난' '행동', 이 3가지 단어를 빼면 매 신부에 대해 말할 것이 없다고 덧붙였다.
2년 반 동안 매 신부 곁에서 병수발을 한 이경숙(도나타)씨는 "마지막 순간에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것을 제외하고 줄곧 다인실(6인) 입원을 고집했다"고 말했다.
"항암치료를 받으실 때 식사시간만 되면 밖에 나가 서성거리셨다. 속이 메스꺼워 음식냄새를 싫어하셨다는 것을 나중에 알아챘다. 그런데도 음식냄새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이씨는 그동안 '사람들이 한국 신부라도 이렇게 대했을까'하는 홀대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이씨가 불평을 하면 매 신부는 "내가 좋아하는 예수는 더한 푸대접과 수모와 고통을 당하다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다"며 웃어 넘겼다.
매 신부가 노동사제의 길을 택한 또다른 이유는 장례미사 때 서봉세(Gilbert Poncet) 신부 강론을 통해 밝혀졌다. 지난해 파리외방전교회 회원들에게 남긴 글이다.
"이탈리아 출신 이주 노동자 아들인 아버지는 가난한 품팔이꾼이었다. 어머니도 이주노동자 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불화로 나를 비롯해 어린 자식 4명을 데리고 집을 나와 피난민 수용소에서 살았다. 처음부터 가난한 이들의 세계가 내 삶의 무대였다…."
서 신부는 매 신부를 '낮고 외진 가장자리에서 산 형제'라고 불렀다.
매 신부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묻히길' 원했다. 그 때문인지 그 사람들마냥 눈에 띄게 드러나는 언행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푸코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을 닮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분의 공생활이나 가르치시는 행위를 본받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결국 본받을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나자렛에서 하신 가난하고 미천한 노동자로서의 숨은 생활인 것 같습니다"라고 고백했듯이.
드러내거나 주장을 하지 않던 그가 자신의 장례미사에서 봉독되길 원하는 독서(필리 2,3-11)와 복음(요한 21,15-19)을 영적유언처럼 미리 밝혀둔 점이 특이하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3-11)
김원철 기자wckim@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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