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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가톨릭 소식들

평양교구 설정 80돌 특별 기획- 1020~40년대 북녘교회

by 세포네 2007. 1. 7.

북녘 복음의 씨 다시 싹트길 고대하며

 

 오는 3월17일로 교구 설정 80돌을 맞는 평양교구. 1927년 3월17일 서울대목구에서 분리, 지목구로 설정돼 평안남북도 복음화의 닻을 올린 평양교구는 1939년 7월11일 대목구, 1962년 3월10일 한국 교계제도 설정에 따른 주교구가 됐다. 메리놀외방전교회가 북녘에서 선교한 기간이라야 20여년 남짓했지만 평양교구는 1945년 해방 당시 신자수 1만6400여명에 본당 19곳, 공소 109곳, 교육기관 22곳, 사회복지시설 17곳을 둔 '활력 넘치는' 교회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중에는 일제의 신사참배와 황성요배 요구를 거부,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1942년 국외로 추방될 만큼 겨레와 함께 호흡한 '민족교회'였다. 하지만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발발로 교구장 홍용호 주교와 교구 사제단은 공산정권에 납치 행방불명됐다. 그리고 첫 평양교구장이었던 패트릭 번 주교는 교황사절로 서울에서 체류 중 체포돼 압록강변 중강진에서 병사했다. 이후 북녘 땅 평양교구는 63년 세월을 '목자 없는 교회'로 버텨내야 했다.

 그럼에도 복음의 씨앗은 아직 살아있다. 교구장과 성직자, 수도자 등 수많은 순교자들의 열성적 희생이 오늘날까지 평양교구가 살아있는 정신적 버팀목이 되고 있다. 평양교구장 서리 정진석 추기경을 비롯한 교구 사제단과 교구 신우회, 한국교회는 북녘 땅 복음화가 재개될 통일과 화해 시대를 기다리며 기도와 교육, 나눔을 통해 북녘 형제들과 함께하고 있다.

 평양교구 설정 80주년 특별기획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는 1920~40년대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남긴 사진 2500여점을 가려 평화신문에 연재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새로운 감동으로 만날 '사진으로 보는 평양교회사'에 애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바란다.

전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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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 교리수업]

 마치 꿈 속처럼 아련한 풍경이다. 성당 옆 녹음이 짙푸른 빈터에서 이뤄지는 교리수업은 어디선가 '아베 마리아' 한 가락이 들려올 것만 같은 아름다운 정취를 자아낸다. 교리를 듣는 아이들이나 수녀의 모습은 한 폭 수채화처럼 싱그럽다. 1940년대초 서포성당을 배경으로 한 이 사진에 등장하는 수도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강성효(베드로) 수녀다. 전후 남쪽으로 내려온 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두번째 총원장을 지낸 강 수녀가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교리 이야기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은 평화로운 사진이다. 이 서포성당 바로 옆에는 평양교구 복음화의 산실 '서포 메리놀센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몬시뇰과 소녀들]

 전후 평양교구장 서리(1950~1975)를 맡는 조지 캐롤 안 몬시뇰과 평양교구 관할지역 내 소녀들 모습이 정겹다. 중절모를 쓴 안 몬시뇰과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활짝 웃는 소녀 표정이 정감이 넘친다. 언뜻보면 매우 다정한 사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터운 포대기에 제각기 아이를 안고 있는 어린 소녀들의 모습이 고향 누이같은 편안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등장인물 뒷쪽에는 켜켜이 짚단을 쌓아올리는 평안도식 초가가 배경으로 등장한다. 1930년대에 평양교구 마산본당(1932~37), 안주본당(1937) 주임을 맡아 사목한 안 몬시뇰이 등장하는 것으로 미뤄 1930년대 사진으로 짐작된다.

[성체거동]

 평양교구 공동체의 '성체신심'도 남달랐다. 1930년대말 평양 북쪽 서포본당 주관으로 이뤄진 성체거동이 그 증거다. 요즘과는 달리 긴 미사보를 쓰고 한복을 입은 여인들과 여학생들, 여자아이들이 깃발을 들고 앞장서고 그 뒤를 수도자, 신자들이 차례로 따른다. 뒷쪽으로 성체를 모신 햇빛가리개용 일산(日傘)이 눈에 띈다. 1936년 4대 주임으로 부임한 기본스 신부 주도로 그해 5월14일 평양교구 첫 성체거동 행사가 거행됐고, 이 사진은 활발했던 서포본당 공동체의 '성체신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은방가게]

 메리놀외방전교회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미국 뉴저지주 오씨닝 본원에 서한 및 사목보고서와 함께 사진을 보내 평양교구 복음화를 위한 기도와 후원을 부탁했다. 그래서 메리놀회 본원에는 1920~40년대 평양과 평안남북도 일대 일상과 생활상을 압축해 보여주는 사진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이 사진도 그 중 하나다. 금이나 은 따위로 장식품을 세공해 팔던 가게 '은방(銀房)'이라는 현판이 내걸린 초가를 배경으로 개울에서 일하는 아낙네와 노인, 소녀들이 등장한다. 소녀는 아무래도 빨래를 하는 듯하고 그 뒤에 배가 나온 어린이가 뒷짐을 진 채 서 있다. 아이 곁에는 요즘은 민속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지게가 울타리에 세워져있다. 그야말로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사진이다.

[양재반 수업]

 신식 재봉틀로 양재반 수업을 받는 진남포본당 소녀들. 1920~30년대초에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이 사진에 등장하는 수도자(왼쪽에서 두번째)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다. 한복을 입은 다섯 소녀들은 제각기 옷감을 손에 들고 자신이 재봉질한 천을 들여다보고 있다. 수녀의 지도를 받으며 재봉틀을 돌리는 소녀의 표정은 진지하기만하다. 평양교구는 특히 교구 내 본당 수(19곳)보다 더 많은 학교(22곳)를 설립, 교육계몽에 주력했고 이같은 활동은 결국 우리말교육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함으로써 민족교회로서 위상을 확고히 다지는 계기가 됐다.

평화신문 기자   pb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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