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위원들은 5월 9~10일 대전교구에서 현장조사를 실시했다. 이틀동안 공주형장이었던 황새바위 성지를 비롯해 공주감영과 정산형장, 홍주관아와 감옥 등을 조사했다. 황새바위 성지에서 위원들과 대전교구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청주교구 현장조사는 5월 11일 실시됐다.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위원들은 장기대와 청주병영, 청주진영 등을 살펴봤다.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왼쪽에서 5번째)를 비롯한 청주교구 관계자와 조사단이 현장조사를 벌이고 있다
“각 교구의 협조로 현장조사 원활히 진행”
대전 공주감영·해미관아와 형장 등 조사
청주 장기대·청주병영·진천관아 등 확인
조사 후 교황청 제출 문서 번역작업 돌입
[전문]
‘자애로우신 주님, 자랑스러운 믿음의 선조들에게 시복시성의 영예를 허락하여 주소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시성을 간구하는 기도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순교자들에 대한 현장조사가 막바지에 다다랐다. 5월 9~10일 대전교구, 5월 11일 청주교구 현장조사에서 조사단은 비를 맞으면서도 순교자들이 걸어갔던 행적 찾기에 골몰했다. 이제 남은 일정은 전주교구(6월 1일)와 원주교구(6월 2일)뿐.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는 현장조사가 끝나는대로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할 각종 문서들을 번역하는 작업에 돌입할 예정이다.
공주·정산형장 등 조사
갖은 형벌에도 배교하지 않은 원시장(베드로). 홍주 관장은 마지막으로 원순교자의 자녀를 동원, ‘혈육의 정’으로 마음을 돌리려 한다.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는 제 마음을 크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천주님께서 친히 저를 부르시니, 어찌 그 목소리에 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악에 받친 홍주관장은 원순교자가 매질에도 죽지않자, 그의 몸에 물을 붓고 밖에 내다놓아 얼어 죽게하라고 명한다. 이때가 1792년 1월 28일, 당시 순교자 나이는 61세. 충청도 홍주에서 순교.
순교자들의 흔들리지 않는 신앙심에 약이 오른 관헌들, 어떤 경우에는 고향으로 압송, 장날에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했다.
“우(牛)시장 부근 물가, 공터에서 많은 신앙선조들이 순교했습니다. 서울에는 목을 베는 전문 칼잡이가 있었지만, 지방에는 주로 백정이 이 일을 맡았죠. 잔인성이라든가 그 고통이 대단할 것으로 능히 짐작할 수 있죠.”
솔뫼성지 담당 윤인규 신부는 “이런 순교터에 현재 시장이나 마을이 들어서 순교자들의 마지막 행적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며 “지형 모형도 제작 등 역사적인 터를 기억할 수 있는 작업도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틀동안 펼쳐진 대전교구 현장조사에는 교구 사무처장 이원순 신부와 솔뫼성지 담당 윤인규 신부, 대전교구사 연구소장 김정환 신부 등이 조사단과 함께 했다. 이에앞서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와 총대리 박종우 신부 등이 참가한 법정에서 이원순 신부는 대전교구를 대표해 124위에 대한 ‘공적 경배가 없었음’을, 윤인규 신부는 ‘현장조사 자료를 성실히 수집했으며, 경배가 없었다는 사실을 선언하기 위한 조사와 현장 확인에 거짓이나 은폐가 없음’을 각각 선서했다.
대전교구 관할 순교자는 13위. 원시장(베드로), 이도기(바오로), 방프란치스코, 박취득(라우렌시오), 정산필(베드로), 인언민(마르티노), 이보현(프란치스코), 이국승(바오로), 김광옥(안드레아), 김정득(베드로), 황일광(시몬), 김진후(비오), 김원중(스테파노) 등이다.
조사단의 첫 목적지는 충남 공주시 교동에 자리잡고 있는 공주형장. 이곳이 바로 성지 ‘황새바위’다. 황새들이 많이 서식했기 때문에 황새바위라고 부른다고 하지만, 목에 큰 항쇄(項鎖)를 쓴 죄수들이 이 언덕 바위 앞으로 끌려나와 죽었다고 해서 ‘항쇄바위’로 불렸다는 얘기도 전해 내려오는 곳. 1801년 신유박해 때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참수된 형장이다.
이어 조사단은 공주감영과 정산형장, 홍주 관아와 감옥, 해미 관아와 형장, 덕산 관아를 조사한 후 삽교로 이동, 인언민 순교자 현양지인 용동리를 조사했다. 황사영을 만나 신앙을 접하고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인순교자는 정사박해(1797)때 체포돼 해미에서 순교했다. 모든 순교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죽음도 처절했다. 매질을 가하던 형리중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번 내리치는 바람에 순교자의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는 산산조각 나버렸다 한다. 순교자는 그렇게 가혹한 매질을 당하면서도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는 거야”라고 되뇌였다고 전해진다.
조사단은 예상보다 조사 시간이 단축되자 다음 날 갖기로 했던 예산 형장과 대흥 형장을 방문한 후 솔뫼성지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청주교구로 향했다.
장봉훈 주교, 조사단 격려
원시보(야고보), 배관겸(프란치스코), 김사집(프란치스코), 오반지(바오로), 장토마스. 청주교구 관할 시복시성대상 5위다.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는 법정 개정에서부터 현장조사까지 함께 하며 조사단을 격려했다. 특히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소장은 현장 곳곳을 안내하며 조사단의 이해를 도왔다.
조사단이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장기대’(청주시 북문로 소재). 조선시대 군의 중앙 지휘통제본부가 있던 이곳에서 장토마스가 순교했다. 병인박해(1866)때 순교한 장주기(요셉) 성인의 6촌인 장토마스는 충북 진천 배티의 열심한 회장이었다. 그 역시 병인박해 때 포졸에게 체포된 후 진천 관아로 압송된 후 관장이 “천주교를 배반하면 죽이지 않을 것이며, 너희 세간을 돌려주어 살 수 있도록 할 것이다”라는 회유에 “세간과 목숨은 버릴지언정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의 깊은 신앙심은 순교전에 대자(代子)가 배교하려는 것을 목격하고는 “주님을 위해 천주교를 봉행해 왔는데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천주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권면했다고 알려진다.
조사단은 장토마스 순교자의 신심을 묵상한 후 청주 병영(청주 중앙공원 일대)으로 향했다. 이곳은 원시보 순교자와 배관겸 순교자의 순교터로 알려진 곳이다.
울부짖는 아내와 자식들에게마저 주님 섭리를 얘기하던 원순교자, 두들겨 맞아 온 몸의 살이 다 헤어지고 팔다리가 부러져 뼈가 드러날 정도의 고통을 영웅적인 인내로 감수한 배관겸 순교자. 이들 순교터에서 조사단은 다시한번 숙연한 마음을 감출수 없었다.
이어 조사단은 김사집 순교자의 순교터인 청주 장터를 둘러본 뒤 오반지 순교자가 순교한 청주 진영(청주시 남문로)으로 이동했다. 이곳에 있는 개신교 제일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비에도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로써 믿음을 지킨 순교터’ 임이 기록되어 있었다.
5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오반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날려버린 그는 천주교를 접하면서 아주 성실한 사람으로 변화된다. 병인박해때 체포돼 취조를 받던 그가 순교하자 ‘백일 청천에 무지개가 떠서 그의 시체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았다’는 말이 ‘병인치명사적’과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기록돼 있다.
조사단은 증거터인 청주 옥과 진천 옥, 진천 관아를 방문한 후 오반지 순교자 후손 안내에 따라 오순교자 무덤이 있는 진천읍 지암리로 향했다.
이 무덤은 1999년 10월 순교자의 증손 고 오기환씨에 의해 확인된 자리다.
현재 진천지역 순교자들의 거주지로 알려진 곳은 오씨 집성촌이었던 진천 지장골, 한국순교복자회 관상부 ‘대월의 집’이 자리잡고 있는 진천 발래기, 신앙촌으로 이름난 진천 배티 등이 있다.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총무 류한영 신부는 “시복시성 대상자 현장조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각별한 은총이라고 생각한다”며 “특히 각 교구의 적극적인 협조가 원활한 진행에 큰 활력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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