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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축일 (聖人)

3월 6일 성인들

by 세포네 2006. 3. 6.

마르치아노(3.6)

신분 : 주교, 순교자

연대 : 120년

지역 : 토르토나

 

  성 마르키아누스(Marcianus, 또는 마르치아노)는 사도 성 바르나바(Barnabas, 6월 11일)의 제자이자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Piemonte) 지방 토르토나의 초대주교였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45년간 주교직을 수행하다가 하드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토르토나의 성 마르키아누스와 라벤나의 성 마르키아누스(5월 22일)가 동일 인물이라고 본다.

 

바사(3.6)

빅토르(3.6)

빅토리노(3.6)

클라우디아노(3.6)

신분 : 순교자

연대 : 연대미상

 

   성 빅토르(Victor), 성 빅토리누스(Victorinus), 성 클라우디아누스(Claudianus), 성녀 바사는 소아시아 북서부 비티니아(Bithynia) 지방 출신으로 니코메디아(Nicomedia)의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성녀 바사는 성 클라우디아누스의 부인이다.

 

바실리오(3.6)

신분 : 주교

연대 : 335년

지역 : 볼로냐

 

   성 바실리우스(Basilius, 또는 바실리오)는 교황 성 실베스테르 1세(Sylvester I, 12월 31일)에 의해 볼로냐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는 20년 동안 교구를 사목하였다.

 

빌프리도(3.6)

신분 : 은수자

연대 : 750년경

지역 : 티닝햄

 

   성 빌프리두스(Bilfridus, 또는 빌프리도)는 영국의 린디스파른(Lindisfarne)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승 사제로서 은수생활을 했고 또한 금세공 전문가로서도 활동하였다. 그는 유명한 성 쿠트베르투스(Cuthbertus)의 린디스파른 성서 사본을 금과 은 그리고 보석으로 장정하여 역사에 그 역작을 남겼다. 그 후 그는 주민들이 바스 록(Bass Rock)이라 부르는 노섬브리아(Northumbria)의 티닝햄에서 은수자로서 살았다. 그런데 그곳에는 위험한 모래톱이 있어서 많은 해난사고를 일으켰다고 한다. 뱃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 성 빌프리두스는 이 모래톱을 제거해 주기로 작정하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것들이 한데 모여 성 빌프리두스의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그의 유해는 덴마크인의 침략 당시 잃어버렸다가 11세기에 한 수도자가 성인을 꿈에서 본 뒤에 그의 유해를 찾아내어 더럼(Durham)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그는 발드레드(Baldred), 발터(Balther), 발레두스(Balredus)로도 불린다.

 

아녜스(3.6)

 

신분 : 공주, 수녀

연대 : 1282년

지역 : 보헤미아

 

   성녀 클라라(Clara, 8월 11일)는 보헤미아 혹은 프라하(Praha)의 성녀 아녜스로 불리는 그녀를 '나의 반쪽'이라고 불렀다. 성녀 아녜스는 성 벤체슬라우스(Wenceslaus, 9월 28일)의 후손으로 부친의 이름은 1197년에 보헤미아의 왕좌에 오른 오토카르 1세(Ottokar I)이다. 또 헝가리의 성녀 엘레사벳(Elisabeth, 11월 17일)과는 사촌간이다. 성녀 아녜스는 불과 세살 때에 슐레지엔(Schlesien, 실레지아)의 공작인 하인리히의 아들인 볼레슬라우스(Boleslaus)와 약혼하고, 약혼자의 어머니가 세운 수도원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6세 때에 약혼자가 죽음으로써 보헤미아로 돌아왔고, 9세 때에는 프레데릭 황제의 아들인 하인리히와 약혼하여 이번에는 오스트리아로 가서 독일어와 그곳의 풍습을 익혀야 했다.

   그러나 성녀 아녜스는 늘 하느님께 굳은 신앙을 표현하고자 애썼으며, 자기 혼자서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며 덕을 닦았다. 그녀는 차츰 나이가 들면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동정생활을 갈구하면서 일이 꼭 그렇게 되도록 기도한 결과, 또다시 파혼이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또다시 잉글랜드(England)의 헨리 3세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그녀는 더욱 열렬히 기도하고 고행하며 화려한 궁중 의상 밑에 고행복을 입고 지냈다. 그녀는 새벽 일찍 일어나 맨발로 성당을 다녀오기가 일쑤였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28세의 미모의 여성이 되었다. 온갖 청혼을 물리친 그녀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게 편지를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다. 그 결과 결혼에서 자유롭게 된 그녀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마침내 1236년에 클라라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그녀는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 정신의 올바른 계승자로 살았다. 비록 공주 출신이었지만 수녀원의 하찮은 일까지 자발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놀라운 성덕을 쌓다가 77세의 일기로 선종하였다. 그녀는 1874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9년 11월 1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에바그리오(3.6)

신분 : 주교, 증거자

연대 : 380년

지역 : 콘스탄티노풀

 

   370년 콘스탄티노플 교구의 주교좌가 아리우스파에 의해 20년간 점령된 후 가톨릭 교회는 성 에바그리우스(또는 에바그리오)를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선택하였다. 그러나 몇 달 뒤 그는 발렌스 황제에 의해 추방되어 죽을 때까지 유배지에서 살았다.

 

올레가리오(3.6)

신분 : 주교

연대 : 1060-1137년

지역 : 타라고나

 

   성 올레가리우스(또는 올레가리오)의 부모는 서고트족(Visigoth)의 귀족이었다. 1060년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태어난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교회 일을 맡게 되었고, 이왕이면 사제직에 올라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입회한 후 프랑스의 여러 수도원의 원장직을 역임하다가 1115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그 해에 바르셀로나의 교구장좌가 공석이 되었을 때 성 올레가리우스가 천거되었으나 그는 자신의 몸을 감추고 숨어버렸다고 한다. 그 후 그는 거의 강제적으로 주교가 되었고 그 얼마 후에는 타라고나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1123년 그는 로마(Rome)로 가서 제1차 라테라노(Laterano) 공의회에 참석했고, 무어인들을 대적하는 십자군을 상대로 설교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1137년 그는 시노드(Synod) 참석 중에 선종하였다. 그는 올데가르(Oldegar), 올레가리(Olegari)로도 불린다.

 

요르단(3.6)

신분 : 수도원장

연대 : 1131년

지역 : 피사

 

   요르단은 현대 이탈리아어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단테(Dante)와 동시대인으로서 뛰어난 학덕과 웅변으로 명성을 떨치던 그는 자신의 편지나 설교에서 라틴어 대신에 토스카나(Toscana) 방언을 최초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1280년에 피사에서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고 파리 대학교를 마쳤다는 정도이다. 또한 그는 리에티(Rieti) 관구 회의에서 피렌체(Firenze)의 교수로 임명된 후 13년 동안 이 직책을 수행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 및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33년에 승인되었고, 이어 1838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시복되었다.

 

치릴로(3.6)

신분 : 수도원장

연대 : 1235년경

지역 : 콘스탄티노풀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는 카르멜 회원으로서 콘스탄티노플의 사제였다. 그는 소위 '성자와 함께'(Filioque)로 불리는 신학적인 문제로 발생한 그리스 정교회와의 논쟁을 주도하여 가톨릭 교회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로마 순교록은 그에 대한 자세한 경력을 소개하지 않고, 다만 27년 동안 자기 수도회를 훌륭하게 운영했다고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카드로에(3.6)

신분 : 수도원장

연대 : 976년

지역 : 불소르트

 

   스코틀랜드에서 어느 왕자의 아들로 태어난 성 카드로에는 아일랜드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모든 시인들이 노래했고 설교자들이 설파했으며 또 철학자들이 사고했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박식한 사람이 되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스코틀랜드에는 교사는 많으나 교부는 없다”고 한탄하면서 순례의 길에 올랐다. 그는 잉글랜드(England)와 웨일스(Wales) 지방을 거쳐 런던(London)에 당도했는데, 그곳에서 헤그프리드란 노인을 만났다. 어느 날 밤 이 이상한 노인이 그를 찾아와서 지금 런던이 불타고 있으니 하느님의 도움을 간청하라고 그에게 요구하였다. 그래서 그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치켜들고 열렬히 기도하니 과연 불길이 즉시 사그라지고 런던은 위기를 넘겼다. 이 기적이 국왕 에드먼드의 귀에까지 들어가서 그는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그 후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티에라크 숲 속에 있는 성 미카엘 수도원에 정착하였다. 성 카드로에는 다시 플뢰리(Fleury)로 가서 베네딕토 회원이 된 후 벨기에의 볼소르트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코논(3.6)

신분 : 순교자

연대 : 250년경

지역 : 만도나

 

  성 코논은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서 온 그리스도인으로 소아시아 지방 팜필리아(Pamphylia)의 만도나에서 가난한 정원사로서 일했다. 그는 데키우스 황제 치하에서 순교하였다.

 

콜레타(3.6)

 

신분 : 수녀

연대 : 1381-1447년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Picardy)의 코르비(Corbie)에 사는 목수의 딸인 성녀 콜레타는 1381년 1월 13일에 태어나 니콜레트(Nicolette)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흔히 콜레트(Colette)로 불렀다. 17세 때 천애의 고아가 된 그녀는 자신의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되었으며, 코르비에서 독수자로 생활하였다.

   21세 때부터 성녀 콜레타는 코르비의 원장이 빌려 준 은둔소에서 홀로 살았는데, 그곳에서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의 환시를 보았다. 이때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부인회'(클라라 수녀회)가 엄격하던 그들의 원 회칙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이미 그녀의 성덕과 영적 지혜가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클라라 수녀회의 개혁을 지시하는 환시에 응답하려고 자신의 은둔소를 떠나, 영적 지도자인 앙리 드 바움(Henry de Baume) 신부의 권고에 따라 교황청 책임자인 베드로 드 루나(Petrus de Luna)를 면담하기 위하여 1406년에 니스(Nice)로 갔다. 베드로 드 루나 역시 깊은 감명을 받고, 그녀가 클라라 수녀회에 입회하는 것을 허락하고 기존 수도원의 개혁과 새로운 수도원 설립을 위임하였다.

   처음에 그녀는 피카르디와 사부아(Savoie)의 수녀들로부터 심한 반대를 받았으나, 1410년부터 앙리 드 바움 신부의 지지를 얻어서 개혁 사업은 점차 성공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프랑스와 플랑드르(Flandre) 지역 내에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수도원을 17개나 세웠고, 르 퓌 앙 블레(Le Puy-en-Velay)의 한 곳을 포함하여 기존의 다른 수도원을 개혁하였다. 성녀 콜레타는 무슨 일을 수행하도록 훈련받거나 준비한 일은 없었지만, 믿음의 힘과 성덕 그리고 아무도 거스르지 못하는 결정에 따라 일을 올바르게 성취하였다. 그녀는 자주 탈혼에 빠졌고 고난에 대한 환시를 보았으며, 벨기에의 겐트(Gent) 수도원에서 자신이 죽으리라는 예언을 하였다. 성녀 콜레타의 개혁 클라라 수녀회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다. 그녀는 1604년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에 의해 시복된 후 1807년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시성되었다.

 

크로데강(3.6)

신분 : 주교

연대 : 712-766년

지역 : 메스

 

  벨기에 남동부 리에주(Liege) 근교 헤스바이예 출신으로 피핀의 친척인 성 크로데강은 아마도 생트롱(Saint-Trond) 수도원에서 교육받은 듯하며 카를마르텔(Karl Martell)의 비서와 청원인이 되었다. 742년 평신도인 그가 프랑스 메스의 주교로 임명되었고, 피핀으로부터 교황 스테파누스 3세(Stephanus III)의 대사로 또 궁중 책임자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그는 교구 내의 수많은 개혁을 실시하였으며 자기 나름대로 교회법을 만들어 훌륭한 주교로서의 소임을 다 하였다. 그는 성당과 수도원의 재건과 신설에 주력하였으며 로마 전례와 그레고리안 성가를 교구내에 도입하여 훌륭한 업적을 쌓았다. 또한 메스에 음악 학교를 세웠는데, 그 학교는 전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학교 중의 하나가 되었다.

 

키네부르가(3.6)

키네스비데(3.6)

티바(3.6)

신분 : 수녀

연대 : 7세기

 

   성 베다(Beda)의 기록에 따르면 시네부르가(Cyneburga)로도 불리는 성녀 키네부르가는 머시아(Mercia)의 왕 펜다(Penda)의 딸로서 노섬브리아(Northumbria) 국왕의 아들 알프리드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녀의 남편이 부왕에게 대항하여 큰 소동이 빚어졌다. 이때 그녀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녀는 동생들과 함께 노샘프턴(Northampton)과 헌팅던(Huntingdon) 근교에 수도원을 세우고 생활하였다. 이때 성녀 키네부르가 주변에는 하느님만 공경하려는 일단의 부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하나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또한 그녀의 동생으로 시네스비데(Cyneswide)로도 불리는 성녀 키네스비데(Kyneswide)가 합류하여 열심한 수도생활을 계속하여 훌륭한 덕을 닦았다. 그리고 그들의 공동체에 가입하여 명성을 떨친 성녀로 티바(Tibba)가 있다. 성녀 티바는 수 년 동안을 고독한 독수자처럼 살다가 이 공동체에 들어왔다고 한다.

 

프리돌리노(3.6)

 

신분 : 수도원장

연대 : 6세기경

 

   성 프리돌리누스(Fridolinus, 또는 프리돌리노)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유명한 가문에서 태어나 사제가 되었다. 그는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프랑스, 독일, 스위스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여행자', '순회 설교자'란 별명이 붙었다. 그는 이렇게 다니면서 폐허가 된 성당들을 발견하면 가슴아파하며 이를 수리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에 프랑스 푸아티에(Poitiers)에서 한 수도원을 수리하면서부터 라인(Rhine) 강변에서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다. 또한 그는 수녀들을 위한 수도원과 학교도 세웠다.

 

 

(가톨릭 굿뉴스 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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