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니시오 푸지시마(3.5)◀ (복자)
신분 : 순교자
연대 : 15841622년
지역 : 나가사기
디오니시우스 푸지시마(또는 디오니시오 푸지시마)는 일본 아리마(Arima)의 귀족 가문 태생으로 예수회에 입회하여 수련자가 되었다. 그는 당국의 외국인 선교사 추방령에도 불구하고 몰래 선교활동을 하던 예수회 선교사제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Petrus Paulus Navarro)를 돕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사형일인 11월 1일 나가사키의 시마바라(Shimabara)에서 베드로 바오로 나바로 신부가 봉헌하는 모든 성인의 날 미사 중에 동료와 함께 서원을 발한 후 화형을 당해 함께 순교하였다. 그들은 모두 1867년 5월 7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다른 201명의 순교자들과 함께 복자품에 올랐다.
▶비르질리오(3.5)◀
신분 : 주교
연대 : 610년
지역 : 아를
프랑스 남서부 가스코뉴(Gascogne) 태생인 성 비르길리우스(또는 비르질리오)는 생오노라(Saint-Honorat) 섬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은 후 그곳의 수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그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던 중에 아를의 대주교로 간택되었고,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로부터 팔리움을 받았으며, 힐데베르트 2세(Childebert II) 왕의 교황대사로 활약하였다. 지극히 거룩했으며 사도적 열성에 불탔던 그는 성 베다(Beda)에 의하면 영국 선교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또 그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과 더불어 치유의 은사가 있었다. 그가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한 것은 아를 지방의 유명한 전설이 되었다. 이 때문에 아를 주민들은 그가 죽지 않고 살아서 그들과 함께 산다고 믿게 되었다.
▶에우세비오(3.5)◀
신분 : 증거자
연대 : 423년경
지역 : 크레모나
성 에우세비우스(또는 에우세비오)는 젊었을 때 로마(Rome)를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머무는
동안에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를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 두 사람의 친분은 날로 두터워졌으며 성 히에로니무스가
성지 여행을 제안했을 때 성 에우세비우스는 이를 기꺼이 수락하고 그를 수행하였다. 그들이 안티오키아(Antiochia)에 도착했을 때 성녀
바울라(Paula, 1월 26일)와 그녀의 딸인 성녀 에우스토키움(Eustochium, 9월 28일)이 합류하였다. 베들레헴을 찾는 가난한
순례자들을 보고 성 히에로니무스가 그들에게 쉴만한 집을 지어달라고 청하자, 그들은 순례자의 집 건축기금 모금을 위하여
달마티아(Dalmatia)와 이탈리아까지 여행하였다. 또한 모금을 위해 크레모나에 있던 성 에우세비우스의 소유 재산과 로마에 있던 성녀 바울라의
재산도 모두 처분하였다.
로마에서 성 에우세비우스는 아퀼레아 일파의 사제인 루피누스(Rufinus)와 격렬한
논쟁에 휘말렸는데, 루피누스는 오리게네스(Origenes)에 대하여 왜곡된 글을 만들고 그릇된 교리를 선전하던 자였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그의
가르침을 반박했고, 그의 제자인 성 에우세비우스도 스승을 따랐다. 그래서 루피누스는 성 에우세비우스를 더욱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400년경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 후 사망할 때까지 줄곧 이탈리아의 크레모나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전승에 의하면 그는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서 영적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사망한 후 베들레헴에 묻힌 스승 성 히에로니무스의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성 히에로니무스의 여러 주석서들은 성 에우세비우스에게 헌정되었고, 예수 탄생 성당의 제대 역시 성 에우세비우스에게
헌정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성 에우세비우스가 에스파냐의 과달루페 수도원의 건립자이고, 그곳에 히에로니무스회를 진출시킨 장본인이라고 한다.
▶올리바(3.5)◀
신분 : 동정 순교자
연대 : 138년
지역 : 브레시아
성녀 올리바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중에 순교하였다. 그녀의 유해는 이탈리아 브레시아의 성 아프라(Afra) 성당에 안치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제라시모(3.5)◀
신분 : 수도원장
연대 : 475년
지역 : 예리코
성 게라시무스(또는 제라시모)는 소아시아의 고향을 떠나 사막의 은수자들을 찾아보기 위하여 이집트와 팔레스티나(Palestina)를 배회하다가 사해 근방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갈 길을 잃고 방황한 끝에 성 대 에우티미우스(Euthymius, 1월 20일)의 노선을 따르게 되면서 이 두 사람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455년경 그는 예리코 근방에 라우라(Laura)를 세우기 시작하여 많은 제자들을 길렀다. 그는 이곳에서 은수생활을 원하는 지원자들을 훈련하기 위하여 공동체를 이루는 수도원을 조직하였다. 그의 상징은 사자이다.
▶치아란(3.5)◀
신분 : 주교, 수도승
연대 : 530년
지역 : 오소리
성 키아란(또는 치아란)의 생애는 전설적인 것으로 확실한 기록에 의한 것은 아니다. 아일랜드의 오소리에서 태어나 그는 자신의 신앙을 더 알고 싶어서 로마(Rome)로 갔다. 이때 그의 나이가 30세였다고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주교로 축성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늘 은수자로서 살았으며 주위에는 늘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는 세이길(Saighir)을 도시로 발전시킨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오소리의 첫 번째 주교였으며 키에란(Kieran)으로도 불린다.
▶카르타고(3.5)◀
신분 : 주교
연대 : 540년
지역 : 오소리
성 카르타고(Carthago)는 아일랜드 오소리의 성 키아란(Ciaran, 3월 5일)을 계승하여 그곳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그 지방 왕의 손자였다.
▶콜만노(3.5)◀
신분 : 증거자
연대 : 5세기경
지역 : 아마
성 콜만누스(Colmannus, 또는 콜만노)는 아일랜드의 사도인 성 파트리키우스(Patricius, 3월 17일)의 제자로 사후 아마에 묻혔다.
▶테오필로(3.5)◀
신분 : 주교
연대 : 195년
지역 : 카이사레아
성 테오필루스(또는 테오필로)는 팔레스티나(Palestina) 지방 카이사레아의 주교였다. 그는 예수 부활 대축일을 주일에 기념하는 교회의 전례에 반하여 유대인들의 과월절 축제가 시작되는 니산 월(月) 14일에, 그날이 주일이건 아니건 관계없이 부활 대축일을 지냈던 콰르토데시만파(Quartodecimans)의 반대자로 알려져 있다.
▶포카(3.5)◀
신분 : 순교자
연대 : 320년경
지역 : 안티오키아
성 포카에 대한 로마 순교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구세주의 성명 때문에 많은 고난을 받았으나 늙은 뱀을 쳐 이겨 마침내 그는 승리하였다. 간교한 뱀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강한 믿음을 끝까지 지켰다. 그의 유해는 안티오키아의 성 미카엘(Michael) 성당에 안장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피란(3.5)◀
신분 : 수도승
연대 : 5/6세기경
지역 : 콘윌
성 피란의 전기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그는 영국 잉글랜드(England) 남서부 콘월(Cornwall)의 패드스토(Padstow) 근처에서 은수자로 살았고 선교의 중심지를 페란자불로에(Perranzabuloe)에 둔 것은 확실하다. 그 지방에는 그의 이름을 가진 성당들이 여럿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지방 주석 광산 광부들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선으로써 악을 이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상징하는 검은 색 바탕의 흰 십자가는 콘월의 깃발로 성 피란의 십자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피에란(Perran) 또는 피라누스(Piranus)로도 불린다.
▶하드리아노(3.5)◀
신분 : 순교자
연대 : 309년
지역 : 카이사레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팔레스티나(Palestina)의 통치자는 피르밀리아누스였다. 성
하드리아누스(Hadrianus, 또는 하드리아노)와 성 에우불루스(Eubulus, 3월 7일)는 거룩한 증거자를 찾아보기 위하여
바타네아(Batanea)에서 카이사레아로 왔다. 이 도시의 성문에서 검문을 당했을 때 그들은 상인이라고 거짓말을 하였으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를 돌보기 위해 먼 길을 왔다는 사실이 곧 밝혀지게 되었다.
결국 그 자리에서 체포된 그들은
관리들에게 끌려가 처음에는 매를 맞았으나, 신앙을 포기하거나 그 도시의 신자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쇠막대기로 옆구리를 찌르는 등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야수들의 밥이 되었다. 그러나 성 하드리아누스는 사자의 밥이 되지 않았다. 사자가 그를 해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
하드리아누스는 칼을 맞고 순교하였다. 한편 성 에우불루스도 이와 비슷한 형벌을 받고 이틀 뒤에 순교하였다. 그는 참수를 당해 순교하였다.
(가톨릭 굿뉴스 홈에서)
'[가톨릭과 교리] > 축일 (聖人)' 카테고리의 다른 글
3월 6일 성인들 (0) | 2006.03.06 |
---|---|
3월 6일 비테르보의 성녀 로사 (0) | 2006.03.06 |
3월 5일 십자가의 성 요한 요셉수도자 (0) | 2006.03.05 |
3월 4일 성인들 (0) | 2006.03.04 |
3월 4일 성 가시미로 (0) | 2006.03.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