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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축일 (聖人)

3월 7일 성인들

by 세포네 2006. 3. 7.

가우디오소(3.7)

신분 : 주교

연대 : 445년

지역 : 브레시아

 

   성 가우디오수스(또는 가우디오소)는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브레시아의 주교였다. 그의 유해는 그곳에 안치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데레사 마르가리타 레디(3.7)

 

신분 : 수녀

연대 : 1747-1770년

 

   이탈리아 중부 아레초(Arezzo) 사람들은 흔히 성녀 테레사 마르가리타 레디(Teresia Margarita Redi, 또는 데레사)를 안나 마리아 레디(Anna Maria Redi)라고 불렀다. 그녀는 10세 되던 해에 피렌체(Firenze)로 가서 성 아폴로니아 공동체의 수녀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후 계속하여 그곳에서 몇 년을 살았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온 지 몇 개월 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Teresa of Avila)의 책에 나오는 그녀의 초자연적인 권고에 이끌려 카르멜 회원이 되려고 하였다. 그래서 1765년 그녀는 피렌체에 있는 성녀 테레사의 맨발의 카르멜 수도회에 들어갔다.

   그녀는 특히 예수성심 신심에 있어서 뛰어났으며, 숨은 생활이 오히려 남을 위해 희생하기 좋은 기회임을 잘 이해하고 실천했던 뛰어난 성녀였다. 그녀는 주로 공동체 내에서 아픈 동료들을 돌보았는데, 수녀이기보다는 간호사에 더 적합한 사람처럼 보였다고 한다. 23세의 일기로 선종한 그녀의 유해는 현재까지 부패되지 않고 있으며, 피렌체 주민들로부터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그녀는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34년 3월 19일 같은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었다.

 

드라우시오(3.7)

신분 : 주교

연대 : 576년

지역 : 수아송

 

   현재 파리(Paris)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 중인 보물 가운데 하나로 로마제국 시대의 아름다운 석관이 있는데, 이것이 성 드라우시우스(또는 드라우시오)의 무덤이 틀림없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 수아송의 주교인 성 안세리쿠스(Ansericus)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그를 계승하여 수아송의 주교가 되었다. 성 드라우시우스는 역대 주교들 가운데 가장 열심하였고, 설교와 교육을 통하여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증거했던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단식으로 일관하여 노령에는 병을 얻기도 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만두지 않고 오히려 자발적인 고행을 하여 높은 성덕을 쌓았다. 또 그는 관할교구 내에 수많은 성당과 수도원을 세웠고, 644년에는 수아송의 노트르담(Notre-Dame) 성당을 완공하였다. 그의 성덕은 멀리 영국에까지 알려졌는데, 캔터베리(Canterbury)의 성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12월 29일)는 자신이 예견하던 영국에서의 순교를 앞두고 성 드라우시우스에 대한 설교를 할 정도였다. 그는 드라우신(Drausin) 또는 드라우시누스(Drausinus)로도 불린다.

 

레보카토(3.7)

사투르니노(3.7)

세쿤둘로(3.7)

페르페투아(3.7)

펠리치타(3.7)

신분 : 순교자

연대 : 203년

지역 : 카르타고

 

   성녀 페르페투아(Perpetua)와 성녀 펠리치타(Felicitas) 및 4명의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초기 순교자들의 전기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이고 인상적이다. 그 일부는 성녀 페르페투아 자신이 그리고 다른 일부는 나머지 순교자들이 기록한 글에 의해서 하나의 전기가 완성되었다. 성녀 비비아 페르페투아(Vibia Perpetua)는 좋은 가문의 딸로서 순교 당시에 귀여운 아기를 팔에 안은 젊은 부인이었고, 성녀 펠리치타는 여종이었다. 나머지 4명의 순교자는 노예였던 성 레보카투스(또는 레보카토), 성 세쿤둘루스(Secundulus),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그리고 성 사티루스(Satyrus)이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황제의 칙령에 따라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o)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검거할 당시에 성 사티루스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예비자였으나 모여 있던 집이 포위될 순간에 모두 세례를 받고 함께 감옥에 갇혔다.

   그 당시에 성녀 페르페투아는 처음으로 하늘을 오르는 사다리를 꿈에서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신비한 어느 사제의 방문을 받았는데 그는 이교도의 사제였다. 성녀는 “나는 그 노인의 불행을 슬퍼하였지요.” 하며 아기를 안고 걱정하던 차에 체포되었다. 재판정에서 그들은 모두 맹수의 밥이 된다는 판결을 받았다. 감옥에 돌아온 뒤에 성녀 페르페투아는 두 번째 꿈을 꾸었는데, 이번에는 어릴 적에 죽은 동생을 보았다. 그리고 성 사티루스는 자신이 천국에 당도한 꿈을 꾸었다. 이윽고 순교의 날이 왔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너희들이 우리를 심판하였으나 하느님은 너희를 심판할 것이다!” 성녀 페르페투아의 일행은 “그리스도의 신부답게, 하느님의 귀여운 자녀답게” 형장으로 나갔다. 맹수들이 덤벼들자 그들은 서로를 붙잡고 의지하다가 한 사람씩 죽어갔다.

 

바오로(3.7)

신분 : 은수자

연대 : 340년경

 

   일생동안 노동자 생활을 했던 성 바오로 심플렉스(Paulus Simplex, 바오로 단순한 사람)는 60세 때에야 비로소 불충실한 아내를 떠나 성 안토니우스(Antonius, 1월 17일)를 찾아 나섰다. 이때 안토니우스 성인은 이집트의 테베(Thebes, 오늘날의 룩소르 Luxor 근방)에 있었다. 그의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성 안토니우스는 선뜻 제자로 받아주기를 꺼렸으나, 성 바오로의 항구심에 탄복한 나머지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성 안토니우스가 성 바오로에게 자신을 포기하는 엄격한 훈련을 시킨 결과, 성 바오로는 겸손과 열성 그리고 순종에서 뛰어난 덕행을 보였다. 그래서 성 안토니우스는 그를 위해 움막을 지어 주었다. 그는 치유의 은사를 받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도 있었으며, 수도자의 이상을 성 안토니우스에게 다시금 심어주었을 정도로 위대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의 순진무구한 마음 때문에 그는 '단순한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바오로(3.7)

신분 : 주교

연대 : 840년

지역 : 펠루시움

 

   성 바오로(Paulus)는 소아시아 북서부 비티니아(Bithynia) 지방 프루사(Prusa)의 주교였다. 그는 성상파괴주의자들에게 용맹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이집트의 펠루시움으로 추방되어 죽을 때까지 돌아가지 못했다.

 

아르도(3.7)

신분 : 수도원장

연대 : 843년

지역 : 아니안

 

   성 아르도는 프랑크인으로서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Languedoc)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는 수도자가 된 후에 자신의 이름을 아르도로 개명하고 아니안의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2월 11일)의 초기 제자가 되었고, 사제가 된 후에는 수도원 부속학교의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아니안 수도원의 원장 시절에 장서를 수집하고 필사본을 만든 사람인 듯하다. 왜냐하면 그 수도원은 원래부터 학문과 예술의 전당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이고, 또 그 수도원 학교의 영향으로 프랑스와 독일에 여러 수도원 학교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는 아르두스(Ardus)로도 불린다.

 

에오스터와인(3.7)

신분 : 수도원장

연대 : 686년

 

   성 에오스터와인은 영국 노섬브리아(Northumbria)의 귀족으로 태어나 궁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외모가 잘 생기고 또 언변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의 장래는 아주 밝았다. 그러나 그는 수도생활에 대한 강력한 부르심을 느끼고 스스로 웨어마우스(Wearmouth) 수도원에 들어갔다. 성 에오스터와인의 높은 신분 때문에 수도원 측에서 다소 의아해 하였으나, 곧 그의 신심과 겸손이 돋보였으므로 다른 수도자들로부터 큰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었다.

   성 베네딕투스 비스코프(Benedictus Biscop, 1월 12일) 원장은 장시간 동안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원장을 따로 세우려고 선거를 실시하였는데 그가 선출되었다. 그는 4년 동안 성공적으로 또 아주 현명하게 수도원을 이끌어 나가다가 임기를 다하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그는 원장이 된 후에도 죽을 때까지 다른 수도자와 함께 자는 공동 침실에서 지냈다. 그는 동료 수도자들이 밤기도를 바치는 동안 하느님의 품에 고요히 안겼다.

 

에우불로(3.7)

 

신분 : 순교자

연대 : 309년

지역 : 카이사레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팔레스티나(Palestina)의 통치자는 피르밀리아누스였다. 성 하드리아누스(Hadrianus, 3월 5일)와 성 에우불루스(또는 에우불로)는 거룩한 증거자를 찾아보기 위하여 바타네아(Batanea)에서 카이사레아로 왔다. 이 도시의 성문에서 검문을 당했을 때 그들은 상인이라고 거짓말을 하였으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를 돌보기 위해 먼 길을 왔다는 사실이 곧 밝혀지게 되었다.

   결국 그 자리에서 체포된 그들은 관리들에게 끌려가 처음에는 매를 맞았으나, 신앙을 포기하거나 그 도시의 신자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쇠막대기로 옆구리를 찌르는 등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야수들의 밥이 되었다. 그러나 성 하드리아누스는 사자의 밥이 되지 않았다. 사자가 그를 해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 하드리아누스는 칼을 맞고 순교하였다. 한편 성 에우불루스도 이와 비슷한 형벌을 받고 이틀 뒤에 순교하였다. 그는 참수를 당해 순교하였다.

 

요한 라크(3.7) (복자, 신부)

요한 아일랜드(3.7) (복자)

제르민 가디너(3.7) (복자, 신부)

신분 : 순교자

연대 : 1544년

 

   요한 라크(Joannes Larke)는 성 토마스 모어(Thomas More, 6월 22일) 경의 전속사제였다는 말도 있으나 사실은 모어 경이 자주 다니던 첼시(Chelsea) 성당의 주임사제였고, 순교 직전까지는 성녀 에텔부르가(Ethelburga) 본당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거짓 맹세를 한 적이 없을 정도로 곧은 사람이었다. 그는 1544년에 체포되었는데, 이때 제르민 가디너(Jermyn Gardiner 또는 저먼 가디너, German Gardiner) 신부와 요한 아일랜드(Joannes Ireland)란 청년도 함께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성 요한 라크와 성 제르민 가디너는 1886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성 요한 아일랜드는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다.

 

테오필로(3.7)

신분 : 주교, 증거자

연대 : 845년

지역 : 니코메디아

 

   성 테오필루스(또는 테오필로)는 아시아에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온 소년으로 그곳의 주교인 성 타라시우스(Tarasius, 2월 25일)로부터 총애를 받고 또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학업을 마칠 즈음에 수도성소를 강하게 느끼고 염원했기 때문에 성 타라시우스는 그와 또 다른 제자인 성 미카엘(Michael, 5월 23일)을 보스포루스(Bosporus) 해협 근처에 있는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 후 그 두 사람은 모두 주교가 되었는데, 성 테오필루스는 니코메디아(오늘날 터키의 이즈미트, Izmit), 성 미카엘은 신나다 교구의 주교가 되었다.

   레오 5세 황제가 제국 내에 다시금 성상 파괴 정책을 재개하려 할 즈음에 성 테오필루스는 이를 격렬히 반박하고 나섬으로써 카리아(Caria)의 숲 속에 감금되었다가 나중에 운명하였다. 그는 이처럼 정통 교리를 수호했을 뿐만 아니라 예언의 은혜가 뛰어났으며, 가난한 이와 과부 그리고 고아와 부랑자들에게 깊은 사랑을 표시했고 또 이들을 위한 구호소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테오필락투스(Theophilactus)로도 불린다.

 

 

(가톨릭 굿뉴스 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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