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브리디오(2.9)◀
신분 : 주교
연대 : 527년경
지역 : 에가라
성 네브리디우스(또는 네브리디오)는 에스파냐 바르셀로나(Barcelona) 근방 에가라 도시의 주교였다. 그의 주교좌와 도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포로(2.9)◀
신분 : 순교자
연대 : 260년경
지역 : 안티오키아
성 니케포루스(또는 니체포로)는 평신도이고 사프리키우스(Sapricius)는 사제였는데, 그 두 사람은 자주 싸움을 하던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사프리키우스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성 니케포루스는 형장으로 끌려가는 그에게 다가가서 화해를 요청하면서 용서를 빌었으나 그 사제는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사제는 참수당하는 순간에 배교하고 말았다. 그 후 성 니케포루스는 그 사제를 다시 찾아가 화해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자신도 그리스도인임을 밝혔다. 그는 그 사제의 고발로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순교했다고 전해온다.
▶도나토(2.9)◀
▶프리모(2.9)◀
신분 : 부제, 순교자
연대 : 362년
성 프리무스(Primus)와 성 도나투스(또는 도나토) 부제는 북서 아프리카 라발룸(Lavallum)에서 교회의 감독에 반대하여 투쟁하던 도나투스파(Donatism)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라사(2.9)◀
▶암몬(2.9)◀
▶에밀리아노(2.9)◀
신분 : 순교자
연대 : 연대미상
성 암몬(Ammon)과 성 에밀리아누스(Aemilianus) 그리고 성녀 라사를 포함한 44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아프리카의 멤브레사(Membressa)에서 순교하였다.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2.9)◀
신분 : 교육자
연대 : 1854-1910년
지역 : 에콰도르
성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는 1854년 11월 7일 남아메리카 에콰도르의 쿠엥카(Cuenca)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전쟁에서 싸운 유명한 레온 페브레스 코르데로(Leon Febres Cordero) 장군이며, 그의
아버지는 국내 정치 사안에 영향을 끼치던 프란치스코 페브레스 코르데로 몬토야(Francisco Febres Cordero Montoya)였다.
아버지 프란치스코는 매력 있는 교양인이었으며 5개 국어에 능통했다. 성인이 태어날 즈음에는 쿠엥카의 신학교에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의심할 필요 없이 성 미카엘의 성소는 그의 어머니인 아나 무뇨즈(Ana Munoz)와 신심 깊은 외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19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에서 5명이 수녀가 되고 1명은 예수회 사제가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학자 성인의 탄생을 위해 완벽한 가족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9살 때 성 미카엘은 1863년 요한 세례자 드 라 살(Joannes Baptista
de la Salle, 4월 7일)의 그리스도 교육 수도회가 쿠엥카에 세운 학교의 첫 학생이 되었다. 그는 학교에서 접하게 된 지성의 생활과
수도회의 겸손한 생활양식을 사랑했다. 그래서 후일에 기록하기를 “수도회 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언젠가 거룩한 수도복을 입기를
열망하는 마음을 주셨다. 나는 언제나 수사들과 함께 있는 것을 즐겼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가족 중에서 사제가 나온다면 자랑스러워
했겠지만 평수사가 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이해할 수 없어서 반대하였다. 수도생활에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부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성
미카엘은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심하게 앓고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어머니는 수사로서 아들의 성소를
인정하였다.
1868년 3월 24일 그는 쿠엥카에서 수도회의 검은 수도복을 입으면서 미카엘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그 수도회 최초의 방인 성소자로 입회하여 수도복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모교에서 언어(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를 가르쳤으며,
일 년 후 키토(Quito)의 학교로 발령받았다. 그가 부임했을 당시 6년 된 학교에는 250명의 학생이 있었지만 다시 6년 후 학생 수는 천
명을 넘어섰다. 이 시기에 성 미카엘 수사는 자신이 쓴 많은 책 중 첫 번째 책을 출판하였다.
하지만 세속
과목들을 가르치고 집필하는 것은 그의 첫째가는 기쁨은 아니었다. 그의 첫 번째 기쁨은 어린이들의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는 매우 인기
있는 선생님이었다. 성 미카엘 수사는 자신의 가르침을 사도적 성소로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현대 사회의 가련한 상태에서 나의
거룩한 구세주께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거나, 모든 선에 있어서 나의 절대적 부족함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영혼의 승리에로 나를 부르신다. 내가
그분의 음성에 귀를 막을 수 있을까? 나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에게 실망할까봐 두려워할 수 있을까? 사랑과 감사의 이 모범을 거부할 만큼
대담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맡는 모든 일들을 사랑의 정신으로 맡아야 하며,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 나를 채용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교육자로서 성 미카엘의 재능은 키토의 학교들의 공식 검열관으로 지정되면서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교육과 수도생활 중에 학자로서의 임무를 지속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성 미카엘은 교과서를 쓰고, 교리교재, 시와
그리스도교 영성 작품을 저술하였다. 그는 카스티야(Castilla) 에스파냐어 연구에서 특출한 명성을 얻게 되었고, 그 중 몇 권은 에콰도르의
모든 학교에서 필수 교재가 되었다. 결국 그는 1892년 에콰도르 학술원 회원이 된 후 에스파냐 왕립 학술원, 프랑스 학술원, 베네수엘라
학술원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07년 3월 성 미카엘은 프랑스어로 된 더 많은 교과서와 다른 책들을
번역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가게 되었다. 프랑스 시민사회와 종교의 불안한 기운은 수도회의 작품을 프랑스 외부에서 지속시킬 수 있도록 드 라 살
연구소(De La Salle Institute)의 문서들을 에스파냐어로 번역해야 할 급박한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성 미카엘은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4월) 앓게 되었고, 병이 낫자마자 파리의 세브르 거리에 있는 집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내 방이 있고, 책이 있으며, 근처에 성당이 있다. 이것이 완벽한 행복이다.”
7월에
그는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벨기에의 브뤼셀 근교에 있는 모원으로 이동하였으며 벨기에의 총회에도 참석하였다. 그는 더 많은 집필을 위해 유럽에
계속 머물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성 미카엘은 번역작업에 몰두하다가 건강에 무리가 와서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 근처의 청원자
숙소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몇 달 동안 에스파냐어를 가르쳤다. 1909년 7월 26일 바르셀로나에서 시민혁명이 시작되어 시민들이
수도원을 공격하고 교회 재산을 파괴하여 모든 수도자들에게 큰 근심이 되었다. 그로 인해 1910년 1월 감기에 걸린 성 미카엘 수사의 몸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결국 1910년 2월 9일 동료 수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종하였다. 교사와 학자로서 성 미카엘 수사의 명성은 그의 성덕과
일치했다. 그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파냐어를 사용하는 국가에서 그에 대한 대중신심이 생겼다.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그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현존을 강하게 느끼는 신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성 미카엘의 첫 전기 작성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의 사랑스러운 에콰도르의 형제는 시간이 조금 흐르면 변질되는 외적 아름다움의 은총을 받지는 않았다. 키는 컸지만 그의 자세는
어렸을 때부터 구부정했다. 용모는 어두웠고 여위었으며, 금욕 실천과 지병으로 인한 주름살이 깊은 고랑을 이루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 표정은 그의 영혼과 하느님의 은총의 조명으로 인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평화롭고 친절한 본성에서
나오는 온순함이 흘러넘쳐 반향된 것이다. 그의 매우 가는 입술은 항상 지속적이고 은총 가득한 웃음을 지니고 있었다. 맑고 투명한 눈은 가장
순진한 어린이의 눈빛이었으며, 복음서에서 이야기하는 설명할 수 없는 평화에 기인할 수밖에 없는 고요함과 기쁨으로 인해 반짝거렸다. 그의
생김새에서 흘러나오는 고요한 표현은 조용하고 침착한 정신이 그 밑에 흐르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성
미카엘의 유해는 1936년 스페인 내전 중에 에콰도르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1937년 2월 5일 에콰도르에 도착했을 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짧은 시간 안에 키토에 있는 그의 묘소는 성지순례의 중심이 되었다. 정부는 그를 기리기 위해 기념우표를 발행하였고, 탄생 100주년을 맞아 공공
공원에 기념물을 세웠다. 1955년 6월 4일 3만 명의 학생이 참여한 거대한 행진 후에 동과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이 그에게
헌정되었다.
성 미카엘은 1977년 10월 30일 동료 수사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Mucianus Maria
Wiaux, 1월 30일)와 함께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이어 1984년 4월 7일 수도회의 창립자인 성
요한 세례자 드 라 살(Joannes Baptista de la Salle)의 축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에콰도르 최초의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사비노(2.9)◀
신분 : 주교
연대 : 566년
지역 : 카노사
성 사비누스(또는 사비노)는 이탈리아 풀리아(Puglia) 지방의 카노사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하느님의 일만을 생각하고 돈을 경시했다. 그 후 그는 카노사의 주교로 축성되었고,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와 함께 당대의 최고 성직자로서 높은 공경을 받았다고 한다. 고령에 접어든 그는 시력을 잃었으나 내면의 빛은 더욱 밝았고 예언의 은혜는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현재 그의 유해가 안장된 바리(Bari)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안스베르토(2.9)◀
신분 : 주교
연대 : 695년경
지역 : 루앙
프랑스 국왕 클로테르 3세(Clotaire III)의 수상이었던 성 안스베르투스(Ansbertus, 또는 안스베르토)는 결혼의 의무와 정치인의 직분 그리고 수도자의 잠심 정신을 통합시킨 인물이었다. 후일 그는 성 반드레지실루스(Wandregisilus, 7월 22일)의 지도하에 퐁트넬(Fontenelle)에서 수도복을 입었으며, 성인의 사망 후에 즉시 그의 후계자로 선출되었다가 리옹(Lyon)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는 국왕 테오도리쿠스(Theodoricus) 3세의 고해 신부였고, 684년에는 루앙의 주교가 되었다.
▶알렉산데르(2.9)◀
▶암모니오(2.9)◀
신분 : 순교자
연대 : 연대미상
성 암모니우스(Ammonius)와 성 알렉산데르는 키프로스(Cyprus)의 솔리(Soli)에서 순교하였다.
▶알렉산데르(2.9)◀
신분 : 순교자
연대 : 연대미상
지역 : 로마
성 알렉산데르와 38명의 동료 신자들은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크로난(2.9)◀
신분 : 주교
연대 : 8세기
지역 : 아일랜드
아일랜드의 주교인 성 크로난은 아일랜드의 교회법을 체계화하였기 때문에 '현자'로 불린다. 그는 전례와 겸손의 찬미가였다. 성 크로난은 리즈모어(Lismore)의 주교인 성 로난(Ronan)과 동일인물일 수도 있다.
▶테일로(2.9)◀
신분 : 수도승, 주교
연대 : 6세기경
지역 : 란다프
성 테일로는 남부 웨일스(Wales) 지방과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etagne) 지방에서 큰 공경을 받고 있으나 자세한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아마도 그는 웨일스 지방의 영향력 있는 교회인사였고 선교의 중심지는 란다프(Llandaff) 교구였던 것 같다. 그는 펨브루크셔(Pembrokeshire)의 페날리(Penally)에서 태어나 선교사로 일하던 중 성 다윗(David, 3월 1일)과 함께 예루살렘을 순례하였으며, 그 길로 브르타뉴로 가서 성 삼손(Sampson, 7월 28일)과 함께 돌(Dole) 지방에서 7년 동안 선교하다가 웨일스로 돌아와서 란다프에서 운명한 듯 보인다. 그가 란다프 교구의 제2대 주교였음은 확실하다.
(가톨릭 굿뉴스 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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