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시오(2.8)◀
신분 : 주교
연대 : 611년경?
지역 : 브장송
성 니케티우스(또는 니체시오)가 주교가 되면서부터 스위스 니옹(Nyon)에 있던 임시 주교좌를 브장송으로 옮기고 훈족의 침략으로 파괴된 성당을 임시 복구하였다. 거룩하고 박식한 주교였던 그는 이단에 대하여 엄격하였으며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와 가깝게 지내는 사이로 서로 서신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그의 유명한 친구로는 성 콜룸바누스(Columbanus, 11월 23일)가 있다. 그는 니지에르(Nizier)로도 불린다.
▶디오니시오(2.8)◀
▶세바스티아노(2.8)◀
▶에밀리아노(2.8)◀
신분 : 순교자
연대 : 연대미상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와 성 에밀리아누스(Aemilianus) 그리고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에 대해 알려진 것은 단지 그들이 아르메니아(Armenia) 출신 수사들이라는 것뿐이다.
▶루치오(2.8)◀
▶바오로(2.8)◀
▶치리아코(2.8)◀
신분 : 순교자
연대 : 연대미상
성 바오로(Paulus)와 성 루키우스(또는 루치오) 그리고 성 키리아쿠스(Cyriacus)는 로마(Rome)에서 순교하였다.
▶마인골드(2.8)◀
신분 : 순교자
연대 : 892년/10세기
10세기 벨기에에는 사후에 큰 공경을 받은 마인골드라는 거룩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이야기는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그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리에주(Liege) 지방 위(Huy)의 백작인 또 다른 마인골드의 이야기와 섞이게 되었다. 다소 혼동스런 전승에 의하면 성 마인골드는 영국의 왕 후고(Hugo)의 아들로 자식이 없던 아르눌푸스(Arnulphus) 황제의 상속자가 되어 궁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를 유산 상속자로 결정한 것에 반대하는 무리들이 그의 입궁을 반대하고 있었다. 아무튼 성 마인골드는 자신을 반대하던 공작의 여동생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공작의 집요한 공격은 끝이 없었고 결국 성 마인골드 부부는 많은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통회자의 옷을 입고 7년 동안이나 방랑자 생활을 했다. 그 후 집으로 돌아온 그는 원한을 풀지 않았던 공작의 부하들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느님의 정의에 입각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았기 때문에 순교자로서 큰 공경을 받게 되었다.
▶믈라다(2.8)◀
신분 : 수녀원장
연대 : 994년
지역 : 프라하
성녀 믈라다는 프라하의 수녀원장이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내용이 없다.
▶바오로(2.8)◀
신분 : 주교
연대 : 649년
지역 : 베르뒹
성 바오로(Paulus)는 베르됭의 주교이자 복구자였다. 그가 처음으로 세속에서 은퇴했을 때 그는 은수자로서 독일 트리어(Trier) 부근 보그(Voge) 산에서 살았다. 그런 다음 톨라이(Tholey) 수도원에 들어가서 그곳 수도원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630년 다고베르트(Dagobert) 왕은 성 바오로를 베르됭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베드로 이네오(2.8)◀
신분 : 추기경, 주교
연대 : 1080년경
지역 : 알바니아
성 베드로 이네우스(Petrus Igneus)는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의 알도브란디니(Aldobrandini) 가문 출신이다. 그는 성 요한 괄베르투스(Joannes Gualbertus, 7월 12일)의 지도하에 발롬브로사(Vallombrosa)에서 베네딕토 회원으로 수도서원을 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원장의 명에 따라 한 가지 시험을 받았다고 한다. 즉 길이 10피트, 폭이 5피트나 되는 두 나무 기둥이 좁은 길에 세워지고 그 사이를 무사히 통과해야만 하는 시험이었다. 성 베드로는 열렬히 기도하면서 미사를 봉헌한 뒤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험장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 두 기둥이 자연 발화되어 불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오로지 전능하신 하느님께 매달리면서 불꽃에서 구해달라고 애원하고는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 불꽃은 마치 구약의 다니엘(Daniel)과 그 동료들을 불태우지 않았던 것처럼 그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았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그는 '이네오', 즉 불 속에서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은 사람이란 별명을 얻었고, 후일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에 의하여 알바니아의 추기경 주교로 임명되었다. 교회미술에서 성 베드로는 십자가를 쥐고, 장백의를 입고, 영대를 걸친 채 성 요한 괄베르투스를 향해 불을 통과하는 젊은 수사로 그려진다. 성 베드로는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스테파노(2.8)◀
신분 : 설립자, 수도원장
연대 : 1046-1124년
지역 : 뮈레
성 스테파누스(Stephanus, 또는 스테파노)는 프랑스 중남부 오베르뉴(Auvergne)의 티에르 자작의 아들로서 부친을 따라 이탈리아로 갔다가 수도자의 꿈을 실현시켰다. 그는 칼라브리아(Calabria)에 널리 알려진 몇몇 수도자들의 표양을 따르는 공동체를 프랑스에 세울 허가를 교황청으로부터 받았다. 그래서 그는 1110년경 리모주(Limoges) 교외의 뮈레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그랑드몽(Grandmont) 수도회로도 알려졌다. 그는 회칙을 쓰지 않고 다만 이렇게 말했을 따름이다.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회칙은 없다." 그는 절대 청빈과 무소유를 강조했고, 모든 수도자가 은둔소 밖을 나다닐 수 없으며, 평수사들이 수도원 관리를 전적으로 맡게 하였다. 영국의 헨리 2세 왕은 그랑몽회의 최고 후원자였다. 그는 1189년 헨리 2세 왕의 소망대로 교황 클레멘스 3세(Clemens 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엘플레다(2.8)◀
신분 : 수녀원장
연대 : 714년
지역 : 휘트비
성녀 엘플레다는 노섬브리아(Northumbria)의 왕인 오스위(Oswy)와 그의 아내인 성녀 엔플레다(Enfleda, 11월 24일)의 딸이다. 그녀의 부친은 만일 하느님께서 이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게 해 주시면 딸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또 땅을 주어서 수도원을 짓게 하겠다고 맹세하였다. 마침내 전쟁의 행운이 그에게 기울자 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하틀풀(Hartlepool) 수도원으로 딸을 보냈다. 그곳에는 휘트비에 유명한 수도원을 세웠던 성녀 힐다(Hilda, 11월 17일)가 있었다. 성녀 엘플레다는 성녀 힐다를 계승하여 그곳의 원장이 되었다. 성녀 엘플레다의 권위와 영향력은 수도원 담을 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성 쿠트베르투스(Cuthbertus, 3월 20일)를 흠모하였으며 그를 본받아 높은 성덕을 닦았다. 그녀의 명성은 아일랜드의 연대기에 기록될 정도였다.
▶요한(2.8)◀
신분 : 설립자
연대 : 1213년
지역 : 마타
현 프랑스 남동부 프로방스(Provence)의 포콩(Faucon) 출신인 성 요한(Joannes)은 젊어서
엑스(Aix)로 가서 무술과 말 타기 등을 배웠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자선활동과 기도에 있었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후 그는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첫 미사 때에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고
모슬렘들로부터 노예를 해방시키는 일에 헌신하기 시작하던 중 거룩한 은수자인 발루아(Valois)의 성 펠릭스(Felix, 11월 20일) 신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와 함께 지냈다.
그래서 이 두 성인은 노예 해방을 위한 수도회 설립을 계획하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의 인가를 받았다. 이때 성 요한이 초대총장으로 뽑혔다. 이것이 '삼위일체 수도회'의 시작이었다.
이 수도회는 1201년에 186명의 그리스도인 포로를 석방하고, 다음 해에는 요한 혼자서 110명을 해방시키는 등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성
요한에 대한 공경은 1655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와 1694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에 의해 승인되었다.
▶유벤시오(2.8)◀
신분 : 주교
연대 : 1세기경
지역 : 파비아
전승에 의하면 성 마르코(Marcus, 4월 25일)의 제자이자 아퀼레이아(Aquileia)의 주교인 성 헤르마고라(Hermagoras, 7월 12일)는 파비아 선교를 위해 성 시루스(Syrus, 12월 9일)와 성 유벤티우스(또는 유벤시오)를 급하게 파견하였다. 성 유벤티우스는 파비아에서 그곳의 초대주교가 되었다.
▶이사야(2.8)◀ (복자)
신분 : 수사
연대 : 1471년
지역 : 크라쿠프
폴란드의 크라쿠프 태생인 이사야 보네르(Isaias Boner)는 부모의 명에 따라 공부하러 갔으나 어떤 경로를 통했는지는 모르나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는 학덕과 성덕이 뛰어나서 성서의 어려운 구절들을 밝혀내는 학문적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개인적으로 고행에 게으르지 않았고 또 매우 훌륭한 설교를 하여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의 휴식은 성지나 경당을 방문하는 것이었고 또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또한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시는 성모님의 환시도 보았다.
▶코인타(2.8)◀
신분 : 동정 순교자
연대 : 249년
지역 : 알렉산드리아
필리푸스 황제의 통치 기간 중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는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길에 즐비하였었다. 그러한 희생자 중 한 명으로 젊은 처녀인 성녀 코인타는 이교도의 신에게 희생 제사 바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심한 고문을 받고 돌아 맞아(또는 말 꼬리에 묶어서 죽을 때까지 거리를 달려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성녀 코인타는 교회미술에서 돌에 맞는 처녀나 말에 의해 끌려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흔히 말 꼬리에 발이 단단히 매어진 채 끌려가는 모습으로도 표현된다. 그녀는 퀸타(Quinta)로도 불린다.
▶쿠트만(2.8)◀
신분 : 은수자, 목동
연대 : 9세기경
지역 : 스테이닝
성 쿠트만의 이름은 중세기의 달력에 여러 번 나오며 영국 잉글랜드(England) 남동부 서식스(Sussex)의 성당이 이 성인에게 봉헌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별로 전해오는 것이 없고 단지 어려서부터 목동이었다고 한다.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연로한 모친을 모셨는데, 그의 어머니는 불구자여서 그가 항상 손수레에 태워 모셨다고 한다. 스테이닝에 살 때 그는 이웃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조그마한 성당을 손수 짓고 그곳에서 여생을 지냈다. 크리스토퍼 프라이(Christopher Fry)는 그의 연극에서 얼마간 잊혀졌던 성 쿠트만의 일생을 ‘손수레를 미는 소년’이란 제목으로 되살렸다.
▶호노라토(2.8)◀
신분 : 주교
연대 : 570년
지역 : 밀라노
성 호노라투스(또는 호노라토)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와의 논쟁과 랑고바르드족(Langobard)의 침입으로 인해 어려운 시기에 밀라노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랑고바르도족에 의해 그의 주교좌에서 쫓겨나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가톨릭 굿뉴스 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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