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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축일 (聖人)

1월 22일 성인들

by 세포네 2006. 1. 22.

가우덴시오(1.22)

신분 : 주교

연대 : 418년

지역 : 노바라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Torino) 근처 이브레아(Ivrea)의 사제인 성 가우덴티우스(또는 가우덴시오)는 노바라의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4월 30일)와 베르첼리(Vercelli)의 성 에우세비우스(Eusebius, 8월 2일)와 친구였다. 그는 성 라우렌티우스를 계승해서 노바라의 주교가 되어 20년간 주교좌에서 사목하였다.

 

도미니코(1.22)

신분 : 수도원장

연대 : 1031년

지역 : 소라

 

   이탈리아의 폴리뇨(Foligno)에서 태어난 성 도미니코(Dominicus)의 어릴 시절 기록은 유실되었고, 그가 수도자가 된 후의 기록만이 다소 남아 있을 뿐이다. 성 도미니코는 베네딕토회 수도자가 된 후 주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예를 들어 소라, 스칸드릴리아(Scandrilia), 상그로(Sangro) 그리고 다른 도시에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세우는데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세운 각 수도원의 초대원장이 될 만큼 개척자의 정신이 뛰어났으며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는 새 수도원을 세우기 전까지는 주로 독수자처럼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일단 사업이 시작되면 불같이 뜨거운 열정으로 일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구령사업에도 남다른 능력을 보였는데, 때때로 이상한 기적을 행함으로써 수많은 죄인을 회개시키고 교회를 확장하였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Campania)의 소라에서 80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블레실라(1.22)

신분 : 과부

연대 : 383년

지역 : 로마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의 편지에 보면 성녀 바울라(Paula, 1월 26일)의 딸인 성녀 블레실라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청상과부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결혼생활 7개월 만에 남편을 잃고 매우 심한 열병으로 고생하였다. 하느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병에서 회복되자 그녀는 신심생활에만 전념키로 결심하고 매우 힘든 생활을 스스로 하였다. 또 그녀는 혼자 힘으로 히브리어 공부할 정도로 열정적이었고, 히에로니무스 성인이 전도서를 번역하게 된 계기 또한 그녀의 간곡한 요청에 따른 것임이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성녀 블레실라는 20세가 되던 해에 로마에서 운명하였다. 그녀는 블라이실라(Blaesilla)로도 불린다.

 

빅토르(1.22)

신분 : 수교자

연대 : 305년

 

   성 빈첸시오(Vincentius)와 성 오론티우스(Orontius)는 프랑스 니스(Nice) 근교 시미에(Cimiez)에서 온 형제였다. 그들은 에스파냐쪽 피레네 산맥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헤로나(Gerona) 지방의 푸이세르다(Puigcerda)에서 성 빅토로와 함께 순교하였다. 그들의 시신은 그 후 프랑스의 앙브렁(Embrun)으로 옮겨졌다.

 

빈첸시오(1.22)

오론시오(1.22)

신분 : 순교자

연대 : 305년

 

   성 빈첸시오(Vincentius)와 성 오론티우스(Orontius)는 프랑스 니스(Nice) 근교 시미에(Cimiez)에서 온 형제였다. 그들은 에스파냐쪽 피레네 산맥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헤로나(Gerona) 지방의 푸이세르다(Puigcerda)에서 성 빅토로(Victor)와 함께 순교하였다. 그들의 시신은 그 후 프랑스의 앙브렁(Embrun)으로 옮겨졌다.

 

빈첸시오 팔로티(1.22)

 

신분 : 신부, 설립자

연대 : 1795-1850년

 

   성 빈첸시오 팔로티(Vincentius Pallotti)는 1795년 4월 21일 로마(Rome)에서 식료품 장사를 하던 부유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스승이었던 돈 페리(Don Ferri)는 그를 “작은 성인이지만 머리는 조금 둔했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학업 성취 능력은 향상되었고 23세에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는 로마의 사피엔자(Sapienza)에서 조교수가 되어 신학을 가르쳤다.

   성 가스파르 델 부팔로(Gaspar del Bufalo, 1월 2일)와의 우정에서 고무된 성 빈첸시오는 자신의 직위를 포기하고 여러 본당에서 사목활동에 전념하였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사도적 역할에 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예견하듯이, 1835년 성 빈첸시오는 변화와 정의에 헌신하고자 하는 성직자, 수도자와 평신도들을 모아 가난한 소년들을 위한 야간학교와 직업학교를 세우고 선진 농업기술의 전수를 위한 학원을 세웠다. 학교에서는 젊은이들에게 제화, 제단 기술과 농업 같은 시장성이 있는 기술을 가르쳤고 그들의 작업에 자부심을 주입시켰다. 그는 수도생활의 기도와 침묵에서만 성스러움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 필요한 부분을 발견한 사람이 채워주는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전제에서에서 일했다. 이러한 정책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성 요한 보스코(Joannes Bosco, 1월 31일)의 정책과도 비슷했다.

   초기의 이 그룹에서 팔라티노회(가톨릭 사도회)가 생겼으며 성 빈첸시오의 일생 동안 12명의 회원만 있었지만 그 후로 성장하였으며 1843년에는 팔라티노 수녀회가 설립되었다. 그들은 이탈리아, 브라질,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지에 퍼져 창립자와 같은 이민자들을 돌보았으며 동방 정교회 그리스도교인들과의 종교 간의 대화를 촉진시키는 데 전문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젊은 교수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은 트라피스트 회원과 은수자들의 엄격함과 침묵에서 잘라져 나온 부분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거룩해 지십시오. 사회관계에서, 당신의 일터에서, 여가 생활 중에, 당신의 가르치는 직무에서, 출판사와의 만남과 죄인들과의 만남에서 거룩해 지십시오. 성스러움이란 단지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 언제 어디에나 있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성 빈첸시오의 사도적 활동은 자신의 엄격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1837년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는 사람들의 영적 목마름을 채워주기 위해 극도의 노력을 했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제는 누구나 쏴버리겠다고 위협하는 환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파로 분장하기도 했다. 1844년 성 빈첸시오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신부를 런던(London)에 사는 이탈리아인들을 사목하도록 파견하였다. 그 후로 그의 수도회는 세계 각지로 뻗어나갔다. 로마의 시민들은 성 빈첸시오 신부를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5월 26일)의 19세기 판으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성 빈첸시오는 자신의 옷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반라의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다가 1850년 1월 22일 55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 중인 1963년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아나스타시오(1.22)

 

신분 : 수도승, 순교자

연대 : 628년

지역 : 페르시아

 

   그리스어로 된 성 아나스타시우스(또는 아나스타시오)의 자서전에 따르면 페르시아인인 이 젊은 군인의 본명은 마군닷(Magundat)이었고, 614년 예루살렘을 점령한 페르시아의 코스로에스 1세 군대 소속이었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리스도인 아나스타시우스로 개명하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몇 년 후 그는 페르시아 유격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카이사레아(Caesarea)로 갈 허락을 받았다. 그는 여기서 체포되어 중노동에 처해졌다. 신앙을 포기하라는 수차례의 고문 중에서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결국 아나스타시우스는 다른 70여 명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목 졸려 죽임을 당했다. 처음에 그의 시신은 인근에 있던 성 세르기우스(Sergius) 수도원에 묻혔으나 후일 그의 유해는 로마(Rome)의 성 빈첸시오(Vincentius)와 성 아나스타시우스 성당에 안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윌리엄 파텐슨(1.22) (복자)

신분 : 순교자

연대 : 1592년

 

   영국 더럼(Durham) 출신인 윌리엄 파텐슨은 프랑스의 랭스(Reims)에서 수학하여 1587년에 사제가 되었으며 15개월 후에 영국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주로 서부 지방을 다니며 선교했는데, 1591년 성탄절 직전에 런던(London)에서 체포되어 타이번(Tyburn)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그는 빌리암 파텐슨으로도 불린다.

 

 

(가톨릭 굿뉴스 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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