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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축일 (聖人)

1월 15일 성인들

by 세포네 2006. 1. 15.

마우로(1.15)

 

 

신분 : 수도원장

연대 : 580년경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가 돌보던 그의 영적 아들 가운데 신심과 학덕이 뛰어난 인물로 성 마우루스(또는 마우로)가 있었다. 그가 처음에 성 베네딕투스에게 왔을 때에는 겨우 12살의 어린 나이였으나, 마침내 그 성인의 보조자가 될 만큼 성장하였다. 한 번은 성 플라키두스(Placidus, 10월 5일)가 호수에 빠졌는데 성 베네딕투스 성인이 그의 방에서 영적인 눈으로 이 사실을 알고는 성 마우루스에게 명하여 그를 구하게 하였다. 성 마우루스가 그 공로를 그의 스승 성 베네딕투스에게 돌리자,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놀라운 순종의 은혜를 주셨다고 한다. 성 베네딕투스가 몬테카시노(Monte Cassino)로 갔을 때 성 마우루스가 수비아코(Subiaco)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원장직을 사임하고 은수생활을 선택하였는데, 2년 뒤에 병을 얻어 운명하였다. 성 마르티누스(Martinus) 성당의 제대 오른쪽에 안장된 성 마우루스는 오늘날 성 베네딕투스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베네딕토회의 훌륭한 설립자로 간주되고 있다.

 

마카리오(1.15)

신분 : 수도원장, 은수자

연대 : 300-390년

지역 : 이집트

 

  이집트 출신인 성 마카리우스(또는 마카리오)는 젊어서 가축을 돌보고 지냈으나, 하느님의 부르심을 인식하여 세속을 등지고 조그마한 움막에 혼자 살면서 매트를 만들며 기도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런 그에게 어느 부인을 폭행했다는 누명이 씌어지자 그는 길거리로 끌려 나가 매를 맞는 등 온갖 수모를 당하였다. 결국 그는 모든 시련을 인내한 뒤에야 혐의가 풀려 무죄함이 드러났다.

   그 후 그는 30세 때에 스케트 사막으로 들어가 은수생활을 시작하였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의 생활은 극히 엄격하여 한 주일에 한 번의 식사만 했고, 일부러 갈증을 느끼기 위해 물을 마시지도 않았다. 그는 항상 간단한 몇 마디로 제자들을 가르쳤고 거의 침묵 속에서 지냈다. “기도할 때에는 많은 말을 하지 말라. 다만 주님, 제게 자비를 베푸시고, 인도해 주소서 하는 말만 마음으로 되풀이 하여라.” 한때 그의 제자였던 젊은 성 마카리우스(1월 2일)와 함께 그는 나일 강의 어느 섬으로 추방된 적이 있었는데, 결국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스케트 사막에서만 60년을 살다가 운명하였으며, 사막에 살았던 최초의 은수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막시모(1.15)

신분 : 주교

연대 : 250년경

지역 : 놀라

 

   시리아인으로서 로마 군인이던 헤르미아스(Hermias)의 아들로 태어난 성 펠릭스(Felix, 1월 14일)는 이탈리아의 남부 나폴리(Napoli) 교외인 놀라에서 자랐다.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놀라의 성 막시무스(또는 막시모)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성 막시무스의 보좌로 활약하다가 그의 스승이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를 피하여 사막으로 갔을 때 스승 대신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그는 기적적으로 한 천사의 인도를 받고 감옥 문을 나섰다고 한다.

   데키우스 황제 사후에도 성 펠릭스는 수배 인물이었으나 박해가 종식될 때까지 피신하는데 성공하였다. 성 막시무스 주교가 서거했을 때 신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주교로 모셨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연로한 사제이던 퀸투스(Quintus)에게 기울어지자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무덤은 즉시 많은 기적이 일어나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성 바울리누스(Paulinus, 6월 22일)가 놀라의 주교가 되었을 때 그의 선임자인 성 펠릭스에 대한 자료들을 많이 보완하였다.

 

미가(1.15)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연대 : 기원전 8세기

 

   성 미가(Michaeas)는 구약성서 12소예언서 가운데 한 권인 미가서의 저자로, ‘미가’는 ‘미가후’의 축소형으로 ‘누가 야훼와 같으나?’라는 뜻으로 구약에서는 흔한 이름이다. 예언자 미가의 신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른 예언자들의 경우 통례로 되어 있는 아버지 이름이 생략되어 있고 단지 그의 고향인 유대의 조그마한 촌락 모레셋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1,1).

   심판을 선포하는 사명을 띠고 온(3,8) 유대 출신의 예언자 미가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사제들과 직업 예언자들의 부정을 비난하였으며, 사회적 · 경제적 불의를 신랄하게 고발하였다. 또한 그는 아모스의 정의와 호세아의 사랑을 지닌 예언자였다. 그가 활동했던 1세기 후에 유대의 원로들은 “모레셋 출신 미가가 유대 임금 히즈키야 시대에 예언하였다”(예레 26,18)라고 증언하였고 그의 활동을 들어 예레미야를 변호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컸으며, 히즈키야의 종교 개혁도 미가의 예언을 통하여 깊은 영향을 받았다. 직업 예언자들과는 달리 세련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한 미가는 사회 정의를 선포한 예언자일 뿐만 아니라 지배 계층에 대하여 소농(小農)들의 권리를 주장한 농촌 예언자로 알려져 있다.

 

베드로(1.15) (복자)

신분 : 순교자

연대 : 1208년

지역 : 카스텔노

 

   베드로(Petrus)는 프랑스의 몽펠리에(Montpellier)에서 태어나 1119년에 마글론(Maguelonne)의 부제가 된 후 1202년경에 퐁프로이드(Fontfroide)에 있는 시토회에 들어갔다. 그는 같은 동료였던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의 명에 따라 알비파(Albigenses) 이단을 척결하는 교황대사 및 심문관으로 활약했는데, 노력에 비하여 성공적인 결과는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를 미워하는 적들이 많았던 관계로 생질(Saint-Gilles) 수도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살해되고 말았다. 이때 그는 살인자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내가 너를 용서하듯이 하느님께서도 너를 완전히 용서해 주시기를 바란다.”

 

보니토(1.15)

신분 : 주교

연대 : 710년경

지역 : 클레르몽

 

  성 보니투스(또는 보니토)는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의 왕 성 지그베르트 3세(Sigebert III, 2월 1일)를 비롯하여 4명의 왕의 수상을 지낸 인물인데, 그의 재임 기간은 신앙과 정의가 꽃피던 시기였다. 667년 티에리 3세(Thierry III) 왕은 그를 마르세유(Marseilles)의 총독으로 임명했고, 689년에는 그의 형인 성 아비투스(Avitus, 2월 21일)를 계승하여 오베르뉴(Auvergne) 지방 클레르몽의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주교 임명이 법적으로 정당한지 그 여부에 대해 혼자서 고심하다가 스스로 주교직을 사임하고 클레르몽에 있는 망글리외(Manglieu) 수도원에서 보속생활을 하였다. 그 후 그는 로마(Rome) 순례를 마친 다음 리옹(Lyon)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보네(Bonet)로도 불린다.

 

세쿤디나(1.15)

신분 : 동정 순교자

연대 :250년경

 

   로마 출신의 처녀 성녀 세쿤디나는 데키우스 황제 때 로마(Rome) 근교에서 순교하였고, 성녀의 신앙고백과 증언으로 말미암아 그녀를 가두었던 간수들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아놀드 얀센(1.15) 

신분 : 설립자

연대 : 1837-1909년

 

  독일의 라인(Rhine) 강변에 위치한 작은 도시인 고흐(Goch)에서 태어난 성 아놀드 얀센은 뮌스터(Munster)의 게스돈크(Gaesdonck)에서 공부한 후 1861년 8월 15일 뮌스터 교구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12년 동안 독일 북서부의 보홀트(Bocholt) 시에 있는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무렵 비스마르크 재상에 의해 독일 전역에서 문화 투쟁이 벌어지자, 얀센 신부는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와 하느님을 향한 올바른 신앙이 온 세상에 퍼져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1873년 교직을 떠난 뒤 본격적으로 선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원을 설립하기로 결심했으나, 독일에서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네덜란드의 슈타일(Steyl)로 가서 1875년 9월 8일 ‘성 미카엘 대천사 선교사 양성 신학원’을 설립하였다. 이 신학원이 세계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말씀의 선교 수도회’(신언회)의 모태가 되었다. 말씀의 선교 수도회는 세계 선교를 활발히 펼치던 1901년 1월 25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승인을 받았다.

   한편 성 얀센 신부는 1889년 12월 8일 '성령 선교 수녀회'를 설립하여 말씀의 선교 수도회와 협력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896년 12월 8일 기도로 선교에 참여하는 관상 수녀회인 '성체조배의 성령 선교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성 얀센 신부는 1909년 1월 15일 슈타일의 수도원에서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말씀의 선교 수도회 첫 선교사였던 요셉 프라이나데메스(Joseph Freinademetz)와 함께 1975년 1월 15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하여 복자품에 올랐다. 그리고 2003년 10월 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에메베르토(1.15)

신분 : 주교

연대 : 710년

지역 : 캉브레

 

  성 에메베르투스(Emebertus, 또는 에메베르토)는 비트겔(Witger) 백작과 성녀 아멜베르가(Amelberga, 7월 10일)의 아들이며, 성녀 구둘라(Gudula, 1월 8일)와 성녀 라이넬디스(Reineldis, 7월 16일)와는 형제지간이다. 그는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 지방 캉브레의 주교가 되었다.

 

에피시오(1.15)

신분 : 순교자

연대 : 303년?

지역 : 사르데냐

 

   성 에피시우스(Ephisius, 또는 에피시오)는 가장 흉포한 박해 중의 하나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이탈리아 사르데냐 섬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순교 사실 외에 알려진 것이 없다. 초기 전승에 의하면 그의 유해가 모셔진 카포 디 풀라(Capo di Pula)에 그를 위한 성당이 있었다. 19세기 이탈리아가 프랑스에 대항하여 싸울 때 그에 대한 공경은 새로운 힘을 얻었다. 오늘날 성인은 여전히 사르데냐 섬과 그의 유해가 모셔진 피사(Pisa)에서 수호성인으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성미술에서 성 에피시우스는 천사로부터 기(旗)와 칼을 받은 젊은 전사로 표현된다.

 

요한 칼리비타(1.15)

신분 : 은수자

연대 : 450년경

 

   성 요한 칼리비타(Joannes Calybita)는 은둔생활을 하기 위하여 부모를 떠났으나 6년 뒤에 초라한 걸인이 되어 돌아왔다. 이때 부모조차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애긍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작은 움막이란 뜻의 ‘칼리비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놀라운 인내, 온순함 그리고 기도로써 자신을 성화시켰다.

 

이시도로(1.15)

신분 : 신부

연대 : 404년

지역 : 알렉산드리아

 

   성 이시도루스(Isidorus, 또는 이시도로)는 한때 니트리아(Nitria) 사막에서 은수자가 되었으나,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의 영향을 받아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그 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큰 구호소를 관리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는 85세의 일기로 운명하였는데, 그의 극기와 애덕 실천이 가장 돋보였다고 한다.

 

이타(1.15)

 

신분 : 수녀원장

연대 : 570년

지역 : 리머릭

 

   왕가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는 성녀 이타는 아일랜드 워터퍼드(Waterford)의 디시이즈(Decies)에서 태어났고, 결혼하기를 거부하다가 마침내 동정생활을 할 수 있는 허락을 부친으로부터 받았다. 그녀는 리머릭의 킬리디(Killeedy)로 옮겨 가서 하느님께 봉헌된 자매들의 공동체를 세우고 소년들을 위한 학교도 개설하였는데, 그녀의 제자 중에는 성 브렌다누스(Brendanus, 5월 16일)가 들어 있다. 그녀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였는데, 예를 들면 참수당한 사람의 머리를 재결합시켰다거나 혹은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으로 일생을 살았다는 것 등이다. 그녀의 교육 목표는 ‘마음의 순수성이 있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 신심이 내포된 생활의 단순성 그리고 사랑이 깃든 관용’이었다.

 

체올울프(1.15)

신분 : 왕, 수도승

연대 : 764년

지역 : 노섬브리아

 

   영국 노섬브리아의 왕이었던 성 체올울프는 738년에 은퇴하고는 곧장 린디스파른(Lindisfarne)의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높은 공경을 받았다. 성 베다(Beda)는 자신의 역저인 “영국 교회사”를 ‘가장 성스러운 체올울프 왕’에게 헌정하였다.

 

타르시치아(1.15)

신분 : 동정녀

연대 : 600년

지역 : 로데즈

 

 성녀 타르시키아(또는 타르시치아)는 클로테르 2세(Clotaire II) 왕의 손녀이며 위제(Uzes)의 주교 성 페레올루스(Ferreolus, 1월 4일)와는 남매 사이이다. 그녀는 프랑스 남부 로데즈에서 은수자로 살았고, 오늘날도 그곳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하바쿡(1.15)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연대 :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다의 패망이라는 비극적인 역사의 시대에 살았던 12소예언서의 하나인 하바쿡서의 저자인 성 하바쿡(또는 하바꾹) 예언자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 다니엘서 14장 33절 이하에 다소 이 예언자에 대한 설명이 있기는 하지만, 그 이야기는 ‘미드라시’(Midrash)로서 교훈적인 설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하바쿡서 안에 있는 시편과 하바쿡 1장 2-4절의 신탁이 시편의 한 유형인 애원시와 비슷하다고 하여, 하바쿡서의 저자와 시편을 저작한 성전시인과의 친분관계를 논하는 학자도 있지만, 그것도 단편적인 추정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바쿡은 나훔과 마찬가지로 우선 미지의 인물로 남겨 두는 수밖에 없다.

   하바쿡은 당시 유다 왕국이 처한 역사적 현실을 예언자적 안목 하에서 명상케 한다. 이는 3장의 시편에서도 여실히 드러나 있다. 다시 말해 과거 하느님이 행한 역사적인 위업(偉業)을 상기시키면서, 당시의 원수들도 하느님의 처벌을 받게 되리라 소망하며 멀지 않은 장래에 하느님이 극적으로 개입하리라 확신케 한 것이다. 하바쿡의 ‘예언자적 명상’의 성격은 나훔과 다소 차이가 있다. 이는 한 마디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다. 하바쿡서에 제기된 문제는 의인과 악인의 문제이다(예레 12,1-3 참조).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악인이란 노도와 같이 침범하여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칼데아인이며, 의인이란 이러한 이교도의 승리에 충격을 받은 유다 왕국의 백성이다. 하바쿡은 이스라엘이 절망과 고뇌 가운데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께 충성(emunah)하는 것뿐임을 강조하였다. 이는 이스라엘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주님께 충성하고 신뢰(aman)하라는 이사야의 메시지(이사 7,96)를 재천명한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로마 1장 17절에서 하바쿡의 이 메시지를 보다 심화시키고 있으니, 의인이 살아가야 할 방편은 오직 믿음(piotis)인 것이다.

 

 

(가톨릭 굿뉴스 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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