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복음화 등불 밝힌 사제 양성 '못자리'
<= <1>카모에스 공원에 건립돼 있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 세상을 향해 축복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조선 복음화를 위해 마카오에서 꿈을 키우던 굳건 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2>김대건 성인의 발뼈가 안치돼 있는 성 안토니오 성당. 이 성당에서는 주일마다 김 신부 성해가 현시된 가운데 미사가 봉헌된다.
<3>마카오의 상징 성 바오로 성당. 외관뿐인 성당 모습만큼이나 마카오 교회현실은 어렵다.
'동방의 작은 유럽'으로 일컬어지는 마카오. 이곳은 김대건(1822~1846)ㆍ최양업(토마스, 1821~1861) 두 신부에게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1836년 12월 모방 신부에 의해 한국인 첫 신학생으로 선발된 이들은 요절한 동기 최방제(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함께 15살 어린 나이에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8개월간 사투 끝에 중국 땅을 도보로 횡단한 세 신학생은 1837년 6월7일 꿈에 그리던 마카오에 도착했다. 세 신학생은 이때부터 1842년 2월15일까지 햇수로 6년간 마카오에서 수학하며, 철부지 소년에서 조선 교회를 가슴에 안을 청년으로 성장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 마카오는 중국과 유럽, 특히 포르투갈 문화가 공존하던 국제 도시였다. 포르투갈인들은 1537년부터 마카오에 거주하기 시작했고, 포르투갈 황실은 1576년 자국 보호권 아래에 있는 '마카오 교구'를 설정, 중국 전체를 관할하게 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732년에 마카오에 극동대표부를 설립했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는 마카오의 상징이라는 '성 바오로 성당'에서 골동품과 재활용 가구 거리인 루아 데 산토 안토니오 거리의 카모에스 공원 입구에 자리해 있다. 원래는 바로크식 2층 석조건물이었으나 1847년 극동대표부가 홍콩으로 옮긴 후 카노사의 사랑의 수녀회가 매입, 건물을 한 층 더 증축해 고아원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옛 건물은 모두 헐리고 지금은 5층짜리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서 있다.
패스트 푸드 점포와 식당가, 세탁소가 들어선 이곳이 첫 조선인 신학교라니 기대를 안고 찾아온 순례자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김대건을 비롯한 조선인 신학생들은 이곳에서 대표부 대표인 르그레즈와 신부와 교장 칼레리 신부, 리브와ㆍ매스트르ㆍ데플레시ㆍ베르뇌(훗날 제4대 조선교구장 주교가 됨) 신부 지도로 사제 양성 수업을 받았다.
김대건ㆍ최양업 두 소년은 이곳 대표부 자리에서 마카오 생활 6개월만에 혈육 이상의 동기였던 최방제를 하느님 나라로 떠나보내는 큰 슬픔을 겪었다. 최방제는 1837년 11월26일 자정쯤 두 동기가 임종기도를 하며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칼레리 신부에게서 마지막 성사를 받고 "신부님 감사합니다. 착한 예수! 착한 천주!"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그의 유해는 분명 마카오 어디에 안장됐을테지만 자료 부족으로 찾을 수 없었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 옛 자리 도로 건너편에는'성 안토니오 성당'이 있다. 이 성당 제대 밑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해 일부가 모셔져 있다. 이 성당에서는 주일마다 성 김대건 신부 성해를 현시한 채 미사가 봉헌된다. 1989년 이곳에 안치된 김대건 신부 성해는 '발뼈 조각'이다. 조선을 떠나 8개월간 걸어서 마카오 땅을 밟았던 그 발에서 나온 뼛조각이다. 바로 이 자리도 거닐었을 성인의 발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성 안토니오 성당 정면에는 마카오의 허파라 할 수 있는 '카모에스 공원'이 있다. 1557년 한때 마카오에서 살았던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 루이즈 카모에스(1524~1580)를 기려 조성한 곳이다. 김대건을 비롯한 조선인 신학생들은 이 공원을 산책하며 고향과 가족에 대한 향수를 달래곤 했을 것이다. 특히 김대건과 최양업은 동기 최방제가 죽은 후에, 민란을 피해 마닐라로 갔다가 마카오로 되돌아온 후에, 그리고 아버지의 순교 소식을 들은 후에도 아마 이 공원에서 동기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토해냈을 것이다.
'흰 비둘기 공원'이라고도 불리는 카모에스 공원 안쪽에는 성 김대건 신부 동상이 우뚝 서 있다. 갓을 쓰고 도포 차림에 영대를 걸친 성 김대건 신부는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성서를 품고 오른손으로 축복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국 주교회의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시성을 기념해 조각가 김세중씨에게 성인상 제작을 의뢰, 1985년 10월4일 이곳에 제막했다. 제막식에는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한국교회 관계자 100여명이 참석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성인상은 공원 한 귀퉁이에 모셔져 방치되다시피 했다. 동상 뒷편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주변 경관이 더욱 나빠졌고 좌대 글귀가 퇴색되는 등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다 못한 홍콩 주재 한국 특파원들이 1992년 마카오 총독을 방문, 성인상을 옮겨줄 것을 공식 건의했다. 건의를 받아들인 총독은 성인상을 기존 자리에서 15m 앞쪽으로 당겨 공원 중앙 양지바른 잔디밭에 재설치토록 했다. 자리를 옮긴 성인상은 1997년 6월 마카오와 홍콩에 거주하는 한인 신자들이 마련한 새 좌대에 안치돼 마카오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카모에스 공원에서 '포트리스 힐'(요새 언덕)으로 올라가면 언덕 정상에 성 바오로 성당 유적과 만난다. 성 바오로 성당은 중국의 첫번째 교회건물이자 예수회가 극동 아시아에 세운 최초의 대학 건물이기도 했다. 성 바오로 성당은 1835년 태풍 때 화재로 소실돼 지금은 건물 정면과 계단, 지하실 등만이 남아 있다.
성당 정면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성 바오로 성당의 모습처럼 오늘날 마카오 교회는 신학생이 단 1명뿐인 교구로 쇠락했다. 중국 문화혁명 여파로 1970년대 이후 거의 신학생을 받지 못했다. 마카오 교회에는 현재 본당이 8개가 있고, 주교 2명에 신부 76명(교구 24명, 수도회 52명)이 사목하고 있다. 신자수는 1만8000여명으로 총인구 44만2000여명의 약 4%만이 가톨릭 신자다.
마카오는 김대건ㆍ최양업 신부에게 중요한 삶의 자리였다. 그만큼 한국교회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할 곳이다. 한국교회가 마카오에 남겨놓은 것은 성 김대건 신부상과 성인 발뼈 유해뿐이다. 한국교회가 김 신부를 비롯해 그의 동기들의 흔적들이 어느 곳에 남아 있는지 구체적으로 연구 조사한 바도 없다. 김대건ㆍ최양업 신부뿐 아니라 최방제의 삶을 재조명하기 위해서는 마카오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필수적이다. 김대건 신부 순교 16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마카오를 다시 바라보는 해가 되길 희망해 본다.
리길재 기자
'[교회와 영성] > 성지(국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모승천대축일 특집/ 중국 성모성지 순례](상) (0) | 2006.08.13 |
---|---|
예루살렘의 십자가의 길 순례 (0) | 2006.03.07 |
사진으로 떠나는 성지순례[5]성베드로대성당,시스틴성당,성모설지전,성계단성당,성요한라테란 성당 (0) | 2005.10.09 |
사진으로 떠나는 성지순례[4] 리에띠(폰테콜롬보,그렉치오...) (0) | 2005.10.09 |
사진으로 떠나는 성지순례[3] 첼레,라베르나,몬테까살레 (0) | 2005.10.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