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1호 교체' 논란 다시 일어나
일제 때 잘못 지정…… 감사원 지적
현 국가지정문화재인 국보 제1호를 숭례문에서 비중 있는 다른 문화재로 바꾸는 것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감사원이 11월 7일 문화재 지정 및 관리실태에 대한 감사에 착수 하면서 국보 제1호를 재지정할 것을 문화재청에 권고한데 이어 8일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교체 검토를 공식화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느닷없이 교체 문제를 끄집어 낸 정부의 태도가 문제라는 지적과 함께 교체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숭례문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 조선총독부가 '조선 중요문화재 보존령'을 내리면서 보물 제1호로 지정됐으며, 이어 1955년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 전신)이 일제강점기 때 지정된 보물을 국보 및 보물로 지정하면서 숭례문을 국보 제1호로 지정했다. 그러나 이 같은 문화재 지정이 일제가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지정한 번호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지난 1996년에는 현재의 국보1호를 교체해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돼 관계 전문가 등의 여론조사를 거쳐 문화재위원회 심의까지 올라갔지만 부결된 바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국보 1호·2호 등은 등급이 아닌 관리번호인데 국민들이 인식하기에 문화재에 대한 등급처럼 여겨지고 있다"며 "예전부터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어 왔으며, 국보1호 만이라도 재지정 하자는 논의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감사원은 지난 7일부터 문화재청 등 8개 기관에 대해 문화재 지정 및 관리실태에 대한 현장 감사에 들어갔으며 오는 25일까지 감사를 진행한다.
감사원은 이번 감사를 통해 국가지정 문화재 지정체계, 조선왕조 옥새 등 중요문화재 관리, 문화재 보호관리 체계상의 문제점과 아울러 개선안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훈민정음' 85% 압도적 1위…팔만대장경 2위
지난 96년 국보1호 교체 논란이 있었던 당시 설문조사 결과 문화재전문가들의 경우 6대4 정도의 비율로 반대의견이 많았으며 일반시민들도 67.6%가 반대했지만 최근 네티즌들은 국보1호 재지정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최근 과거사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가 화두가 되며 일제가 지정한 현재의 국보1호를 변경해야 한다는 의견이 커지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국보 변경추진과 관련한 보도가 나간 후 포털 네이버가 국보1호 변경에 대한 의견을 묻는 조사를 실시한 결과, 8일 오후 3시 현재 1690명이 설문에 응했으며, 이중 국보1호 변경 찬성 의견이 1316명 77.9%로 반대 의견을 보인 338명 20%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한편 네티즌들은 국보1호를 변경한다면 무엇을 국보1호로 했으면 좋겠냐는 설문에는 훈민정음을 가장 많이 꼽았다.
한국 경성 남대문 글씨가 선명한 옛 숭례문
◇◆ 남대문은 국보1호 자격이 없기 때문인가?
남대문은 조선왕조 개국과 더불어 서울 성곽의 4대문 중에서도 제일 큰 정문으로 당시 조선건축의 총화 격이다. 하지만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 고적 제1호로 지정되면서 식민잔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정부가 1960년대 초반 문화재보호법을 제정.시행하게 되면서 일제의 조선 고적 지정제도를 고스란히 편입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국보제도를 변경하고 제1호의 경우 상징성이 큰 만큼 교체해야 한다는 의견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1996년 남대문을 훈민정음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의견이 불거져 문화재위원회 심의에까지 올라갔다. 비록 부결되긴 했지만 남대문은 훈민정음, 석굴암, 8만대장경 등 다른 문화재에 비해 늘 초라한 대접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 국보1호의 자격이 없다는 시각은 지나친 단순논리이며 국보의 번호는 서열이 아니라 지정 순서일 뿐이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남대문은 우리 근현대사를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보1호로서 손색이 없다는 지적이다.
◇◆ 훈민정음으로 국보1호를 바꿔야 하는가
국보 제1호의 유력한 후보로는 훈민정음이 꼽힌다. 우리 민족의 얼과 정신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훈민정음의 가치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창제 과정과 원리가 기록으로 명확히 남아 있는 세계 유일의 표기수단이라는 점에서 점수가 높다.
하지만 훈민정음 실물은 오직 1점만 남아 있는데, 바로 국보 제70호인 간송미술관 소장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소장자가 국가가 아닌 사립박물관이라는 점에서 국민은 물론 학계의 접근 기회가 적은 데다 소장 과정이 명쾌하지 않은 점이 걸림돌이다. 또 한글이 무형의 문화유산인 데다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는 마당에 굳이 국보1호로 지정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국보1호를 바꾸게 되면 교과서는 물론이고 각종 관련 서적, 해외 홍보물, 관련 영상물, 백과사전 등을 모두 새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엄청나다. 또 문화재적 가치를 기준으로 국보1호를 바꿀 경우 앞으로 좀더 중요한 문화재가 나타난다면 국보1호를 다시 바꾸어야 한다는 논리가 적용돼 혼란을 부추길 가능성이 크다.
◇◆ 국보 교체의 주체는 어디인가
감사원이 문화재 관리실태를 지적하고 관계기관에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것은 마땅히 옳은 일이다. 하지만 일제 잔재청산이라는 명목으로 문화재의 가치평가 업무와 관련 없는 감사원이 국보 제1호의 변경을 문화재청에 권고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특히 학계의 의견조차 수렴하지 않은 상태에서 발표함으로써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지난 5월 27일 일반에 개방된 숭례문
국보1호 숭례문 그 영광과 비애
국보1호. 지정번호가 문화재 가치 등급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국보1호는 분명 영광된 자리다. 2005년 11월8일 현재 대한민국 국보는 모두 307건이 지정돼 있다. 남대문을 필두로 2005년 9월28일 308호로 등재된 전남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들이 '국보'라는 이름 아래 행렬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국보 1호 숭례문(崇禮門), 즉 남대문은 영광을 누리기보다는 '1호 박탈'이라는 위협에 줄곧 시달려왔다. 그 주된 이유는 대한민국 국보1호라는 격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잇따라 터지는 국보1호 교체 논란과 관련, 수차례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남대문은 상위권에 들지 못했다. 이런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수위는 늘 훈민정음이었고, 경주 석굴암과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그 뒤를 바짝 추격하는 양상을 보여 왔다.
사실 이들 문화유산에 비해 적어도 '덩치'에서는 밀릴 것이 없었지만 남대문은 초라한 대접을 받기 일쑤였다. '나이' 순으로 보면 훈민정음과 거의 동시대이긴 하지만, 이미 1천200살이 지난 석굴암은 물론이고 700살을 훨씬 넘긴 팔만대장경에 비해서도 '애송이'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남대문에는 일제 식민잔재라는 그림자가 늘 어른거리고 있다.
이런 '어두운 과거'는 마치 남대문 자체가 지금은 없애버려야 할 '식민잔재'로 오인 받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남대문은 조선왕조 개창과 더불어 서울성곽의 4대문 중에서도 당당한 대문(大門)이요 정문(正門)이었고, 당시 조선건축술의 총화임에 틀림 없음에도 그 자체가 마치 식민잔재인양 치부되기도 했다.
숭례문은 국보1호라는 명성을 얻음으로써 큰 상처를 입으면서도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나 훈민정음이나 석굴암, 팔만대장경에 비해 뒤질 것 없는 남대문이지만 국보1호를 교체해야 한다는 논란이 다시 일기 시작했고 전반적인 사회 흐름으로 보아 이번에는 국보1호 자리를 지키기 힘들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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