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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감상실]/관현악곡 100선

관현악곡 100선 [43] 차이코프스키 / 슬라브 행진곡

by 세포네 2023. 8. 5.

  

     Marche Slave Op.31
         차이콥스키 ‘슬라브 행진곡’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승리를 향한 장엄한 행진곡

곡의 구성은 장대한 종결부가 딸린 3부 형식으로 볼 수 있다. 제1부는 ‘모데라토 인 모도 디 마르차 푸네브레’(장송곡풍의 보통 빠르기로)의 처연한 행진곡으로 시작된다. 여기에 흐르는 b♭단조의 무거운 선율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으로, 세르비아의 민요 ‘오 빛나는 태양이여, 그대의 빛은 불공평하단 말인가?’에서 유래했다. 이 의미심장한 선율이 관현악 편성을 달리하여 되풀이되며 격렬한 첫 번째 클라이맥스를 구축한다. 제2부에서는 관악기들의 스타카토로 장조의 새로운 선율이 등장한다. 희망을 상징하는 이 밝고 경쾌한 선율 역시 세르비아 민요에 기초한 것이다. 빠른 전개 속에서 다시금 긴장이 고조되며 연결 악구로 넘어가면 저현부에서 귀에 익은 선율이 들려온다. 훗날 <1812년 서곡>에서도 사용된 이 선율은 제정 러시아의 국가인 ‘신께서 차르를 구원하신다’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 부분은 위기에 처한 세르비아를 구출하겠다는 러시아인들의 결의를 나타내는 듯하다.
열기를 더해가며 제3부로 넘어가면 제1부의 선율이 다시 등장한다. 이제 음악은 긴박감을 고조시키며 더욱 격렬한 투쟁을 펼쳐 보이고, 마침내 두 번째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그 배후에서 타악기와 관악기로 울려 퍼지는 리듬은 베토벤의 ‘운명적 리듬’을 연상시킨다. 어두운 분위기가 지배적인 제1부, 밝은 서광이 비치는 듯한 제2부,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제3부를 차례로 통과하고 나면, 종결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시작된다. 템포가 알레그로 피우 모소(조금 더 빠르게)로 변경된 가운데 팀파니의 타격음이 울려 퍼지면, 클라리넷이 이끄는 목관 파트와 트럼펫이 이끄는 금관 파트가 러시아 민요에서 취한 경쾌한 가락을 릴레이식으로 연주한다. 그리고 이어서 트롬본과 튜바가 ‘신께서 차르를 구원하신다’ 선율을 강력하게 부각시킨다. 이후 음악은 극도로 열광적인 분위기로 치달아 현란하고 떠들썩한 패시지가 숨 가쁘게 이어지다가 장엄하게 마무리된다.

평소 정치적 사안에는 둔감한 차이콥스키였지만, 이번에는 ‘슬라브 민족주의’라는 대의명분과 발칸 반도에서 들려오는 긴박한 소식들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루빈스타인의 제의를 받아들인 그는 세르비아의 민요 선율과 러시아의 국가를 활용하여 불과 며칠 동안 전곡을 완성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은 1876년 11월, 모스크바에서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지휘로 초연되어 청중들로부터 ‘진정한 조국애에 불타는 흥분의 폭풍우’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이 곡의 제목은 ‘러시아-세르비아 행진곡’이었지만, 악보가 출판될 때 프랑스어로 ‘Marche Slave’(슬라브 행진곡)이라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슬라브 행진곡>은 차이콥스키의 가장 인기 있는 관현악곡 중 하나이다. 그 원동력은 작곡 당시를 전후하여 <피아노 협주곡 1번>, <백조의 호수>, <로코코 풍 주제에 의한 변주곡>, <교향곡 4번>,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등 걸작들을 줄줄이 내놓던 차이콥스키의 한껏 고양된 창작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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