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제가 소신학교에 가 있는 관계로 오랜만에 만난 저의 고향친구가
오늘 우리가 들은 코린토 서간의 사랑찬가를 줄줄이 외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너무 기쁜 나머지 '너 세례 받았니?'라고 물으니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이 내용이 너무도 좋아서 자기가 외우고 있노라는 거였습니다.
이토록 신자가 아닌 사람까지도 좋아하고 저 역시 좋아하는 말씀인데도
저를 돌아보니 이 말씀을 제가 직면하기보다 피해왔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왜 그랬을까 성찰해보니 거울이 우리 모습을 그대로 비추듯
이 사랑의 찬가가 저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워 피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전히 두렵지만 저의 사랑의 역사를
오늘 서간의 말씀에 비추어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옛날에 저는 사춘기 때 잠깐 이성에 대한 사랑을 동경한 적이 있지만
그때 이후로 보편적인 이웃 사랑 그러니까 모두를 사랑하겠다는 열정이 컸고
그래서 저는 일찌감치 결혼을 포기하고 수도 생활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일 겁니다. 제 사랑 역사의 시작은 저의 이 사랑의 열정만 믿고
마구 사랑한 시기, 더 심하게 얘기하면 사랑의 횡포를 부렸던 시기였지요.
그런데 사랑의 횡포라니요? 사랑에도 횡포가 있습니까?
예, 그것은 제가 사랑을 한다고 생각하고, 분명 사랑도 했지만
저의 사랑이 상대에게도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그런데도
사랑했는데 왜 사랑이 사랑으로 받아 들여지지 않느냐고 하며
사랑이 받아 들여질 때까지 참지 못하고 성을 내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저의 경우,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저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교만 때문에 저의 사랑에 대한 성찰을 겸허하게 하지 않았고,
겸허하지 않았기에 참을 수 없었고 성을 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어떻게 얘기합니까?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은 제가 수련 들어가기 전,
프란치스칸 이상대로 살고 싶은 열망이 너무도 커서
기회만 되면 우리의 가난이랄까 형제애를 부르짖곤 했는데
언제부턴지 사람들이 슬슬 저를 피하여 제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거였습니다.
너무 이상주의적인 제가 너무 이상주의적으로 우리의 이상을 부르짖으니,
그것도 저는 이상을 잘 실천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교만하게 얘기하니 그런 제가 싫거나 적어도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난 뒤 저는 아무 소리 않고 저만 열심히 이상을 실천하니
수련이 끝나갈 무렵에는 사람들이 제 옆에 모이기 시작하고 농담반진담반
수련을 제일 잘 받은 사람, 제일 많이 변한 사람은 저라고 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칭찬하는 것 같지만 실은 바뀌기 전의 제가
얼마나 형편없고 교만한 사람이었는지를 말하는 것이었지요.
교만은 죄의 뿌리라고 하는 칠죄종(七罪宗) 중에서도 제일 나쁜 죄이고,
수덕신학에서는 겸손이 모든 덕의 기초라고 하는 것을 감안할 때
교만은 모든 덕의 기초를 허무는 것이요, 이 교만을 없애지 않고는
어떤 덕도 지닐 수 없고 애덕도 마찬가지로 실천할 수 없게 하겠지요.
교만은 자기중심적이기에 근본적으로 사랑과 반대되고,
그래서 사랑을 할지라도 저처럼 그에게 사랑이 되는 사랑을 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사랑을 내식대로 마구 하고는 사랑을 했다고 할 것입니다.
어제는 나이든 성소자를 만났습니다.
아침에 우리 막내에게 나이든 성소자를 만날 거라고 했더니 출근을 하며
선입관 가지지 말고 만나라고 충고를 하는 거였고 저도 그러마 답했지요.
옛날같으면 우리 이상에 미치지 못하는 성소자를 가차없이 쳐냈겠지만
요즘은 제게 오는 사람들이 다 소중한데 제가 조금은 겸손해진 모양입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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