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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정원]/묵상글

두려움에서 나와 하느님 앞에 서기 위해

by 세포네 2020.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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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주제는 두려움에서 나와 하느님 앞에 섬입니다.

 

일본의 많은 청년이 오래전부터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하고,

우리의 젊은이들도 그 정도는 아니어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집 밖 세상으로 나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방 밖 가족들에게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갇혀 지내고 홀로 지내는데

누가 가둬서 갇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숨어서 갇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숨습니까? 

그것은 오늘 엘리야가 이제벨이

두려워 도망쳐 와 동굴에 숨듯이

사람들이 두렵고 심지어 가족까지 두려워 숨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와 제자들이 두려워한 것은

죽음을 마주하는 두려움인 데 비해

은둔형 외톨이들의 두려움은 그저 자기를 간섭하고 성가시게 하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니 객관적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어쨌거나 두려움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것이니 함부로 얘기할 수는 없지요.

 

그런데 두려움이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것이기에 해결책도 거기에 있습니다.

벌레처럼 하나도 무섭지 않은 것도 두려워하는 것처럼 마음먹기에 따라

생사를 쥐고 있는 권력자나 태풍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까짓것 할 있는 담대함을 얘기할 때마다 떠올리는 것이

바로 다윗과 사울의 얘기인데 사울은 어른이고 한 나라의 임금인데도

골리앗에 겁먹고 지레 지고 들어갔지만, 

다윗은 어린이인데도 골리앗을 전혀 두려워 않고, 

무기도 갑옷도 없이 오직 하느님과 함께 싸우러 나갔지요.

 

하느님으로 마음 든든했고, 하느님 때문에 아무 두려움이 없었던 겁니다.

'마음 든든', 그렇습니다. 이 '마음 든든'이 아무 두려움을 없게 하는 것이고,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여 두려움이 없고,

그래서 엘리야는 거짓 예언자 450명과 담대히 싸워서 이길 수 있었고,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오라는 말씀에 주님처럼 물 위를 걸어갈 수 있었는데

순간 하느님을 놓치자 이제벨이 두렵고 풍랑이 두려워져 두려움에 빠지고,

동시에 이제벨과 풍랑을 보자 두려움에 빠져 주님을 못 보게 된 것입니다.

 

순간 발을 헛디뎌 넘어지거나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것을 실족이라고 하는데

우리 눈도 순간 헛군데에 돌리는 바람에 실안하여 하느님을 못 보고,

그래서 풍랑에 빠지고, 두려움에 빠질 수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울수록 하느님 응시를 해야 하는데

이 응시가 두려울 때의 하느님 관상입니다.

 

응시란 목표물을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이요,

그러기 위해서 마음을 다잡고 정신집중하여 보는 것인데

우리는 순간 방심하여 다잡았던 마음이 풀어져

하느님은 놓치고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방심은 금물이라고 하는데

방심이 실수를 하게 하는 정도라면

실안이나 실족게 하는 방심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런데 방심치 않고 마음과 정신을 다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인데 믿음을 잃지 않고, 믿음을 지니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험과 두려움에 처할 때 하느님께 믿음 두는 것이 두려움에 빠지지 않고

하느님을 응시케 하는 데 있어서 방심치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공중 그네타기라는 서커스를 아십니까?

이 서커스를 할 때 남자는 잡아주고 여자가 그네를 타는데

공중에서 재주를 부리다 남자의 손을 잡을 때

남자를 믿지 못하여 여자가 남자의 손을 잡으려 해서는

손을 놓쳐 큰 사고가 나기에

여자는 남자가 잡아줄 것이라고 믿고 맡기는 것이 중요하답니다.

 

우리 인생의 위기를 만나 두려움에 떨 때도 

내가 어떻게 하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나를 잡아주실 거라고

굳게 믿어야 함을 배우는 오늘 복음입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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