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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정원]/묵상글

받아들임에 대하여

by 세포네 2020.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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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연중 제13주일의 주제는 명확합니다.

받아들임입니다.

 

1독서 열왕기에서는 수넴의 여자가 엘리사를 예언자로 받아들인 얘기이고,

복음의 주님도 여러 가지 받아들임에 대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이 받아들임에 대해 생각을 하면 옛날의 씁쓰레한 기억이 납니다.

일본을 처음 방문했을 때 저희 일행을 맞이한 형제가 친절하게

저희를 맞이하기는 하였지만 친밀하게 저희를 맞아들인다는 느낌,

저희를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친절과 친밀의 차이를 느꼈는데

친절하게 방을 안내하고, 식당, 성당, 세면실 등을 안내하는데

제가 공간적으로 수도원에 받아들여지기는 하였지만

그 형제의 마음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공간적인 허용이었지 인격적인 환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생활이나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공간적으로 한 공간에 있지만,

그러니까 형제자매를 같은 공간에 받아들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것은 제가 일본에서 인격적인 환영을 받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며

사랑의 받아들임이라 할 수 없겠지요.

 

우리는 자주 내 마음에 들지 않아 합니다.

이것은 남이 내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내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좁고 까탈스럽습니다.

 

그런데 남을 좁고 까탈스런 내 마음에 맞추라고 요구하는 것,

이것 지독한 자기중심이고 폭력이 아닙니까?

어찌 남에게 내 맘에 드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합니까?

 

우리가 남을 받아들이지 않는 또 다른 것은 다름입니다.

우리는 종종 같기를 요구하며 남의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내 맘에 드는 사람이기를 요구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폭력적입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우리가 자주 얘기하는데

내 맘에 들지 않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개성과 차이성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같기를 바라고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데 동일성과 일치성은

같은 인간이라는 면에서 그리고 같은 존엄성의 차원에서 요구되어야지

개성과 차이성을 부정하는 차원에서 요구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임을 유념해야 하는데

우리가 신앙인으로 더 높은 차원에서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를 있는 그대로 그리고 그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신 사람 또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관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관상을 얘기할 때 하느님 관상만을 얘기하고,

하느님 관상을 위하여 형제들을 하느님 관상의 걸림돌로 배제하곤 합니다.

 

그런데 모든 선을 통해서 모든 선이신 하느님을 관상한 프란치스코,

바위를 보고 나의 성채 나의 바위이신 하느님을 관상한 프란치스코,

구더기를 보고 구더기 취급을 받으신 주님을 관상한 프란치스코,

그 프란치스코의 제자들이라면 하느님의 선들을 배제한 관상은 불가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받아들임은 이런 관상의 결과입니다.

하느님을 관상치 못하는 사람은 형제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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