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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특집

[한국 천주교회사 특별 기획전] (3) 3막. 습속(習俗, 관습과 풍속)의 벽에 갇히다 - 박해와 순교

by 세포네 2017. 8. 6.

불태운 신주… 100년 박해의 서막을 알리다

천주교는 조선의 전통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천주교에서는 하느님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모시는 데 반해 유교에서는 임금과 부모를 하늘처럼 여겼다. 또한, 인간 존중과 평등을 추구하는 천주교 교리는 조선 사회의 근간이었던 신분제를 흔들며 구질서를 위협했다. 게다가 조선의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종종 천주교인을 탄압했다. 이 때문에 박해는 100년간 이어졌고 1만 명에 가까운 순교자가 발생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 조선 시대 사람들은 신주에 조상들의 혼령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해 예를 차렸다.


1. 진산사건 : 낡은 질서와의 충돌

당시 조선에서는 부모가 돌아가신 뒤 3년 동안 묘소 옆에 기거하며 매년 부모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치르는 것이 관례였다. 1791년 천주교인 윤지충(바오로, 1759~1791)이 교황청이 내린 제사 금지령에 따라 돌아가신 어머니의 신주를 불태우는 사건이 일어나자 지배세력은 이를 국가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윤지충은 참수됐고, 이 사건은 박해의 계기가 됐다.

2. 100년간의 박해

진산사건 이후 본격화된 가톨릭 신자에 대한 박해는 100년간이나 지속했다. 정조의 죽음 이후 실권을 잡은 정순왕후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천주교 박해령을 내렸다. 이후 전국의 천주교 신자가 색출되었으며 배교를 거부하면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됐다. 1801년을 시작으로 1839년, 1846년, 1866년 네 차례의 대박해가 일어났다. 이처럼 긴 박해와 순교 속에서도 신자들은 사랑으로 공동체를 이루어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신주(神主)

죽은 사람의 이름과 죽은 날짜를 적은 나무패를 ‘신주’라고 한다. 주로 밤나무를 깎아 만든다.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는 조상에 대한 도리를 중히 여겼다. 기일과 명절이 되면 상에 음식을 차리고 조상의 혼령이 깃들어 있다고 여기는 신주를 모셔 놓은 다음 그 앞에서 향을 피우고 절을 했다.

북경교구장 구베아(1751~1808) 주교는 클레멘스 11세 교황 칙서 ‘엑스 일라 디에’(Ex illa die, 1715)와 베네딕토 14세 교황 칙서 ‘엑스 쿠오 신굴라리’(Ex quo singulari, 1742)에 따라 조상 제사를 미신 행위로 규정하고 금지했다.

벽위편(闢衛編)

「벽위편」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천주교를 배척하는 내용의 여러 문헌과 상소, 박해 관련 자료 등을 모아 편찬한 책. ‘벽위’는 사학이나 이단을 물리치고 정학인 유학을 고수하며 드높인다는 ‘벽사위정’(闢邪衛正)을 줄인 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학이나 이단은 천주교를 가리킨다.

전시된 유물은 이기경(李基慶, 1756~1819)이 편찬한 「벽위편」을 토대로 그의 고손인 이만채(李晩采)가 보완을 거쳐 1931년에 완성한 상ㆍ하편(총 7권) 가운데 상편이다. 상편의 제2권에는 1785년 명례방에서 발생한 ‘을사추조적발사건’을 비롯해 여러 박해와 관련된 서한, 통문, 상소 등이 수록돼 있다. 특히 1785년 음력 3월에 이용서와 다른 이들이 서명한 통문은 천주교를 공격한 최초의 공적 문서이다.

「벽위편」은 천주교 비판서이지만 천주교를 배척하는 학자들의 견해를 비롯해 편집자의 설명과 의견 등이 수록돼 있어 당시 천주교에 대한 인식과 박해 사건의 경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 1839년에 반포된 「척사윤음」으로 유교의 가르침과 달리하는 천주교인을 국법으로 다스린다고 내용을 담고 있다.


척사윤음(斥邪綸音)

조선 조정이 1839년에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뒤 반포한 문서가 「척사윤음」이다. ‘윤음’은 조선 왕이 백성에게 교훈을 주고 타이르는 내용을 담아 반포한 문서를 말한다. “천주교 교리가 옳지 않아 그를 믿는 교도들을 엄하게 국법으로 다스렸으며, 사악한 천주학의 잘못된 부분을 분석하여 윤음을 내리니 잘 받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한문본 7장과 함께, 한글로 풀어쓴 언해본 9장이 수록돼 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윤음 반포의 배경과 취지를 밝히고, 이후 천주교의 논리를 하나하나 반박했다. 그리고 천주교인들이 유교 규범을 따르도록 회유하며 끝맺는다.

▲ 제주도 서공 향촌에서 천주교인을 베척하는 손도패.


손도패(損徒牌)

조선 후기 제주도 ‘서공’이라는 향촌에서 관리들이 천주교에 대한 대응책으로 제작한 것. ‘손도’는 지역 사회의 질서를 지키지 않는 이를 그 지역에서 쫓아낸다는 뜻이다. 나무로 제작된 손도패의 앞면에는 “천주교인들이 마을 신을 경배하지 않았으므로 천주교인들과의 접촉을 금하며 이를 어길 경우 마을에서 쫓아낸다”는 경고문이 실려 있다. 조선 후기 향촌 사회 내에서 어떻게 통제가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유물이다.

▲ 정하상이 재상 이지연에게 쓴 글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천주교 박해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있다. 정하상이 재상 이지연에게 쓴 글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천주교 박해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있다.


상재상서(上宰相書)

「상재상서」는 재상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뜻으로, 1831년 박해가 발생하자 정하상(바오로, 1795∼1839)이 작성해 두었다가 체포된 다음날 재상 이지연(李止淵, 1777∼1841)에게 전달한 글이다. 천주교 교리의 내용과 박해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신앙의 자유를 밝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상재상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먼저 올바른 것은 지키고 거짓된 것은 배척한다는 유교의 ‘벽이론’을 근거로 천주교 박해의 부당함을 주장한다. 다음으로 천주교 교리가 이치에 맞으며 올바르다는 점을 증명한다. 그러면서 “천주교가 서양 종교라고 해서 배척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베풀어 줄 것을 호소한다.

「상재상서」는 한문 전사본과 한글 필사본 등 여러 형태로 보급돼 두루 읽혔다. 특히 홍콩에서 고약망(Giovanni Timoleone Raimondi, 1827~1894) 주교가 한문 활자본(1887)으로 간행해 중국 천주교회 신자들을 위한 교리서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 영향이 주변국의 선교에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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