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정겹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집
1940년 설립… 6ㆍ25전쟁 직후엔 배급소 역할
14처ㆍ제대 등 엣것 최대한 살려 공소 증ㆍ개축
평균 연령 75살 39가구가 가족처럼 신앙생활
▲ 지난해 증ㆍ개축한 풍산공소 전경. 공소 외벽과 창문에는 야생화를 주로 그리는 중견화가 마진식 화백이 재능기부한 꽃 그림이 활짝 피어 있다. |
첫사랑과 1990년대 아련한 기억을 불러일으켜 많은 관객 마음을 사로잡은 영화 '건축학개론'에는 주인공 양서연의 제주도 집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대학교 1학년 때 만난 첫사랑 승민을 15년 만에 찾아가 건축가가 된 그에게 자신의 집을 새로 지어달라고 부탁한다. 승민은 서연을 위한 새집을 설계하지만, 주인공은 매번 "너무 낯설다"며 퇴짜를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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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산공소를 찾은 정혜원(가타리나)씨가 아들과 함께 공소에 들어서고 있다. |
지난해 11월 증ㆍ개축한 안동교구 송현동본당(주임 정철환 신부) 풍산공소는 영화 속 주인공의 집처럼 추억과 아름다움이 보기좋게 어우러진 명소다. 70여 년 긴 역사에 맞갖게 옛것을 살린 증ㆍ개축을 통해 공소를 찾는 다양한 연령층 방문객들에게 이야깃거리를 들려주는 듯한 모습이다.
70살 마룻바닥은 보조의자로
70살이 넘어 더는 쓰지 못하게 된 공소 마룻바닥은 공소 내 보조의자로 재탄생했다. 낡은 소나무 문틀은 권혁주(안동교구장) 주교가 친필로 교구 사목표어인 '기쁘고 떳떳하게'라고 써줌으로써 그럴싸한 서각 장식품이 돼 입구에서 신자들을 반긴다.
경당을 빙 둘러 설치한 14처는 원래 영덕 강구성당에 있던 것을 가져다 단 것이다. 제대와 감실도 인근 농은수련원에서 얻어왔다. 기존 것들을 최대한 살려 다시 지었기에 사연이 담긴 집기들로 가득하다. 수십 년 이상 신앙을 이어온 이곳 어르신들은 겉보기에는 완전히 새롭지만, 옛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공소에서 추억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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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혁주(안동교구장) 주교 친필 서각. |
건축비를 아낀 흔적도 곳곳에 보인다. 전에 쓰던 냉난방기도 바꾸지 않았고, 창문에는 유리화 같은 값비싼 장식도 없다. 하지만 씀바귀와 앵초, 금낭화, 정동싸리 같은 우리 야생화가 한 송이씩 그려진 흰색 한지를 창문에 발라 은은하고 소박한 분위기를 낸다. 건축도 건설업체에 전부 맡기는 대신 신자들이 어깨 짐을 져가며 손수 지었다.
그렇다고 아름다움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자칫 심심할 수도 있었던 공소 벽면에는 야생화를 주로 그리는 중견화가 마진식(49) 화백의 꽃 그림이 있다. 공소 창문마다 피어난 꽃 그림과 제대 앞에 있는 꽃 그림도 그의 작품이다. 마 화백은 그림값도 받지 않았다.
공소 창문에는 야생화 '활짝'
원래 공소를 다시 지을 계획은 없었다. 4년 전 부임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수녀회 수녀들을 위한 수녀원만 신축하려 했으나, 낡아서 사용하는 데 문제가 있던 공소도 함께 공사하게 됐다. 덕분에 66㎡(20평) 남짓했던 공소가 99㎡(30평)로 넓어졌다.
풍산공소 증ㆍ개축은 안동대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전임 정도영(풍양농촌선교본당 주임) 신부가 공소 형편에 맞게 소박하게 짓기로 계획한 덕분에 큰돈이 들지 않았다. 수녀원 건물 신축과 공소 증ㆍ개축에 든 비용은 1억 4000만 원이지만 교구에서 절반을 지원해 신자들 부담도 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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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산공소 내부. 십자가의 길 14처는 영덕 강구성당에서, 제대와 감실은 농은수련원에서 얻어왔다. |
신자들은 공소와 수녀원을 짓기 위해 임대한 밭에 배추 농사를 지어 인근 도시 성당에 내다 팔았다. 뜨개질에 소질이 있는 할머니들은 밤을 새워가면서 친환경 수세미를 떴다. 일부 신자들이 십시일반 모은 건축기금과 정도영 신부 동기 사제들 성금 등이 모여 빚 없이도 공소와 수녀원을 지을 수 있었다. 평균 연령 75살에 39가구가 전부인 공소 신자들이 공사 시작 몇 달 만에 두 건물을 뚝딱 지은 것이다.
풍산공소는 일제 강점기인 1940년 문경에 거주하던 신자 3가구가 풍산으로 이사 오면서 설립됐다. 6ㆍ25전쟁 직후 공소가 마을 사람들에게 밀가루 등을 나눠주는 배급소로 쓰이며 크게 성장했다. 그러다가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고 젊은이들이 대거 농촌을 떠나면서 지금처럼 농촌 공소로 남게 됐다.
하회마을ㆍ우곡성지 가까워
풍산읍 주민 수는 7800여 명이지만 불교 등 타 종교 영향력이 강해 복음화율은 3.8%에 그친다. 하지만 최덕근(스테파노) 선교사에 이어 최근 수녀들이 부임해 감자를 캐고 고추를 따는 등 농촌 일손을 도와주면서 조금씩 활기를 띠고 있다. 2009년부터는 미사와 공소예절 시간 전후로 승합차도 운행한다.
김경회(즈카르야, 70) 공소회장은 "풍산공소는 작지만 아름답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정겨운 하느님 집"이라며 "공소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안동 하회마을이 있고, 멀지 않은 곳에 안동옥터와 우곡성지 등이 있어 함께 방문하기 좋다"며 근처를 지나가는 기회가 있으면 꼭 한 번 들를 것을 권했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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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회(오른쪽) 공소회장과 신자 박기혁씨가 수녀들과 점심을 먹다 함께 웃음을 터트리고 있다. |
▨ 풍산공소 정보
▶주소 : 경북 안동시 풍산읍 풍산중앙길 96-1(안교리 956)
▶연락처 : 010-2778-5548(공소회장), 070-8131-4211(수녀원)
▶주일미사 : 첫째ㆍ셋째 주일 오후 2시
▶공소예절 : 둘째ㆍ넷째 주일 오후 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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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창숙 수녀가 수녀원 앞에서 고추와 나물을 말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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