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시대에 전하는 티없으신 성모성심 위로
▲ 포르투갈 파티마 성모성지에서는 5월 성모성월이 되면 성모 발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사진은 순례자들이 성지에서 파티마 성모상을 앞세우고 행렬하는 장면. |
"파티마 셋째 비밀이 담긴 봉투를 열어볼 때가 된 것 같소."
1981년 5월 13일 성베드로 광장에서 총격을 받고 병원에 실려가 대수술을 받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몸이 회복되자 비서에게 파티마 셋째 비밀 봉투를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성모 마리아가 파티마에 처음 발현한 날과 자신이 총격을 받은 날이 공교롭게 똑같은 5월 13일이었기 때문이다. 교황은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 셋째 비밀이 '흰옷 입은 주교(교황)'의 환난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대략 알고 있었다.
#성모 옆에서 천사가 불칼을 들고
교황은 문서고에서 꺼내온 봉투를 열었다. 성모 발현을 목격한 어린 목동 세 명 가운데 한 명인 루치아(훗날 수녀가 됨)가 자신이 본 환시(幻視) 내용을 1944년에 서술한 용지가 들어 있었다. 교황은 그 글을 읽고나서 즉시 이 세상을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봉헌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봉헌 기도문을 직접 만들어 6월 7일 발표했다.
이어 교황은 2000년 파티마를 방문한 자리에서 "셋째 비밀을 곧 공개하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이를 둘러싸고 온갖 추측이 난무했던 터라 교회 밖에서도 교황 발언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동안 세간의 궁금증이 증폭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교황 요한 23세의 경우 1959년 바티칸 관리들이 그 봉투를 내밀자 "기다립시다. 기도하겠습니다"라며 문서고로 되돌려 보낸 데 이어, 교황 바오로 6세는 내용을 읽고나서 '비공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교황 지시에 따라 2000년 6월 26일 셋째 비밀이 담긴 루치아 수녀의 자술서 원문을 공개했다. 성모 마리아가 어린 목동들에게 보여준 세 번째 환시는 20세기 순교자들의 교회에 관한 것이었다. 분위기는 다분히 묵시록적이다.
▲ 성모 발현을 목격한 루치아(왼쪽부터), 프란치스코, 히야친타. 루치아는 가르멜수녀회에 입회해 수도생활을 하다 2005년 97살을 일기로 선종했다.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는 1919년, 1920년 이른 나이에 각각 세상을 떠났다. |
"저희는 성모님 왼편 조금 위쪽에서 불칼을 든 천사를 보았습니다. 번득이는 불칼은 이 세상을 불태울 것처럼 불꽃을 내뿜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 오른손으로 천사를 향해 광채를 방출하시자 그 불꽃은 사그라졌습니다. 천사는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참회하라. 참회하라. 참회하라!'(…)
흰옷 입은 주교님을 보았습니다. 또 가파른 산을 오르시는 다른 주교님들과 신부님들, 수도자들을 보았는데, 산꼭대기에는 껍데기만 남은 코르크나무처럼 투박한 몸통의 큰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교황님은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몸을 떠시며 (…) 그 큰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으신 채, 그분을 겨냥하여 총과 활을 쏘는 한 무리의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두 천사가 수정 성수반을 들고 순교자들의 피를 받아 그것을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혼들에게 뿌렸습니다."
# 박해와 수난의 20세기 교회
이날 신앙교리성 장관 라칭거 추기경(현 교황 베네딕토 16세)은 "이 비밀은 온갖 추측에 비하면 실망스럽거나 의외라고 생각되겠지만,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지난 20세기 순교자들 교회를 보게 된다"며 신학적 해설을 덧붙였다.
"참회하라는 외침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복음서 시작 부분을 생각하게 한다. 천사가 든 불칼은 섬뜩하게 다가오는 심판의 위협을 나타낸다. 오늘날 이 세상이 불바다가 되어 잿더미로 변할 수 있다는 전망은 이제 더 이상 환상이 아닌 것 같다. 인간 자신이 발명을 통해 불칼(핵무기 등)을 만들어 냈다. 그러므로 이 환시는 파괴력에 맞서는 힘, 곧 성모님 광채와 어떤 면에서는 이 광채에서 나오는 참회의 요청을 보여준다.
또 흰옷 입은 주교가 죽은 이들 시신 사이로 걸어가는 것은 십자가의 길, 폭력과 파괴와 박해시대를 거치는 교회 여정으로 묘사된다. 우리는 지난 세기를 교회 수난과 박해, 두 차례 세계대전, 잔악 행위들이 저질러진 지역분쟁의 세기로 인식할 수 있다. (교황 수난과 관련해) 5월 13일 총격으로 거의 돌아가실 뻔했던 교황님은 '총탄이 비켜가게 하신 것은 성모님 손길이었고, 나는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도 죽음의 문턱에서 멈춰 섰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1년 5월 13일 성베드로 광장에서 총격을 받고 쓰러지는 순간. |
실제로 교황은 피격 당시 총알이 동맥을 몇 밀리미터(mm) 비켜나간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또 이탈리아 의회 미트로킨조사위원회는 2006년 "저격사건은 동유럽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교황에게 불만을 품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 지시에 따라 옛 동독과 불가리아 정보기관이 공작을 벌인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러시아는 아직까지 이에 대해 아무런 논평도 내놓지 않고 있다.
또한 1990년대말 동유럽 공산주의 붕괴의 발단은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폴란드 방문과 '솔리데리티'(레흐 바웬사가 이끈 자유노조)였다는 게 정설이다. 이 때문에 소련 공산당의 최대 실수는 교황이 폴란드에 발을 들여놓도록 허락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 인간 미래는 하느님 안에 있다
라칭거 추기경은 환시 끝에 등장하는 순교자들의 피와 관련해 "순교자들은 수난에 동참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콜로 1,24 참조)"이라고 해석했다. 이어 "셋째 비밀의 또 다른 핵심은 '나의 티없이 깨끗한 성심이 승리할 것'이라는 유명한 표현"이라며 "파티마 메시지는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는 약속의 말씀을 믿으라고 권유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신앙교리성 차관 베르토네 대주교는 파티마 메시지에 대해 이런 해석을 내놨다.
"파티마는 오늘날의 발현 가운데 가장 예언적인 것이다. 첫째와 둘째 비밀은 무시무시한 지옥 모습,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 제2차 세계대전, 러시아 공산주의가 인류에게 입힐 막대한 피해에 대한 예언 등을 담고 있다. 1917년에는 어느 누구도 이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베르토네 대주교는 "셋째 비밀 공개는 성모님 보살핌을 충만히 받았던 역사의 한 시대를 종결짓는 것"이라며 "파티마 성모님은 인간 미래는 하느님 안에 있고, 우리는 그러한 미래를 창조하는 일에서 책임 있는 협력자임을 상기시킨다"고 말했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
# 파티마 성모발현 성지
파티마는 포르투갈 중부 산타렘 주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성모 마리아는 1917년 5월 13일 어린 목동 루치아ㆍ히야친타ㆍ프란치스코 3명에게 발현, 세계 평화와 죄인들 회개를 위해 기도와 희생(보속)을 하고 티없는 성모 성심에게 자신을 봉헌하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10월 13일까지 총 여섯 번에 걸쳐 발현했는데, 매 발현 때마다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당부했다. 셋째 비밀 환시는 세 번째 발현(7월 13일) 때 나타났다.
9월 13일 다섯 번째 발현 때부터 순례자들이 몰려들어 지금은 세계적 성모성지가 됐다. 한국 순례자들은 파티마를 순례할 때 보통 벨기에 바뇌와 프랑스 루르드 성모성지를 묶어 다녀온다.
파티마 성모상 왕관에 총탄 하나가 박혀 있는데, 이는 1981년 교황 피습 당시 범인이 발사한 총탄 가운데 지프에 꽂힌 것이다.
▲ 1981년 교황 총격 당시 범인 아그차가 발사한 총탄 가운데 지프에 꽂힌 것을 빼서 박아 넣은 성모상 왕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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