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예루살렘 사도회의(49년)에서 바오로는 예루살렘 모교회의 신자들을 위해서 이방계 신자들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펴기로 약속했는데(갈라2, 10), 코린토에서 로마서를 쓰면서(57년) 모금운동이 마감되어 예루살렘에 모금된 헌금을 전하러 가려는 그의 계획을 밝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모금운동은 그의 선교활동 내내 이루어졌다 하겠다.
“그러나 지금은 예루살렘으로 성도들에게 봉사하러 떠납니다.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신자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들의 것을 나누어 주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을 지고 있어서 그렇게 결정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영적 은혜를 나누어 받았으면, 그들은 물질적인 것으로 성도들을 돌볼 의무가 있습니다.”(로마15, 25~27)
사도 바오로가 모금운동을 벌인 목적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신자들을 돕기 위해서였지만(2코린 8, 14;9, 12), 이방인 신자들의 모금은 자신들에게 그리스도 신앙을 전해준 예루살렘 신자들의 영적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기도 했다.(로마15, 27)
즉, 이방인 신자들은 예루살렘 신자들로부터 영적인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마땅히 물질적인 것으로 보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모금을 지시하면서 헌금의 성격과 자세 그리고 이유를 밝힌다.
헌금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그렇게까지 기대하지는 않았는데도, 먼저 주님께 자신을 바치고, 또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도 자신을 바쳤습니다.”(8, 5)
이 말씀은 마케도니아의 여러 교회들이 환난의 큰 시련 속에서도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신자들을 위해서 후한 인심을 베풀었을 때 바오로가 하신 말씀이다. 즉, 시련 속에서도 헌금을 한 마케도니아 신자들의 행위야말로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희생이요 헌신이라는 것이다.
또한 헌금은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를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행위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8, 9)
헌금의 성격을 언급한 후 바오로는 신자들에게 헌금을 할 때 가져야 할 자세를 이야기 한다.
첫째, 강제에 의해서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오직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바치라는 것이다.
“이제 그 일을 마무리 지으십시오. 자발적 열의에 어울리게 여러분의 형편에 따라 그 일을 마무리 지으십시오.”(8, 11)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9, 7)
둘째, 형편에 맞게 바치라는 것이다.
“열의만 있으면 형편에 맞게 바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8, 12)
바오로는 헌금의 자세를 언급한 후 8장 13~15절에서 헌금을 하는 이유를 밝힌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은 편안하게 하면서 여러분을 괴롭히자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이루게 하자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어 나중에는 그들의 풍요가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준다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8, 13~15)
바오로가 세운 이방계 교회들은 예루살렘 모교회에 비해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이었다. 바오로는 상대적으로 넉넉한 코린토 교회가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모금을 해야 하는 이유는 두 교회 사이에 균형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라 한다.
또한 코린토 신자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신자들을 위해서 헌금한다면, 예루살렘 신자들은 하느님께 넘치도록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을 찬양하고 헌금한 코린토 신자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함으로써 신자들 사이에 친교가 더욱 깊어진다는 것이다.
유충희 신부〈원주교구 백운본당 주임〉
[교회와 영성]/바오로서간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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