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성월 특집-갈매못 성지 탐방 "
"…보배로운 피로써 구속받은 당신 종들, 저희를 구하시기 비옵나니, 저희도 성인들과 함께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2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 순교성지 승리의 성모성당. 성지순례를 온 전주교구 대야본당과 서울대교구 잠원동본당 신자들이 함께 부르는 사은찬미가(謝恩讚美歌)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 성지와 맞닿은 서해 바다만큼이나 아름다운 화음이요, 평화로운 모습이다.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3월, 한양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지인 이곳 갈매못까지 100여 ㎞를 걸어온 이들이 있었다. 다블뤼(조선교구 제 5대 교구장) 주교와 오메트르ㆍ위앵(이상 파리외방전교회) 신부, 황석두(루카)ㆍ장주기(요셉) 회장. 모진 고문에 만신창이가 됐지만 그들은 기쁨이 넘쳤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다는 것은 둘도 없는 영광이었다. 끌려내려오는 엿새 동안 그들은 쉼없이 기도를 바쳤다.
"…보배로운 피로써 구속받은 당신 종들, 저희를 구하시기 비옵나니, 저희도 성인들과 함께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142년 후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좇아 갈매못을 찾은 대야ㆍ잠원동본당 신자들이 성당에서 부른 그 노래,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찬미하는 사은찬미가를 그들은 목청껏 외치며 하느님을 찾았던 것이다. 상황이 아무리 바뀌어도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데는 그 옛날 순교자들이나 지금의 우리나 다름이 없음이다.
3월 29일 갈매못 처형지에 도착한 그들은 처형 날짜를 며칠 미룬다는 말을 듣고는 바로 다음날 처형해줄 것을 간청했다. 다음날 30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힌 성 금요일이었다. 그들은 죽음을 앞당기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기를 원했다.
그들 소원은 이뤄졌다. 이튿날 5명은 모두 목이 잘렸고, 잘려나간 목은 장대 위에 매달렸다. 군문효수형이었다. 기록에 나오는 다블뤼 주교 순교 장면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망나니가 휘두른 칼에 다블뤼 주교 목이 단번에 떨어지질 않았다. 목에 칼을 맞았는데 숨이 붙어 있다고 생각을 해보라.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망나니의 돈 욕심 때문이었다. 돈을 더 쥐어준 뒤에야 다블뤼 주교의 처절한 몸부림은 끝날 수 있었다. 그가 순교한 뒤 나머지 네 명이 뒤를 이었다. 다블뤼 주교만큼 고통스럽게 순교하지는 않았다는 기록이다.
당시 조선 수군의 훈련장인 갈매못이 처형지로 선택된 것은 갈매못이 1846년 프랑스 군함이 침입했던 외연도와 아주 가깝다는 이유에서였다. 서양 오랑캐들이 다시는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순교 현장을 새롭게 발굴하고 성지 개발의 첫삽을 뜬 이는 정규량(1883~1953년) 신부다. 1925년 이곳을 찾은 정 신부는 생존해있는 순교 목격자들 증언을 토대로 순교터를 찾았다. '대충 이 근처려니'가 아니라 순교한 바로 그 터를 알아낸 것이다. 순교한 지 60년이 지난 후였다. 정 신부는 이듬해 이 땅을 구입했고, 이 땅 위에 지금의 갈매못성지가 들어섰다. 5명의 순교자들은 1984년 서울에서 열린 103위 성인 시성식에서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아는 만큼 보게 되고 보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고 했다. 성지에 깃든 순교자들의 넋을 느끼지 못한다면 대부분 성지는 잘 가꿔진 공원에 불과할 뿐이다.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천지차이다. 공원에 소풍가는 것이 아니라면 성지로 출발하기에 앞서 성지에 대해 미리 공부하는 것은 필수라는 생각에 갈매못성지 역사 공부가 좀 길었다. 참고로 갈매못은 '갈매기 연못'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어느 정도 이해를 갖췄다면 갈매못 성지를 구석구석 둘러볼 차례다. 사실 갈매못성지는 작다. 성지 누리방(www.galmaemot.kr)에 있는 전경 사진은 굉장히 넓게 나온 것이다. 한바퀴 그냥 돌아볼 요량이면 5분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너른 잔디밭을 빙 둘러 십자가의 길 14처와 예수성심상, 순교성인비, 야외제대, 기념관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잔디밭 뒤편 산기슭에 승리의 성모 성당이 따로 있기는 하다.
지리적으로 볼 때 갈매못성지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바다를 접하고 있다는 점일 게다. 맑고 푸른 서해 바다를 마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절로 평화로워지는 느낌이다. 한마디로 가슴이 탁 트인다. 살랑거리는 바닷바람은 또 얼마나 달콤한지….
주차장을 지나 바다와 접한 왼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자면 십자가의 길과 두 팔 벌려 순례객을 반기는 예수상을 지나 순교복자비,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순교성인비를 만난다. 5명의 성인들이 순교한 그 자리다. 별 생각 없이 바라보면 그냥 비석 두 개일 뿐이다. 순교자들이 처형 당하고, 잘린 목이 걸린 장대 5개가 서 있었다는 것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세상도 바뀌어서 순교는 남의 이야기, 옛날 이야기가 된지 오래다. 목 잘리는 순교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각오로 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솔직히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느님 은총과 성인들 전구를 구할 뿐이다.
순교비 맞은 편에 있는 기념관은 예전 성당을 고쳐서 지난 3월 문을 열었다. 기념관에는 베르뇌(제 4대 조선교구장)ㆍ다블뤼 주교 유해, 다블뤼 주교가 집필한 책들, 오메트르 신부가 사용한 제병기와 회중시계를 비롯해 순교 당시를 그림으로 생생하게 재현한 순교화 등이 전시돼 있다.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1841년 다블뤼 주교가 프랑스에서 사제품을 받을 당시 입었던 중백의로, 2004년 다블뤼 주교 출신 교구 신자들이 갈매못성지에 기증한 것이다. 다블뤼 주교 체취가 온전히 배어있는 유품이다. 30여 석 경당을 겸한 기념관은 유물을 관람한 뒤 조용히 앉아 성인들 삶을 묵상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기도 공간이기도 하다.
산기슭에 있는 승리의 성모성당으로 가는 길은 호젓한 소나무 숲길이다. 숲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짧은 길이지만 나무 계단을 한걸음 한걸음 오르노라면 소나무 숲속으로 들어온 기분이 든다. 조개 외형을 본따 지은 이 성당은 한마디로 세련미가 넘친다. 구석구석 어디를 봐도 성미술의 조화가 아름답다. 성당 뒷쪽은 비행기 격납고 식이다. 닫혀 있다가 필요할 때는 완전히 열리도록 설계됐다. 뒷문을 완전히 열면 야외 돌계단으로 연결된다. 성당 밖에서도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가능하다. 참 신기했다. 서해 바다의 멋진 풍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장소가 또한 승리의 성모성당이다.
성당 오른편에 있는 성인유해공경실을 빼놓아서는 안되겠다. 이곳에서 순교한 다섯 분 성인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갈매못에 왔으면 성인들을 유해로나마 직접 만나고 가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생각만 하는 것과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은 분명 다르다.
갈매못 주임 오명관 신부는 이곳으로 부임해 와서 본인 스스로 많이 변했다고 했다. 순교자들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내면의 거품이 사라지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리 신앙이 미지근한 것은 하느님을 알고 믿기는 하되 사랑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자신의 모든 것으로 여기고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고향에 가면 힘을 얻는 것처럼 성지순례를 통해 영적 자양분을 얻습니다. 성지는 절대로 관광하듯 둘러보는 곳이 아닙니다. 성인들의 삶과 신앙을 묵상하며 나 자신을 거듭나게 하는 곳입니다. 갈매못이 신자들에게 그런 성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갈매못 성지는 바오로의 해을 맞아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순례 성지로, 화~일요일 오전 11시 30분 순례객을 위한 미사를 봉헌한다. 성지순례 문의 : 041-932-1311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갈매못 성지 가는 길(지도 있음)
서해안고속도로 광천나들목에서 우회전 3㎞ 진행→광천에서 보령 방향으로 16㎞(21번 국도)→주포 4거리에서 오천ㆍ오천항 방향으로 10.5㎞→오천항에서 2㎞→갈매못성지
▲ 산기슭에서 내려다본 승리의 성모성당과 서해 바다. 승리의 성모성당은 뒷편이 바깥과 이어진 구조다. |
▲ 다섯 명의 성인들이 순교한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는 순교성인비(왼쪽)과 순교복자비. |
▲ 순례객들이 성인들의 유해가 모셔진 승리의 성모성당 성인유해공경실에서 기도하고 있다. |
▲ 갈매못 순교성지 기념관. 성인들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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