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도 엘리야도 나는 모릅니다/예수도 알고 보면 모르는 이국의 사나이입니다/그러나 어느날 그를 안 그날부터/나는 그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때로 도망쳐 보지만 한 번 살에 박힌/그물의 기억 지울 수 없어 다시 그 바다로 돌아갑니다"(홍윤숙 작 '예수의 그물')
공세리성당에 이르렀다. '내포교회의 관문' 성당이자 성지다. 대전교구 첫 성당으로, 전국적으로는 아홉 번째로 세워진 성당은 아름다운 성당으로 소문이 나 영화나 드라마, 뮤직 비디오 49편의 무대가 됐다.
삽교호ㆍ아산만 방조제가 교차하는 들녘 야트막한 언덕에 동화 속 삽화처럼 '예쁜' 성당이 한눈에 들어왔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아름다움에 열절한 신앙의 호흡까지 묻어나니 지친 영혼을 달래기에 이보다 더 보석 같은 성당이 또 있을까 싶다. 가을 햇살이 나무 사이로 얕게 비껴드는 십자가의 길 14처에서 눈을 감고 햇살에 몸을 내맡겼다. 110여 년 교회사의 숨결과 발자취가 육신을 간질이는 가을 바람과 햇발에 섞여 영혼만이 오롯해지는 정취가 참 그윽하다.
#'예수의 그물에 걸린' 117년 믿음터 공세리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194번지. 내포평야에서 수굿이 110여 년 세월을 관조해온 공세리성당은 평화로운 정적에 잠겨있다. 수령 300년 이상된 고목만 일곱 그루에 이르는 성당 사이 숲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가 유리알처럼 투명하다. 그 소리엔 피의 박해와 수난, 신앙의 수용과 회심의 교회사가 그대로 스며있는 듯하다.
공세리성당 대지는 3만1405㎡쯤 된다. 비탈진 언덕바지를 오르면, 예수 마음 피정의 집과 순교자현양탑, 옛 사제관, 고딕풍 붉은 벽돌성당, 성모상, 지하 성체조배실, 십자가의 길이 차례로 나타난다.
특히 지난 8월 26일 완공한 순교자현양탑(850×400㎝)은 본당 출신 순교자 28위 유해와 묘석을 봉안하고 그 위에 도자기 테라코타 부조작품 '28위 순교자'(700×200㎝)를 설치, 성지로서 위상을 다지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이 중 9위는 유해를, 나머지 19위는 묘석을 봉안했다. 950℃ 초벌구이를 거쳐 1200℃에서 유약을 바르고 재벌구이를 했지만 붉은 흙 자체의 질감을 그대로 살린 아주 독특한 경향의 도자 현양탑이다. 한국화가 상성규(안드레아, 52, 대전교구 대흥동본당)씨 작품.
순교자현양탑에서 작품과 함께 순교자의 삶을 새기다가 고개를 돌리니 가을 햇살 아래 성모상이 하얗게 반짝인다. 기도를 바치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겹쳐 지나가고 언덕 위 높은 종탑에 고딕풍의 벽돌조 성당이 나타난다. 성당 내부는 아주 소박하다. 아치형 천장, 버팀벽 등 공간 구성은 개화기 성당 전형 그대로이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후 제대가 공존하는 제대 구조 또한 옛 성당 정취를 전해준다. 한가지 이채로운 건 제대 감실 위에 본당 주보 성 베네딕토상이 모셔져 있다는 점이다.
기도를 바치다 성당 아래 지하에 조성된 성체조배실에 들르니 순례자들이 오남한 주임신부 주례로 미사를 봉헌 중이다. 순교자 28위의 숨결이 녹아든 것만 같은 지하 카타콤바에서 드리는 기도 또한 각별하다. 매일 오전 11시면 봉헌되는 미사를 막 마치고 나온 순례자 민봉기(프란치스코 하비에르, 48, 의정부교구 대화동본당)ㆍ한정화(모니카, 45)씨 부부는 "순교자들의 의연했던 모습과 열절한 신앙을 닮고, 또 우리 아이들이 신앙의 뜨거움을 알고 살아가는 복음의 자녀들이 되도록 기도하기 위해 들르곤 한다"며 "엄마 품처럼 편안해서 자주 온다"고 전했다.
성당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니 십자가의 길이다. 천안 신방동본당에서 왔다는 '자비의 모후' 쁘레시디움(단장 박영순 마리아) 단원들의 기도를 들으며 성당 뒤쪽으로 옛 사제관을 돌아 피정 집이 보이니 14처 기도가 어느새 마무리된다.
지하 1층, 지상 2층에 연면적 1157㎡ 규모 '예수 마음 피정의 집'도 빼놓을 수 없다. 성당 입구 주차장 맞은편에 자리한 피정의 집은 가족 및 단체 단위 피정, 전례 주기 및 성월에 맞춘 성서 영상 피정, 마인드 맵을 이용한 가족피정 등을 다양하게 진행한다. 피정 인원은 연간 3만 명으로, 한꺼번에 150여 명이 함께할 수 있다. 로마 그레고리안대에서 성서학(신약)을 전공한 오 신부의 성서영상 피정, 교황청 라떼라노대에서 가정사목을 공부한 최상순 보좌 신부의 특별한 가족 피정 프로그램이 특징적이다.
#내포 선교의 전진기지 성당
공세리성당은 충청, 전라, 경상 3도에서 거둔 세곡을 보관하던 공세곶창지(貢稅串倉址)에 세워져 있다. 세곡을 저장하던 400년 역사의 공세 창고에 박해 받던 '복음의 곶창'이 세워진 격이다.
'내포지방의 현관'격인 공세리본당이 설립된 것은 1890년 신창 간냥골본당(현 예산, 당시 주임 파스키에 신부)이 최초다. 공세리본당의 전신인 간냥골본당은 현재의 아산 공세리를 비롯해 신창, 온양, 천안, 목천, 충북 진천, 안성, 평택, 안중을 관할했던 것.
이처럼 117년의 역사를 간직한 공세리성당을 언급하자면, 에밀 드비즈(1871~1933, 성일론,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를 빼놓을 수 없다. 공세리에서만 39년간 사목한 드비즈 신부는 1895년에 부임, 세곡 창고터를 헐고 1922년 10월 8일 현 성당을 봉헌한다.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돼 보호되는 것이 지금의 성당이다. 중국인 벽돌공과 건축기술자 22명을 데려다 세웠다는 성당은 85년의 풍상을 증언이라도 하듯 우뚝 서 있다. 드비즈 신부는 이뿐 아니라 조성보통학교를 설립, 교육사업에 심혈을 기울였고 서양의술과 한방기법을 이용한 고약을 개발, 이명래(요한)에게 제작비법을 전수해 훗날 '이명래 고약(원래 이름은 성일론 고약)'이라고 불리는 명약을 내놓기도 했다.
그렇다고해서 이 성당이 공세리의 첫 성당은 아니다. 현 공세리2구 마을회관 터에 첫 성당을 세웠다가 허물었고 옛 사제관 터에 세웠던 한옥 성당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공주 중동본당(1897년)과 안성본당(1900년)을 분가할 만큼 유서깊은 '신앙의 못자리'로서 옛 공세리성당의 숨결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내포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이미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반증이 1866년 병인대박해 당시 공세리 출신 순교자 박의서(사바스, 당시 60살)ㆍ원서(마르코, 당시 51살)ㆍ익서(세례명 미상, 당시 45살) 형제 등 28위다. 10년이 넘게 이어진 박해에서 1879년 아산 산솟말 출신 유 요셉은 서울 감옥에서 굶어 죽기까지 공세리공동체는 서울과 수원, 공주 등지에 끌려가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했다.
특히 「병인치명사적」 11권은 박의서 3형제의 치명 사적을 생생하게 전한다. 둘째 박원서는 "내 평생 천주 공경을 실답게 하지 못하였더니, 오늘 천주께서 나를 부르셨노라"하며 형제들에게 권면, 3형제가 1867년 8월 8일 한 날 한 시에 수원감영에서 순교했다. 이들 순교자들 유해와 묘석이 봉안된 순교자현양탑에는 야외 제대가 꾸며져 있어 순례자들이 현양 미사를 봉헌토록 하고 있다.
더욱이 8대 주임 오요셉 뷜토(1901~51, 파리외방전교회) 신부의 순교 사연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6ㆍ25 전쟁 당시 양을 버리지 않은 목자는 공산군에 끌려가 개성과 평양, 중강진을 거치는 '죽음의 행진' 끝에 51년 1월초 혹한의 동토에서 숨을 거둘 만큼 이 공세리성당은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순교성지다.
#옛 정취 그윽한 문화복음화 현장으로
공세리성당은 이제 신앙의 현장만이 아니다. 한국관광공사가 2005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성당'으로 선정한 것을 전후, 한 해 2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아와 '순례의 향기'를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장이 되고 있다. 순례와 피정, 캠프가 종합적으로 이뤄지는 '문화복음화 복합단지(complex)'로 떠오른 셈이다.
성당이 '문화 현장'이 된지는 이미 오래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불새' '고스트 맘마'와 드라마 '모래시계' '사랑과 야망' '천국보다 낯선' 등이 성당을 배경으로 썼다. 그룹 엠씨 더 맥스(M.C The Max)도 성당에서 뮤직비디오를 만들었고 순교자 현양탑 오른쪽 은행나무 두 그루 아래서 가수 안치환(41)씨가 '가을 은행나무 아래서'의 노랫말을 썼다.
특히 2008년부터는 아산시 시티투어 버스 운행 코스에 '공세리성당'이 포함돼 신앙의 숨결을 비신자들에게도 전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장학습체험장이자 식물원인 '아산 피나클랜드', 테마 온천 '아산 스파비스' 등 여가시설도 성당에서 차량이나 도보로 10~15분 거리에 있어 신앙과 자연 체험, 온천이 한곳에서 이뤄진다. 그래서 공세리 성지 및 성당 이용시에는 30% 할인 혜택을 받도록 했다.
이와 함께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마을, 충무공 이순신(1545~98) 장군의 얼이 서린 아산 현충사, 온양 민속박물관 등도 성당에서 차량으로 20분 거리에 있어 역사와 문화도 풍요롭게 체험할 수 있다.
최근 순교자현양탑 건립을 마무리한 공세리본당측은 9월 18일 충청남도 문화재위원회를 통해 옛 사제관 건물을 박물관으로 복원, 개축하고 수장고 등을 신축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달 중 착공, 내년 6월께 완공할 박물관은 성당에서 민자유치로 6억4000만 원, 시ㆍ도에서 5억6000만 원을 보조해 박물관을 개축하고, 수장고와 사무실, 화장실 등을 세운다. '내포 지방 및 병인박해'를 주제로 세워지는 박물관에는 초창기 세례대와 100년이 넘은 독일제 종, 십자가, 200여 종에 이르는 각종 교회문서 등 유물을 전시하고 내포교회사를 연구하는 터전이 된다.
5시간쯤 성당에 머물다 내려와 마을 어귀에 이르러 성당을 올려다본다. 100여 년 세월, 신앙의 현장을 지켜온 들녘과 숲은 성당을 포근히 감싸안고 어루만진다. 쏟아지는 햇살로, 바람으로, 꽃 향기로 오는 그분을 가슴 열고 받아들이라고 증언이라도 하는 듯 한없이 평안하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사진=전대식 기자 jfaco@pbc.co.kr
#공세리성당 및 성지 후원 문의 : 041-533-8181, 사무실, 011-1782-8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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