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마스쿠스 사건, 바오로 고난의 출발점
"저 사람은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자들을 짓밟은 자가 아닌가?"(사도 9, 21)
다마스쿠스에서 회심한 바오로는 복음선포 열정에 몸이 달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몹시 고독했다.
유다인들 입장에서 보면 바오로의 회심은 배교이자 율법 모독이다. 예수 추종자들 소탕에 앞장섰던 바리사이 젊은이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떠들고 다니다니….
회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자들을 짓밟은 자가 아닌가?"(사도 9, 21) 나자렛 예수에게 사로 잡힌 그에게 아마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넘기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성벽 위에서 큰 광주리를 타고 내려와 다마스쿠스를 빠져 나오는 사도 바오로(지 데 산티스 작. 성바오로대성당 소장). |
그렇다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를 반겨 준 것도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 무리에 들어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외치는 그는 양의 탈을 쓴 늑대일 것이라고 의심했다. 그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인간 회심의 원형을 보여주는 다마스쿠스 사건이 그에게는 고난의 출발점이다.
#바오로는 왜 아라비아로 갔을까?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사도 소명을 받았으면, 예루살렘으로 달려가 베드로와 야고보 등 그분의 지상 제자들부터 만나는 게 순서 아닌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었는지, 제자들에게 무슨 가르침을 주었는지 궁금해서라도 달려갔을 것이다. 더욱이 '부름받은 사도'로서 다른 사도들에게 인사하고, 자신의 사도직을 보증받기 위해서라도 예루살렘행을 늦출 수 없었을 것이다. 바오로는 그 전까지 예수에 대한 소문은 들었을지 몰라도 직접 만나뵌 적은 없다.
그러나 바오로는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고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갈라 11, 17)고 말한다. 그가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를 만난 것은 3년 뒤다.
그는 왜 예루살렘이 아닌 아라비아를 택했을까. 아라비아 사막과 광야에서 무엇을 한 것일까.
이에 대한 신학자들 의견은 분분하다. 그의 행적을 추적할만한 단서가 어디에도 없다. 그가 지칭한 아라비아는 고대도시 페트라로 유명한 나바테아 왕국(요르단 암만에서 서남쪽 150㎞)이고, 그곳에 간 이유는 유다인과 그리스도인 양측으로부터 배척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사막이나 광야는 지구상에서 가장 황량한 지역이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다. 침묵과 고독, 갈증과 두려움의 땅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펼쳐진 은혜의 땅이다.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지쳐 울부짖으며 하느님을 찾은 장소가 광야이다. 예수도 공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 40일간 광야에서 단식했다.
그러고 보면 사막은 절망이 희망을 만나는 곳이다. 또 연약한 인간이 하느님의 힘을 만나는 곳이다. 바오로도 별빛 쏟아지는 사막의 밤하늘 아래서 기도하는 중에 나약한 인간의 영을 붙들어 주시는 하느님을 만났으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보여주겠다"(사도 9, 16-17)는 주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긴 뒤에 사막에서 나왔을 것이다.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회당에 들어가 자신의 체험을 털어놓고, 부활하신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연설했다. 이번에도 환영받지 못했다. 환영은커녕 사람들이 배반자의 출현을 아레타스 임금의 총독에게 고발하는 바람에 급히 피신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총독 경비병들은 그를 체포하기 위해 도시 성문 곳곳을 가로막고 감시했다. 제자들이 그를 큰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 난 창문으로 내려준 덕분에 간신히 그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었다(2코린 11).
#예루살렘에서도 환영 받지 못해
한바탕 소동을 치르고 도시를 탈출한 바오로는 예루살렘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년 전 유다교를 어지럽히는 분파들, 즉 나자렛 예수 추종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겠다고 위풍당당하게 출발했던 예루살렘. 그는 거꾸로 그리스도에게 사로 잡힌 '주님의 종'이 되어 그곳에 도착했다.
그는 박해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신분으로 처음 방문한 예루살렘에서의 체류를 간략하게 술회한다.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도는 아무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만 보았을 뿐입니다"(갈라 1, 18-20).
케파는 사도단의 대표성을 띤 베드로 지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첫 예루살렘 방문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 뿐이라서 아쉽다.
그리스도가 그토록 사랑하고 믿었던 제자 베드로, 또 그분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주님 계시를 통해 불덩이처럼 뜨거운 사도로서의 열정을 지녔던 바오로.
두 사도는 각자 자신이 만난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을까. 사도단의 으뜸 베드로는 바오로의 회심 이야기를 듣고 그를 정말 사도로 인정했을까.
바오로는 이 궁금증에 대해 말이 없다. 두 사도는 어차피 한 번은 갈등을 겪어야 할 운명이다.
예루살렘 사도들은 유다인들의 선민사상(選民思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만이 하느님에게 선택받았다는 민족적 우월주의다. 유다인들은 선민사상에 기초해 할례를 받지 않은 비유다인, 즉 이방인들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수혜자가 될 수 없다며 그들을 멸시했다.
따라서 예루살렘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가서 독자적으로 복음을 설파하는 바오로를 그냥 보고 있었을리 없다.
김원철 기자
▨ 복음전파의 걸림돌이 된 할례(割禮)
남자 성기 끝의 살가죽을 정해진 의식에 따라 잘라내는 행위.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의 표징에서 비롯됐다(창세 17장 참조)는 설이 유력하다.
구약에 나타난 할례 취지는 △다산 기원과 부정 추방(출애 4, 24-26) △특정 종족의 입문식 또는 통과의례(창세 17, 25) 등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할례 관습이 없는 민족들과 자주 충돌하는 동안 이 관습은 그들의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블레셋 민족과 싸울 때도 그들을 "할례받지 않은 자들"(판관 14, 3)이라고 멸시했다.
유다인들에게 선포되기 시작한 그리스도 복음이 다른 민족들에게 퍼져 나갈 때 이 문제는 늘 논쟁 대상이 됐다. 그리스도교가 혈연에 의한 유다교의 한 분파가 되느냐, 혈연과 지연을 초월해 세상 만민의 보편적 교회가 되느냐가 이 문제에 달려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도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다. 하지만 율법과 더불어 할례는 더 이상 본질적 요소가 되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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