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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성지(국외)

"바오로의 고향 타르수스 "

by 세포네 2008. 1. 6.

"바오로의 고향 타르수스 "

"나는 유다 사람으로 타르수스 시민이오"

옛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땅인 터키의 안타키아(하타이)에서 사도 바오로의 고향인 '타르수스'로 가는 길에선 어김없이 거친 황소를 만난다. 바로 '타우루스 산맥'이다.
 해발 2000m가 넘는 이 황소는 산맥 양편의 기후를 바꿔놓을 만큼 험준하다. 울창한 산림은 고도가 높아갈수록 생명의 한계점을 보여준다. 잔설 속에 삐죽 고개를 내민 고산식물을 제외하곤 생명체라곤 볼 수가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협곡은 붉은 속살을 드리운 채 순례자의 눈을 현혹시킨다. 150마력이 넘는 버스도, 물자를 실어나르는 철마도 가쁜 숨을 토해내며 똬리를 틀듯 능선을 휘감으며 힘겹게 산맥을 오른다. 차창을 통해 모진 협곡의 바람과 맞서 온 몸이 휘어지고 뒤틀어진 나무들, 짙고 옅은 안개와 양지바른 공터에 가판을 펼친 이름모를 소녀의 고달픔을 본다.
 오늘날 타우루스 산맥의 이 길은 2000여 년 전 로마에서 예루살렘까지 뻗어있던 길로 사도 바오로가 전도여행에 올랐던 바로 그 길이다.
 눈을 감고 2000년 전의 이 길을 그려본다. 이 길은 사도 바오로의 극적 생애를 대변하듯 '회심'과 '선교'의 길이었을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제2, 3차 전도여행 때 이 길을 걸었다. 전도 여행 당시 그가 걸은 이 길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빛을 전하고자 하는 자의식과 기쁨으로 가득했던 길이었다. '두려움'이란 말이 생소할 만큼 신앙을 위한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은총의 길이었다.
 하지만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커스에서 회심한 이후 고향 타르수스로 돌아온 후 8년간 은신했다(사도 9,30 참조). 따라서 바르나바의 초대로 교회 일을 돕고자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교회로 가려고 걸었던 이 길은 분명 두려움의 길이었을 것이다. 바오로는 이 길을 걸으며 자신이 걸어온 인생을 되돌아 봤을 것이다. 그러면서 또다시 예수께로 회심하겠다고 거듭 결심하고 다짐했을 것이다.
 험준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황무지와 끝없이 펼쳐진 평야를 지나면 고대하던 사도 바오로의 고향(사도 9,11; 21,39; 22,3) 타르수스에 당도한다. 사도 바오로는 예루살렘에서 로마 군에게 체포됐을 때 "나는 유다 사람으로, 킬리키아의 저 유명한 도시 타르수스의 시민"이라고 밝혔다.
 타르수스는 바오로가 자랑했을 만큼 유명한 도시였을까? 사도 바오로 시대 당시 타르수스는 예루살렘이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아나톨리아(오늘날 터키) 갈라리아 지방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또 지중해 남동쪽에 있는 킬리키아로 가는 교통 요지였다. 또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과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활동지였으며, 앗시리아, 힛타이트, 프리키아, 페르시아 문명의 무대였다.
 타르수스에 들어가기 위해선 도시를 관통하는 '치드누스'(지금의 수유 강)강을 지나야 한다. 도시의 젖줄이어서인지 이 강에 얽힌 전설도 많다. 그 중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알렉산더 대왕과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구전이다.
 기원 전 333년 경 페르시아 원정길에 오른 알렉산더 대왕이 타우루스 산맥에서 흘러내린 강물이 차가운 줄 모르고 치드누스 강에 뛰어들었다가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 했다고 한다. 또 기원 전 31년 경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악티움 해전에서 군대를 이끌고 치드누스 강으로 배를 타고와 안토니우스를 지원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악티움 해전의 패배로 자결하고 만다.
 오늘날 타르수스를 찾는 이방인 대부분은 사도 바오로의 고향을 둘러보려는 순례자들이다. 바오로는 서기 7~10년 경 타르수스에서 믿음이 깊은 디아스포라 유다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미 언급했듯이 당시 타르수스는 번창한 로마 도시였으며, 그리스식 교육의 중심지였다. 바오로는 유다 전통에 따라 태어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으며(필립 3,5), 자신이 히브리인, 이스라엘 사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자긍심을 갖고 성장했다(2코린 11,22; 로마 11,1).
 바오로는 바리사이파 사람으로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에게서 교육을 받기 위해(사도 22,3) 타르수스를 떠났고, 다마스커스에서 회심한 이후 타르수스로 돌아와(사도 9,30) 바르나바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그를 부를 때까지 생활했다.
 바오로는 제2차 전도여행 때(50~52년경)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타르수스를 거쳐 터키 중부와 서부 트로아스 지방을 선교했고, 제3차 전도여행 때(53~58년경)도 이 곳을 거쳐 유럽 관문인 그리스를 선교했다.
 오늘날 타르수스에는 옛 성 바오로 성당터에 세워진 울루 모스크 인근에 '바오로의 집'이라 일컫는 터가 깔끔하게 조성돼 있다. 이 곳엔 사도 바오로의 이콘 상과 함께 파피루스가 심어져 있는'바오로의 우물'이 있다. 지름 1m, 깊이 35m의 이 우물은 지금도 물이 마르지 않아 순례자들의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고 있다.
 타르수스도 사도 바오로 덕분인지 일찍부터 교회가 설립됐다. 타르수스 교구장 중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 이단과 예수의 인성을 부인한 아폴리나리우스 이단과 싸워 정통 교리를 수호한 안티오키아 출신 디오도로 주교(394년)이다. 성장일로에 있던 타르수스는 641년 무슬림의 침공으로 쇠퇴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타르수스 어디에서도 사도 바오로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성경은 지금도 이방인들에게 꺼지지 않는 구원의 빛을 전하기 위해 회심의 삶을 보냈던 타르수스에서 사도 바오로의 체취를 느끼게 해 준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 타르수스 바오로 집터에 조성돼 있는 '바오로의 우물'. 역사적 신빙성은 없지만 바오로의 체취를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 타우루스 산맥에 남아있는 로마 제국의 도로 잔해들. 사도 바오로는 이 길을 따라 아시아와 유럽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택했다.

 

▲ 한 소녀가 타우루스 산맥 중턱에 있는 간이 휴게소에서 옥수수를 팔고 있다.

 

▲ 타르수스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치드누스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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