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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가보고싶은 성당

[마산교구] 문산성당

by 세포네 2007.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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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등록문화재를 찾아서] 마산교구 문산성당(제35호) "

동ㆍ서양 건축양식 절묘한 조화 이뤄

기와지붕 한식ㆍ고딕양식 성당 경내에 공존
1937년 외부 도움없이 자력으로 성당 신축
문화유산과 자연ㆍ신앙유산 함께 어우러져


뾰족한 종탑이 솟아있는 서양식 성당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런데 성당 입구에 들어서니 왼쪽에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은 소박한 한옥 한 채가 또 아담하게 서 있다.
 기와지붕의 한식과 고딕양식의 신ㆍ구 성당이 경내에 공존하는 공간. 지난 2002년 5월 국가지정 등록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된 마산교구 진주 문산성당이다. 1923년 건축된 한옥 양식 옛 성당과 1937년에 고딕 양식으로 지은 현재 성당의 동ㆍ서양 건축양식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 근현대 성당 건축의 토착화 과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 한옥 옛 성당
몇 안 되는 전통 한옥성당이다. 정면 6칸에 우측면 4칸, 좌측면이 3칸으로 된 장축형 평면이다. 우측면에 3개의 기둥을 세워 4칸으로 설계한 것은 이쪽에 제대를 놓고 중간 기둥에 십자가를 세우기 위한 의도임을 엿볼 수 있다.
 당시만 해도 건축용 목재나 기와를 구하기 어려워 경남 고성 어느 사찰을 헐어내고 나온 자재를 이용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몇 년 전 지붕을 보수할 때 나온 기와에 '강희(康熙) 24년'(서기 1685년, 숙종 11년)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는데, '강희'는 중국 청나라에서 1662~1722년 사이에 사용된 연호로 조선시대 중기에 건립된 건축물의 기와를 재활용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중앙 통로 양쪽으로 건물을 지지하는 13개의 원형 목조 기둥이 일정 간격으로 서 있는데 기둥에 사용할 만한 긴 목재가 부족했던 탓인지 어떤 것은 짧은 목재기둥을 장부맞춤으로 연결해 길이를 연장했다. 연결부는 구멍을 파서 나무쐐기를 박아 고정했는데 투박한 모양새와는 다르게 아주 탄탄한 구조를 갖고 있다.
 최초 성당에서 유치원으로, 다시 지금의 강당으로 용도가 변경되면서 형태가 일부 변화됐으나 전반적으로 건축 당시 외형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1995년 강당으로 개ㆍ보수하면서 원래의 마룻바닥은 화강석 바닥재로 교체됐다.
 사목회 총무 정성길(라우렌시오)씨는 "지난 2004년 문화재청이 대대적 보수공사를 진행, 오랜 세월 풍상에 부식된 일부 목재와 떨어진 기와를 교체하는 복원공사로 새 단장했다"고 설명했다.
 성당 오른쪽 나지막한 동산 바위에 조성한 성모동굴도 꼭 둘러봐야 할 곳. 루르드 마사비엘 성모동굴을 그대로 본 따 만든 높이 5m, 폭 8m 정도의 성모동굴에는 설립 연도인 '1932'가 새겨진 동판이 부착돼 있는데 흐릿한 글씨가 세월의 흐름을 말해 준다.

▨ 서양식 현재 성당
 옛 성당 우측으로 약간 높은 곳에 지금의 성당이 있다. 성당 정면에는 본당 주보인 예수성심상이 입구 쪽으로 향해 있어 오는 이들을 환대한다.
 신자가 늘어나면서 옛 성당 공간이 협소해지자 교우들의 열망으로 1935년 8월 성당 신축에 착수했다. 신자들이 앞다퉈 건립기금을 봉헌하고 생필품을 판매한 수익금으로 당시 공사비 1만9000원을 모아 교구청 도움 없이 자력으로 성당 및 사제관, 성모당을 건축했다.
 1937년 5월 6일 축복식을 가진 현 성당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기둥과 벽체를 철근 콘크리트로 시공한 서양식 건물. 330.58㎡ 규모 10m×37m의 긴 장축형 평면으로 세워졌다. 정면에 뾰족한 종탑을 세운 성당은 19세기 고딕 부활(Gothic Revival) 양식에서 볼 수 있는 형태적 특징을 갖고 있다. 서양식 건축양식을 당시 여건에 맞춰 재해석해 설계 시공한 점이 돋보인다.
 높이 솟은 십자가 아래 종탑에는 프랑스에서 제작해 들여온 종 두개를 설치했는데 이 종은 일제의 시련을 극복한 역사를 갖고 있다. 일제가 사찰과 교회 동종까지 모든 금속을 헌납하도록 강요하면서 문산성당 종각에 달린 종도 공출 위기에 처했다. 당시 주임 김영제 신부는 본당의 종을 떼어 성모동굴 뒤 언덕에 깊숙이 묻고는 함구령을 내렸다. 그리고 갈촌공소에 있던 무쇠 종을 대신 헌납했다. 덕분에 종을 무사히 지킬 수 있었고, 1945년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해방의 기쁜 소식과 함께 땅 속 깊이 잠들어 있던 종을 깨워 제자리에 매달았다.
 또 당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었던 성당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 내무서로 사용되다 철수하는 북한군이 마구 쏘아댄 총탄으로 성당 벽과 지붕, 제대, 십자가의 길 14처 등이 파괴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 자랑스런 문화유산
 마산 완월동본당(1900년 설립)에 이어 교구에서 두 번째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문산본당은 서부 경남지역 신앙의 요람으로 끊임없이 회자된다.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교우촌이 형성돼 있었고, 타케 신부가 1899년 처음 진주본당을 설립하러 왔을 때 진주 지역 24개 공소 중 가장 신자가 많았던 곳이 문산본당의 전신인 소촌공소다.
 1905년 11월 본당으로 승격된 문산본당은 초가 3채를 매입해 임시성당으로 사용하다 2년 후인 1907년 조선시대 '찰방(察訪)관아'였던 건물 10여 동과 부지 7930여㎡를 정부로부터 사들여 성당으로 사용했다. 이 터가 지금의 성당 자리다.
 찰방은 조선시대 국가 도로망의 중요 지점에 위치하면서 관리들에게 교통편의를 제공하는 한편 정보수집과 범죄인 검문검색 임무를 수행하던 곳. 박해 때는 찰방을 중심으로 천주교인 색출작전을 광범위하게 전개했다.
 그런데 모진 박해 속에서도 진주 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문산본당 신자들이 천주교인을 색출하는 근거지였던 찰방관아를 몇 십 년 뒤 오히려 성당으로 매입한 것은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아름다운 신앙 유산
 문산성당을 찾아간 때는 마침 장맛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이었다. 촉촉하게 비에 젖은 성당은 첫눈에도 감탄사가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자연과 잘 어울리는 고즈넉한 외양 때문일까? 입구에 들어서면 성당 건물뿐 아니라 주변 풍광이 함께 다가온다. 9900여㎡에 달하는 넓은 대지에 한 폭 그림처럼 들어앉은 성당은 물론이려니와 해마다 성당 주변에 심고 가꾼 나무들과 푸른 잔디정원, 자연석과 절구통, 맷돌, 항아리 등이 연출하는 조경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성당건물이 '문화유산'이라면, 성당을 둘러싼 빼어난 풍광은 '자연유산'이라고 할까? 강윤철 주임신부는 "한 마디로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그리고 신앙유산이 함께 어우러진 흔치 않은 복합유산"이라며 "인근 지역 본당에서 단체로 '성당다운 성당'을 탐방하러 올 정도"라고 자랑했다.
 문산성당은 주변에 정찬문(안토니오) 순교자 묘소와 진주성, 촉석루, 진양호, 경남수목원 등 관광명소를 가까이 품고 있어 주말 나들이 코스로도 모자람이 없다.
 주일에는 문산성당에서 교중미사에 참례하고 맛있는 점심을 얻어먹은 뒤 주변 명소 나들이에 나서는 것도 괜찮은 여가생활이다. 본당에서 교중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을 위해 맛있는 점심을 저렴하게 판매한다. 단, 몇 십 명씩 단체로 방문할 때는 하루 이틀 전 본당에 미리 연락해야 한다.
 문산성당은 또 세상살이가 힘들 때면 언제고 찾아가 차분히 만날 수 있는 몇 안되는 성당이다. 피정의 집 같은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성당을 거닐며 묵상에 잠기면 믿음이 없더라도 적잖은 위안을 받게 되리라.
서영호 기자 amotu@pbc.co.kr      오석자 명예기자 hellen5@pbc.co.kr

 

▲ 등록문화재 제35호 마산교구 문산성당. 한옥성당(1923년 건축, 왼쪽)과 서양식 성당(1937년 건축, 정면)의 신ㆍ구 건축양식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 프랑스 루르드 마사비엘 성모동굴을 그대로 본 따 만든 성모동굴.

 

▲ 정면한 뾰족한 종탑을 세운 현재의 성당. 서양식 건축양식을 당시 여건에 맞춰 재해석해 설계한 점이 돋보인다.

 

▲ 안쪽에서 주출입구 쪽으로 바라본 옛성당 내부. 원래 제대가 놓여 있던 방향에 주출입구를 냈다.

 

▲ 옛 성당에서 나온 기와. '강희(康熙) 24년'은 서기 1685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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