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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가톨릭 소식들

[자랑스런 신앙유산] 3- 광주대교구 노안성당(등록문화재 제44호)

by 세포네 2007. 4. 22.

나주지역 첫 본당...십자형 성당 '눈길'


▲등록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된 노안성당 전경. 원래는 일자형 건축이었지만 1957년 좌우로 건물을 덧대 십자형으로 변했다.

▲시골학교 교실같은 성당 내부. 일제시대 대표적 건축양식으로 일자형태를 띤 강당형 서양식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성당과 마을 어귀에 세워진 성모상. 이 지역은 성모고을로 불리는 교우촌이었다.

 

 


 또 다시 봄이다. 한해 농사를 기다리는 논밭을 거닐며 때묻지 않은 흙 내음을 한껏 들이켜본다.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산자락엔 새순이 돋아나고 풀을 찧으며 소꿉놀이하는 아이들의 명랑한 웃음소리는 고요한 마을을 따사롭게 물들인다.

 전남 지역 최초의 공소이자 나주 지역 최초의 본당(1908년 설립)인 광주대교구 나주 노안본당(주임 정도식 신부,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750)으로 들어서는 길목은 그렇게 평화로웠다.

 "지금은 젊은 사람들 다 떠나고 늙은이들만 남았지만 옛날엔 (성당에) 사람도 많고 대단했어. 여기 사는 사람들 다 신자였으니 마을 큰 행사는 다 성당에서 치렀지. 혼배도 다 성당에서 했고…. 우리 성당이 제일 좋은 건물이었으니까."

 마을 어귀에서 만난 윤동례(수산나, 81) 할머니는 "성당이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그 때가 좋았다"면서 "이곳 사람들 모두 성당에서 울고 웃으며 살아왔다"고 전했다.

 나주지역 복음화 진앙지 역할을 했던 노안본당은 1894년 서울에서 박해를 피해 온 정락(요한)이라는 신자가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시작됐다. 한약방을 차리며 정착한 그는 약방을 드나드는 마을 주민들에게 틈틈이 기도문을 알려주고 교리책을 건네줬다.

 그를 통해 신앙에 눈을 뜬 신자들은 1900년 무안에서 요양 중이던 이내수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계량공소(본당 초기 명칭)를 세웠다.

 이후 본당이 설립되고 신자 수가 늘어가자 1910년 당시 주임 까다르(1878~1950,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는 성당 부지 3000평과 주변 임야 수천평을 매입해 초가 성당과 함께 2층 양옥 사제관을 지었다.

 또 1926년에 부임한 박재수(1899~1983) 신부는 초가 성당만으로는 늘어나는 신자들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양옥 사제관을 확장, 서구식 성당을 지어 1927년 봉헌식을 가졌다. 그리고 성당 이름도 계량본당에서 나주본당으로 바꿨다. 그 때 지은 성당이 현재 건물의 모태다.

 지금은 1957년 증축으로 인해 라틴 십자가(†) 형태를 띄고 있지만 당시에는 단순한 일자(一字)형 건물이었다.

 그러면 잠시 일제시대(1910~1945년) 성당 건축 양식을 살펴보자. 당시 성당 건축 양식은 크게 두 가지 양식으로 나뉘는데 한옥 지붕에 서양식 벽돌 종탑을 세우거나 외벽을 벽돌로 바꾼 한ㆍ양 절충식이거나 내부 공간의 구분이 없는 일자형태를 띤 강당형 서양식이다.

 1927년 지어진 본당은 강당형 서양식 성당 건축 유형을 대표할 수 있는 건물로 손꼽힌다. 이 양식은 공간 내부 기둥을 없애고 천장 높이를 일정하게 하면서 단조로운 형태가 특징이다.

 따라서 성당은 십가자가 달린 종탑 등 최소한의 성전 형태만 갖추고 일체의 장식을 자제한 채 건물 본연의 기능에만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일본 식민지 치하에서 억압당하며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시대 상황을 읽을 수 있다.

 이후 본당이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나주와 광주 북동 등 공소를 갖게 됐고 1934년 나주공소가 나주본당으로 승격되면서 본당 명칭은 현재 이름인 노안으로 바뀌었다.

 본당 성장과 발전에는 1936년과 1958년 성당 옆에 설립한 '신설학술강습원'과 '성 골롬반 중학교'를 빼놓을 수 없다. 두 학교 모두 폐교한 지 오래지만 당시 모든 환경이 열악한 이 지역에 주민들과 학생들을 위한 귀중한 교육의 장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육 활동과 맞물려 한국전쟁 이후 급증하는 가톨릭 교세 확장에 발맞춰 본당은 1957년 성당을 증축했다. 제단을 중심으로 좌우를 넓혀 십자형 건물을 지은 것이다. 이는 건물 양식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공간 분할이 없던 일자형에서 공간이 나뉜 십자형으로 바뀌었고 종탑뿐이던 외관의 단조로움을 덜기 위해 아치무늬가 더해졌다. 특히 종탑부, 창틀, 성당 출입문 등 모두 각기 다른 아치무늬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건축재료도 자연석과 화강석 등 다양하게 사용했다.

 이러한 변화는 강당형 서양식 건축 양식에 충실했던 성당이 시대적, 지역적 환경에 따라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본당은 나주지역 및 광주대교구 복음화 모태라는 역사적 의의와 시대 흐름을 잘 반영하고 있는 건축 양식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9월 등록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됐다.

 시간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노후된 성당은 부분 보수와 함께 옛 형태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또 폐교를 개조해 '광주대교구 청소년 수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성 골롬반 중학교 교정과 성당 주변에 대규모 청소년 관련 시설을 지어 청소년 체험활동의 장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성당만이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양천리 일대 계량마을은 녹색농촌체험마을인 '이슬촌'(http://eslfarm.com)으로 지정돼 농촌생활(나물캐기, 옥수수따기, 허수아비 만들기, 노안성당 견학)ㆍ생태(장미축제, 야생화 관찰, 산림욕)ㆍ요리(도토리묵, 꽃밥만들기)ㆍ놀이문화(한지공예, 가족신문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들을 운영하며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정도식 주임신부는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쉬는 이곳에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찾아오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라면서 "나주와 광주지역 복음화 진앙지인 옛 명성에 걸맞는 곳으로 거듭나도록 모두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수정 기자  crystal@pbc.co.kr    평화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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