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세월 80년, 한국교회사 기록에 충실
◀ 가톨릭신문 창간과 발행에 앞장선 대구지역 젊은이들이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앞줄 가운데)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제호 변천▶
평화신문과 더불어 한국 가톨릭 언론의 양대축을 이루는 가톨릭신문(사장 이창영 신부)이 4월 1일 창간 80돌을 맞는다.
언론의 주요기능은 시대 상황과 사건에 대한 기록, 그리고 여론형성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대구대교구가 발행하는 가톨릭신문이 지난 80년간 격동의 한국교회를 기록하고, 이를 토대로 여론을 형성하며 교회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
특히 사료적(史料的) 가치를 주목할만하다. 가톨릭신문은 1927년 월간 '천주교회보'라는 제호로 창간된 이후 서너차례 발행을 중단한 적은 있으나 일제 강점기 천주교 박해, 해방 후 수도회 진출과 본당 증설, 교계제도 설정, 복음화 과정 등을 끊김없이 기록해왔다.
교회사 연구에서 1900~50년대는 공백상태나 다름없다. 일제 강점과 해방, 6ㆍ25 사변의 혼란 속에서 교회 관련 기록문서가 유실된 탓에 교회사 연구가들은 이 시기 연구자료의 상당 부분을 가톨릭신문에 의존하고 있다.
또 가톨릭신문은 평화신문 창간(1988년) 이전의 유일한 교회신문으로서 신자들의 눈과 귀가 돼주었다. 교회 인쇄출판물이 부족했던 시절이라 신자들은 가톨릭신문을 통해 전달되는 소식으로 한국교회와 보편교회 흐름을 알 수 있었다. 지금도 나이 많은 신자들은 공소나 집으로 우편 배달된 '가톨릭 시보'를 밤늦도록 호롱불 아래서 탐독하던 추억을 얘기한다.
신문이 신자 계몽에 기여한 업적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출판물은 물론 신부ㆍ교리교사ㆍ교육강좌가 태부족이었던 시절, 신문은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1931년)을 맞아 한국교회 최초로 소집된 공의회와 이에 따른 교회쇄신 활동,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개과정 등을 신속 보도하며 신자들 신앙성숙을 도모했다.
1964년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2년간 가톨릭시보사 사장으로 일한 김수환 추기경은 당시 신문제작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10명이 채 안 되는 기자와 직원이 만성적자에 시달리면서 근근이 신문을 내는 실정이었다. 난 그곳에서 2년 동안 밥먹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일에 미쳐 살았다. 그때 제2차 바티칸공의회 바람이 한국교회에 불어오기 시작했다. 로마에서 열리고 있는 공의회 소식을 보도하는 일만큼은 사명감을 갖고 임했다. 한국교회가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가 되려면 공의회 정신을 올바로 알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의회의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번역 의뢰가 여의치 않으면 직접 번역을 해서라도 신문에 실었다."(평화방송ㆍ평화신문 발행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중에서)
또한 신문은 1970년대 들어 비인간적 독재개발 정권에 경종을 울리며 시대의 아픔에 적극 동참하는 교회 언론상을 제시했다. 이런 노력은 세상과 대화하는 교회, 국민들과 고락을 함께하는 가톨릭 이미지를 우리 사회에 심는 데 큰 도움이 됐다.
80개 성상(星霜)은 곧 한국교회 언론 역사이자 전통이다. 유럽 대륙의 몇몇 가톨릭 국가 교회를 제외하고 80년 역사를 자랑하는 언론매체를 갖고 있는 교회는 드물다. 더욱이 선교지역 교회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국내 대표 일간지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올해 창간 87돌을 맞이한 점에 비춰보면 80년 역사는 함께 경축할만한 기념비적 이정표다.
가톨릭신문은 이달 30일 오후 6시 서울 명동성당에서 기념미사와 축하식을 갖는다. 김원철 기자
▨ 가톨릭신문 80년 약사
가톨릭신문은 교회 당국이나 재력가가 아니라 신앙심 뜨거운 평신도 젊은이들이 모여 창간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대구교구 청년연합회가 남방천주공교청년회(南方天主公敎靑年會)를 발족해 소식보도ㆍ보조일치(補助一致)ㆍ조국성화를 기치로 내걸고 1927년 4월 1일 창간한 월간 '천주교회보'가 효시다.
편집대표는 청년회장 최정복, 편집위원은 윤창두ㆍ서정섭ㆍ최재복ㆍ이효상 등이다. 지면은 4ㆍ6배판(A4 용지보다 조금 작은 크기) 4면 발행.
이 회보는 교구와 신자들 후원으로 2000부까지 발행했으나 1933년 주교회의가 '경향잡지'를 제외한 교회 내 간행물들을 통폐합해 청년지 '가톨릭청년'을 창간키로 함에 따라 6년만에 폐간됐다. 이때 서울교구에서 발행하던 월간지 「별」도 함께 폐간됐다.
천주교회보는 15년 공백을 깨고 1949년 제74호로 속간됐다. 그러나 6ㆍ25 전쟁발발로 신문을 인쇄하던 대건출판사가 공군인쇄소로 징발됨에 따라 넉달간 발행을 중단해야 했다. 신문발행 주체가 청년연합회에서 대구교구로 넘어간 것은 1951년이다.
교구는 1953년 제호를 '가톨릭신보'로 바꾼 데 이어 이듬해 '가톨릭시보'로 다시 바꿨다. 그리고 판형을 지금과 같은 배대판으로 확대하고, 격주간에서 주간으로 발행하기 시작했다. 주간 발행 정착은 자유당의 천주교 탄압과 만성적 재정난 속에서 이뤄진 것이라 의미가 있다. 이 당시 신문 발전을 견인한 주역은 11년간 편집국장으로 봉직한 윤광선(비오, 2002년 작고)씨다.
이후 전달출 신부가 대구매일신문사 겸 가톨릭시보사 사장으로 부임(1978년)해 또 한번 도약을 이뤄냈다. 전 신부는 1980년 제호를 '가톨릭신문'으로 변경하고 지면을 8면, 12면으로 계속 증면하면서 현재와 같은 신문 위상을 정립했다.
가톨릭신문은 대구 계산동 매일빌딩 5층에 본사를 두고 주 24면 발행한다. 4월1일자 창간 80돌 특집호는 지령 제2543호다.
▨ 80돌 기념사업
가톨릭신문은 국제학술대회, 아시아 가톨릭계신문 대표자 모임, 기념 콘서트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며 창간 80돌을 기념하고 있다.
▶국제학술대회= 3월 23일 서울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아시아 복음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란 주제로 열렸다.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사무차장 펠릭스 마차도 몬시뇰, 프랑코 소토코르놀라(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수도회) 신부 등이 아시아 복음화 전망에 대해 발제했다.
▶아시아 가톨릭계 신문 대표자 모임= 아시아 지역 대표 8명이 방한해 3월 22일부터 사흘간 공동 관심사를 나누고 아시아 네트워크를 결성했다. 중국을 대표하는 가톨릭계 신문인 'Faith(信德) 10-Day신문' 사장 장 신부를 비롯해 일본ㆍ홍콩ㆍ인도ㆍ방글라데시 등에서 대표자가 참석했다.
▶희망나눔 콘서트= 4월 29일 오후 6시 30분 대구 월드컵 경기장 특설무대에서 열린다. 대구 경북지역 홀몸노인과 소년소녀가장들의 생활비를 지원하기 위한 자선 콘서트다. 동방신기, SG워너비, 바다 등 인기가수들이 출연한다.
▶80년사 편찬 및 발간= 총 650쪽 분량 80년사를 올 하반기에 발간한다. 또 80년 동안 축적한 기사와 다양한 자료를 디지털화해 가톨릭 언론 데이터뱅크(DB)를 구축한다.
▶종교의식과 신앙생활 조사= 서울대교구 통합사목연구소와 함께 '한국 가톨릭교회 신자들의 의식과 신앙생활'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 중이다. 조사결과는 4월 1일자에 게재할 예정이다.
▶헬렌 프리진 수녀 초청 강연회= 사형수를 다룬 영화 '데드 맨 워킹'의 실제 인물이자 사형제도 폐지 주창자인 헬렌 프리진 수녀를 초청해 5월 24일 오후 2시 대전 탄방동성당, 5월 25일 오후 6시 부산 남천성당에서 강연회를 연다.
평화신문 기자 pb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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