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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한국교회사80장면

(27) 1976년 3.1 명동 사건

by 세포네 2007. 2. 11.

“정부 전복 선동 혐의 성직자 3명 구속돼”

1975년 들어서 교회의 정의 구현 운동을 봉쇄하려는 정부의 탄압이 더욱 노골적으로 자행되고 있었다. 집회를 갖지 못하도록 원천 봉쇄했고, 주요한 인사들을 격리하고 성직자들을 순화시키라는 긴급 지시들이 관할 경찰서들로 속속 내려왔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이러한 정부의 조치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의 자유를 정면으로 탄압하는 것이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제단은 기도회는 이 땅에 사회 정의가 구현되고 침해받는 인간의 기본권을 되찾기 위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로서 교회 본연의 사업을 실천하는 종교행사이며 …

신앙 행위를 문제성 있는 집회라 하여 봉쇄하려 함은 하느님의 뜻과 양심의 소리를 두려워하는 당국의 도덕적 타락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직접적인 종교 탄압을 다시 한 번 확인케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종교 활동을 위험시하고 하느님의 진리를 두려워하는 당국의 정신적 패배주의가 역력하다고 주장했다.”(가톨릭시보 1975년 2월 9일자 1면 중에서)

종교 탄압하는 정부 비난

정권의 폭압에 대한 국내외의 항의가 빗발치자 1975년 2월 17일에 당국은 긴급조치 해제와 함께 지학순 주교를 비롯한 일부 양심수를 석방했다.

그러던 중 이듬해인 1976년 3월 1일 20여명의 사제가 공동 집전하는 3.1절 기념미사가 명동성당에서 개최됐다.

미사 후 7명의 천주교 신부와 문익환, 김대중 등 개신교 성직자와 재야인사들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이 낭독됐다.

이와 관련해 가톨릭시보 3월 7일자 신문에는 다음과 같이 간단한 기사가 보도됐다.

“3.1절 기념미사가 3월 1일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 약 7백명의 남녀 신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20여명의 사제공동집전으로 봉헌됐다.”

2단 제목으로 보도, 너무나 간단한 내용으로 구성된 이 기사는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간단한 기사로 인해 이면에 감춰진 더 많은 내용을 전해준다.

그 후 3월 28일 가톨릭시보에는 그 이유를 짐작케하는 내용이 보도된다.

“聖職者 3名을 拘束

- 긴급조치 9號 위반, 4명은 불구속 立件

서울 지검은 10일 하오 서울대교구 응암동본당 주임 함세웅(35) 신부와 전주교구 해성중고등학교 종교감 문정현(36) 신부 및 원주교구 봉산동본당 주임 신현봉(46) 신부를 지난 1일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 행사를 이용한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 전복 선동 사건’에 관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재야인사 8명과 함께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서울지검 서정각 검사장은 또한 서울대교구 신림동본당 주임 김승훈(36) 신부, 수색본당 주임 김택암(37)신부, 동대문본당 주임 안충석(37) 신부, 영등포본당 주임 장덕필(36) 신부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가톨릭시보 1976년 3월 28일자 1면 중에서)

구국 선언의 장, 명동성당

당국이 제공한 보도 자료만으로 구성됐지만 이 보도는 3.1절 기념미사로 인해 지주교 구속 사건 못지 않은 커다란 파장이 이어질 것임을 미뤄 짐작케 한다.

이후 명동성당에서는 매년 3월 1일이면 제2, 제3의 구국선언이 이어졌고 명동성당은 또 다시 시국 기도회가 열리는 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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