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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축일 (聖人)

12월 29일 성인들

by 세포네 2006. 12. 29.

갈리스토(12.29)

보니파시오(12.29)

펠릭스(12.29)

신분 : 순교자

연대 : 연대미상

 

 성 칼리스투스(또는 갈리스토)와 성 펠릭스(Felix) 그리고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는 모든 서방교회 순교록에 그 이름이 올라있다. 그들의 이름과 그들이 로마(Rome)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외에 그들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더 이상 없다.

 

다윗(12.29)

신분 : 왕, 예언자

연대 : 기원전 10세기

지역 : 이스라엘

 

  성 다윗은 이새의 아들로서 유대와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다윗 왕조의 태조로서 예루살렘에서 기원전 1000-961년 사이에 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이었다. 성 다윗은 유대의 베들레헴 출신이고 룻기 4장 18-22절에 의하면 보아스와 모압 여인 룻 사이에서 태어난 오벳의 손자이다. 그에 대해서는 구약성서 열왕기 상하권과 사무엘 상하권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도미니코(12.29)

리보소(12.29)

빅토르(12.29)

사투르니노(12.29)

세쿤도(12.29)

크레센시오(12.29)

프리미아노(12.29)

호노라토(12.29)

신분 : 순교자

연대 : 연대미상

 

   성 도미니코(Dominicus)와 성 빅토르(Victor), 성 프리미아누스(Primianus), 성 리보수스(Lybosus),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성 크레스켄티우스(Crescentius), 성 세쿤두스(Secundus), 성 호노라투스(Honoratus)는 아프리카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외에 알려진 바가 없다.

 

마르첼로(12.29)

신분 : 수도원장

연대 : 485년

 

   시리아의 아파메아(Apamea) 출신인 성 마르첼루스 아키메테스(Marcellus Akimetes, 또는 정의로운 사람 마르첼로)는 양친을 잃고서부터 세속 일에 흥미를 잃고, 안티오키아(Antiochia)로 가서 전심전력으로 성서를 공부하였다. 그 후 에페수스(Ephesus)로 가서 하루 종일 쉼 없이 성무일도를 외는 수도 공동체에 입회하여 주로 성서 필사본을 만들고 기도하며 지냈다. 그런 그의 높은 성덕과 고독 그리고 엄격한 생활이 크게 돋보이기 시작했으므로 그는 그 공동체의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공동체는 테오도시우스 2세의 압박으로 고난을 받던 중, 그의 뛰어난 지혜와 관리 덕분으로 날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그는 청빈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극성을 부리던 이단 퇴치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은 사람도 성 마르첼루스였다. 그는 45년 동안 수도원 원장을 지냈다.

 

베드로(12.29) (복자)

신분 : 수도원장

연대 : 1092-1156년

지역 : 클뤼니

 

   베드로 드 몽보아시엘(Petrus de Montboissier)은 프랑스 중남부 오베르뉴(Auvergne)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클뤼니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20세 때에 이미 베절레이의 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1122년 30세 때에는 클뤼니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프랑스 남부에서 성행하던 베드로 부루시아 이단을 반대하는 글을 썼고, 랭스 시노드(Synod of Reims)에도 참석하는 등 교회사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클뤼니 수도원을 30년이나 지도하여 이곳이 서방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수도원이 되게 하였다.

 

에브룰포(12.29)

신분 : 수도원장

연대 : 626-706년

지역 : 우슈

 

   성 에브룰푸스(Ebrulphus, 또는 에브룰포)는 626년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의 바이외(Bayeux)에서 태어나 힐데베르트 3세(Childebert III)의 궁중에서 성장하고 결혼하였다. 그러나 부인은 수녀원으로 들어갔고, 그는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국왕의 허가를 받아 수도자가 되려고 준비하였다. 마침내 그는 바이외 교구의 어느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즉시 그는 성덕과 인격에서 높은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심한 유혹에 사로잡히게 되자 세 명의 동료 수도자와 함께 노르망디의 우슈 숲 속으로 은거하였다. 이들 은수자들은 움막도 없이 개울가에서 지내면서 엄격한 보속생활을 계속하였다. 한 농부가 그들을 보고 크게 놀라서 이 숲은 맹수가 득실거리고 먹을 것이 없는 곳이라고 일러 주자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우리 죄를 보속하기 위하여 이곳에 왔습니다. 공중의 새들을 먹이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굳게 믿고 살겠습니다.” 이 농부는 그 다음날 빵과 꿀을 가져온 뒤에 그들과 함께 보속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의 공동체가 인근 주민들에게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개종하였으며, 늘어나는 제자들을 수용할 수 없어서 남자와 여자를 위한 다른 두 수도원을 지었다. 성인은 은수자들에게 노동을 권유했고, 자신의 일로써 일용할 양식을 얻어야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성 에브룰푸스는 80세가 되어 운명하였는데, 그는 성체와 소량의 물로 6주간 동안 지낸 적도 있다고 한다.

 

토마스 베케트(12.29)

 

신분 : 주교, 순교자

연대 : 1118-1170년

지역 : 켄터베리

 

   런던의 주 장관인 길버트 베케트(Gilbert Becket)와 마틸다(Matilda)의 아들로 태어난 성 토마스 베케트는 노르만족의 후손이다. 그는 런던에서 출생하여 서리(Surrey)의 머튼 프리오리(Merton Priory)에서 수학했으며, 런던에서는 법률을 공부하고 파리 대학교에서도 그의 전문 과목을 계속 연구하였다. 부친의 사망으로 궁핍한 환경으로 내몰린 그는 1141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관으로 들어갔다. 이때 테오발드(Theobald) 대주교는 토마스가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와 프랑스의 오세르(Auxerre)에서 법률을 공부하도록 조처해 주었다.

   그는 1154년에 부제로 서품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테오발드 대주교의 명을 받고 로마(Rome)를 오가면서 중요한 일들에 관여하였다. 1155년 토마스는 헨리 2세 왕에 의하여 잉글랜드(England)의 수상으로 임명되면서 국왕 다음의 실권자가 되었다. 그는 헨리 2세를 수행하여 프랑스 툴루즈(Toulouse)로 원정을 나갈 때에는 부대장도 맡았다. 1161년 테오발드 대주교가 서거하자 헨리 2세는 토마스를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물론 그는 이 직책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1162년 그는 수상직을 사임한 후 사제품을 받고서 대주교로 착좌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엄격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1166년 토마스는 소위 ‘클라렌든 칙령’을 거부하였는데, 이 법은 교회 법정에서 행해야 할 성직자의 권리와 교황청에 호소하는 권리를 부인하는 악법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토마스는 프랑스로 축출되었다. 토마스는 이 사실을 교황에게 상소하였지만 헨리 2세와 반목하기를 원치 않았던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 교황은 그를 지원하지 않았다. 이처럼 헨리 2세와 토마스가 반목하고 있을 때, 토마스는 교황의 제안에 따라 프랑스 퐁티니(Pontigny)의 시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1166년 헨리 2세가 자신의 영향권 내에 있는 지역에서 모든 시토 회원들을 추방하겠다고 위협할 때, 토마스는 상스(Sens) 교외의 성 콜룸바(Columba) 수도원으로 가서 프랑스 국왕 루이 7세(Louis VII)의 보호를 받았다. 루이 7세의 노력에 의해 헨리 2세와 토마스는 평화 협정을 맺고, 토마스는 잉글랜드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정치적인 사건 때문에 그는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무참히 살해당하였다. 이 사건은 전 유럽을 뒤흔들었다. 토마스는 사망 즉시 순교자로 선포되었으며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그를 성인으로 공포하자 헨리 2세는 공적으로 잘못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유해가 모셔진 성 토마스의 경당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순례자들이 모이는 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그가 남긴 다음의 말은 아주 유명하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기꺼이 행하였다.” 영국의 시인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은 “대성당의 살인”을 썼다.

 

트로피모(12.29)

 

신분 : 바오로의 제자, 주교

연대 : 1세기

 

  에페수스(Ephesus)에서 온 이방인 출신인 성 트로피무스(또는 트로피모)는 성 바오로(Paulus)의 제3차 전교 여행에 수행하였고(사도 20,4),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폭동을 일으켜 바오로를 체포했을 때에도 함께 있었다(사도 21,26-36). 디모테오 후서 4장 20절에는 “트로피무스는 밀레도스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톨릭 굿뉴스 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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