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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축일 (聖人)

12월 27일 성인들

by 세포네 2006.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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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레테(12.27)

신분 : 동정녀

연대 : 410년경

 

   성녀 니카레테는 니코메디아(Nicomedia)의 귀족 가문의 딸인데, 자신의 선업을 행하기 위하여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annes Chrisostomus, 9월 13일)가 병환으로 고생할 때 극진히 돌보아서 회복시켰다. 이에 성 요한은 그녀에게 교회의 직책을 수여하려고 제의하였으나 수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녀 니카레테는 논쟁에 휘말린 어떤 주교를 적극 지원하다가 성녀 올림피아(Olympias, 12월 17일) 등과 함께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운명하였다.

 

막시모(12.27)

신분 : 주교, 증거자

연대 : 282년

지역 : 알렉산드리아

 

   성 막시무스(또는 막시모)는 알렉산드리아의 사제로 자신의 주교인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1월 17일)가 유배(251-264년)를 간 동안 교구를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그리고 성 디오니시우스 주교가 사망한 후 그를 계승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이교에 빠진 사모사타(Samosata)의 바오로(Paulus) 주교를 이집트 밖으로 쫓아냈다고 한다.

 

요한 스톤(12.27)

신분 : 순교자

연대 : 1538/1539년

지역 : 영국

 

   성 요한 스톤(Joannes Stone)은 성 아우구스티누스 회의 수도자로서 신학박사였고, 영국 캔터베리(Canterbury)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순교했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드로이트위치(Droitwich)에서 교수와 수도원장으로서 봉사하다가 캔터베리로 돌아와서 헨리 8세 왕의 수장령을 반대한 죄로 1538년 12월에 체포되어 웨스트게이트(Westgate)에 수감되었다가 순교하였다. 그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England)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성인의 옛 축일은 5월 12일이다.

 

테오도로(12.27) (수도승)

테오파네(12.27) (주교)

신분 : 순교자

연대 : 775-841년

지역 : 니케아

 

   성 테오도루스(Theodorus, 또는 테오도로)와 그의 동생 성 테오파네(Theophanes)는 모아브(Moab) 지방의 케락(Kerak)에서 태어났으나,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는 예루살렘의 성 사바(Sabas)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된 후 사제로 서품되었는데, 예루살렘 총대주교의 명에 따라 성상파괴 정책을 고수하는 레오 황제에게 항의하러 파견되었다.

   그는 이 명을 충실히 따른 결과 성 테오파네와 함께 모진 매를 맞고 흑해의 어느 섬으로 유배되었다. 820년 레오 황제가 죽게 됨에 따라 그들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귀향하였으나, 테오필루스 황제에 의하여 829년에 재차 추방되었다가 2년 만에 다시 소환되어 고문을 받았다. 그들은 성상 파괴에 항의하는 뜻으로 12행의 문구를 문신으로 새기고 다녔다고 한다. 이윽고 그들은 비티니아(Bithynia, 고대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의 아파메아(Apamea)로 추방되었고 그곳에서 성 테오도루스는 운명하였다. 성 테오파네는 아마도 이때 살아남아서 후에 니케아(Nicaea, 터키 북서부에 있는 이즈니크의 옛 이름)의 주교가 되었다. 이 형제들이 그랍투스(Graptus)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들이 새긴 문신 때문이다.

 

파비올라(12.27)

신분 : 과부

연대 : 399년

지역 : 로마

 

   성녀 파비올라는 로마의 유명한 귀족 가문인 파비아가(Fabia family)에서 태어났고, 얼마 동안은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의 후원자로 활동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그만 두었다. 결혼한 남편의 너무나 방탕한 생활로 말미암아 이혼하였으나 그녀 자신도 사회생활을 떠나야만 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위로를 찾게 되었고, 교회의 명을 어겼기 때문에 로마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스캔들이 되었다. 즉 이 스캔들은 그녀가 이혼한 상태에서 재혼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오래지 않아 두 남자가 모두 죽게 되자 그녀는 공적인 회개를 하고 교회로 되돌아 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이때부터 그녀는 화려한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교회를 돕는 일과 자선활동에 헌신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395년에 베들레헴을 순례하였고, 그곳에서 성 히에로니무스를 만났다. 그녀는 그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기를 원했으며, 성 히에로니무스의 성서 번역 사업을 후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던 조용한 생활을 하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곧 자신의 성격이 부적합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차제에 팔레스티나(Palestina) 신자들을 지도하는 문제를 두고 성 히에로니무스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고, 또 훈족들이 이 지역을 위협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성 히에로니무스와 그의 후원자들과 함께 야파(Jaffa)로 피신하였다가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에서도 그녀는 자선사업을 계속하였는데, 특히 성녀 바울라(Paula, 1월 26일)의 사위인 성 팜마키우스(Pammachius, 8월 30일)와 함께 병자와 순례자를 위한 자선병원을 포르토(Porto)에 세웠다. 이 병원은 서양 최초의 가톨릭 병원으로 여겨지며, 그 이름이 오늘날의 영국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조차도 그녀의 모든 열정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죽을 당시에도 새로운 사업을 계획할 정도로 헌신적이고 정열적이었다. 399년 성녀 파비올라가 로마에서 사망했을 때, 그녀의 장례식에는 로마의 모든 사람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그녀는 가장 큰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성녀 파비올라를 위해 두 편의 글을 남겼는데 그것이 우리가 그녀를 알게 된 주요 자료들이다.

 

(가톨릭 굿뉴스 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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