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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16

16.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제명되다 “회칙 무시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이 아닙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 신부들은 브뤼기에르 주교를가 교황청 포교성성 소속 선교사로 단정하고 조선대목구 문제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전경 조선대목구는 포교성성 관할 선교지 1832년 10월 18일 마카오에 도착한 저는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곳으로 이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교성성 대표부로 갔습니다. 포교성성 대표부 책임자 움피에레스 신부의 연락으로 바루델 신부에 이어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 대표부장으로 부임한 르그레즈와(Pierre-Louis Legregeois, 1801~1866) 신부가 저를 데리러 왔습니다. 그는 제게 교황청에서 보낸 칙서들을 전해줬습니다.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 신학.. 2024. 5. 12.
15. 샤스탕 신부, 조선 선교를 자원하다 교황 파견 선교 사제 샤스탕 신부, 저와 동행해 조선 선교 희망 샤스탕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됐다는 소식을 듣자 제일 먼저 조선 선교사로 자원했다. 샤스탕 신부 성인화 길잡이로 신학교 출신 중국인 왕 요셉 선발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께서 조선대목구 설정과 함께 저를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하신 후 그해 10월 1일 자로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대리가 제게 편지를 썼습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 조선인 교우들을 위해 대단히 큰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준비하시는 모습을 역력히 알아볼 수 있는 주교님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 난관은 조선에 있는 새 영세자들에게 복음의 빛이 비치고, 성사가 거행되게 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것입니다. 포교성성은 겸손되이 이 모.. 2024. 5. 5.
14. 초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되다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 설정·대목구장 임명 소칙서 반포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31년 9월 9일 성모님께 처음으로 봉헌된 성당인 로마 성모 마리아 대성전에서 조선대목구 설정과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한다는 두 개의 소칙서를 반포했다 1832년 7월 25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담당 신부 장 앙투완 뒤부와(Jean-Antoine Dubois) 신부가 보낸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편지에는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께서 소칙서를 반포해 조선대목구를 설정하시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저를 임명했다는 소식이 담겨있었습니다. 제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지 10개월 만에 이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이 편지로 저의 망설임은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저는 더는 고민.. 2024. 4. 28.
13. 여항덕 신부, 조선 선교사가 되다 “나는 중국인 사제의 재치권 따라야 하는 단순한 선교사입니까?” 여항덕 신부는 중국 섬서 출신으로 조선에서 본국으로 귀환한 후 산서-섬서대목구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도 조선 입국을 위해 중국 땅을 여행할 때 1833년 10월 10일부터 1년간 산서-섬서대목구 주교관에 체류한다. 사진은 브뤼기에르 주교 당시 산서-섬서대목구청 자리에 20세기 초반 새롭게 건립된 산서교구 주교좌 성당 포르투갈에 조선 선교지 권한 완전히 넘겨 1832년 7월 초 “조선으로 가고 싶으면 지금 당장 떠나라”는 마카오 포교성성 대표부장 움피에레스 신부의 편지가 오기 전에 저는 페낭에서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 라미오 신부에게 조선 선교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편지를 보낸 바 있습니다. 그는 박해를 피해 지금 마카오에 .. 2024. 4. 21.
12. 주교품을 받다 1829년 주교품 받아… 박해받고 있는 조선 교회 성모님께 의탁 방콕 주교좌 성모 승천 대성당 내부. 샴대목구 부대목구장이자 갑사의 명의 주교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는 1829년 6월 29일 샴대목구 주교좌 성모 승천 대성당에서 플로랑 주교로부터 주교품을 받았다 교황, 샴대목구 부대목구장 주교로 임명 1829년 5월 8일 방콕에 도착한 서신 꾸러미에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 보낸 공동 회람뿐 아니라 레오 12세 교황(재위 1823~1829)이 서명한 3통의 소칙서(Brevis)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샴대목구장인 플로랑 주교에게, 나머지 2개는 저에게 보내온 소칙서였습니다. 레오 12세 교황이 1828년 2월 5일 자로 서명한 칙서들이 그제야 수신인들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제게 “브뤼기에르 .. 2024. 4. 15.
11. 조선 선교를 자원하다 북경교구·파리외전 모두 조선 선교 거절… “제가 가겠습니다” 제22대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은 마카오 대표부장 움피에레스 신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직할 선교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를 제안한다. 카펠라리 추기경은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으로 즉위해 조선대목구를 설정한다 포교성성, 북경교구에 조선 사제 파견 요청 교황청 포교성성이 직할 선교 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를 요청한 배경을 좀더 설명하겠습니다. 1818년 1월 6일 북경교구장 수자 사라이바 주교가 마카오에서 선종했습니다. 박해로 북경에 들어가지 못한 교구장 사라이바 주교를 대신해 총대리 포르투갈 라자로회 리베이로 누네스(Ribeiro Nunes, 1767~1826) 신부가 조선 교회를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추기경 회의를 .. 2024. 4. 15.
10. 방콕에서 조선 선교 관할 여부 묻는 소식을 듣다 “제가 이 일을 맡고 싶습니다. 제가 조선에 가고 싶습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샴대목구 주교좌 성모 승천 대성당 주교관에 머물며 신학교 교수로, 본당 사목자로, 죽을 위험에 처한 외교인 아이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선교사로 2년간 활동했다. 1922년 방콕 주교좌 성모 승천 대성당. Kraus, Johansen 1827년 방콕 도착 후 곧바로 선교사로 활동 1827년 6월 3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방콕 도착 후 곧바로 선교사로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샴대목구장 플로랑 주교님께서는 저의 첫 소임으로 신학교 운영을 맡겼습니다. 무엇보다 현지인 사제를 양성하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입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입회 전 프랑스 카르카손교구 대신학교 교수로 오랜 기간 재직한 바 있어 신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낯설지 않았습니다... 2024. 4. 15.
9. 리고르를 거쳐 방콕에 도착하다 마카오 떠난 지 6개월여 만에 첫 선교 임지 방콕에 도착하다 브뤼기에르 신부 일행은 리고르 임금의 배려로 리고르에서 배를 타고 17일간의 항해 끝에 방콕항에 도착했다. 사진은 플로랑 주교가 거주했던 방콕 차오프라야 강 언저리에 있는 성 십자가 성당. 플로랑 주교가 활동하던 당시 성 십자가 성당은 목조 건물이었다. 구글 캡처 리고르 임금 배려로 방콕까지 배로 이동 탈롱(Thalon, 오늘날 파탈룽)에서 마침 순시차 이곳에 온 리고르 왕국의 임금을 예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300명의 호위병과 후궁 25명을 거닐고 저를 맞았습니다. 리고르 임금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없는 것 말고는 훌륭한 분입니다. 호감을 주는 인상이고 선의와 자애가 넘치는 분입니다. 그는 상냥하고 인기가 있으며 외국인들을 반깁니다. 정의를.. 2024. 4. 15.
8. 케다에서 탈롱까지 호위병과 함께 코끼리 타고 밀림 헤쳐가며 탈롱으로 향하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케다에서 가톨릭 신자인 샴 왕국 대사의 도움으로 지역 관장인 리고르 왕자를 만나 스님과 똑같이 환대받았다. 폐허가 된 케다 렘부의 예수 성심 성당. Nutmeg books 페낭 도착 후 행선지 모두 뒤틀어져 1827년 1월 12일 페낭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습니다. 한 프랑스인 선장이 타밸(Tavael)과 미얀마 남부 지역인 메르기(Mergui)를 거쳐 저를 샴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했기 때문입니다. 페낭의 선교사들은 이 제안을 환영했고 저 역시 동의했습니다. 페낭에 머무는 동안 장 바티스트 부쇼(Jean Baptiste Boucho)ㆍ바르브(Barbe) 신부가 사목하는 토종(Ta.. 2024. 4. 15.
7. 샴대목구로 파견되다 ‘조선 선교’ 마음에 품고 새 선교지 태국 샴대목구로 떠나다 브뤼기에르 신부가 1826년 12월 마카오에서 선교지로 배속받을 당시 샴대목구는 샴과 케다(말레이시아 북서부 지역), 피라, 리고르 왕국의 모든 지역과 라오스 왕국 일부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림은 샴대목구 관할도. 구글 캡처. 동료 선교사 페코 신부 선종으로 임지 변경 저의 선교 임지가 확정됐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 바루델(Jean-Louis Baroudel, 1801~1866) 신부는 제게 샴(태국)으로 떠날 것을 명했습니다. 저는 파리를 떠날 때 코친차이나 선교사로 내정돼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인사이동이었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본부에서 파견될 때 장상으로부터 선교 임지를 통보받습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처럼 교황 파견 .. 2024. 4. 15.
6. 마카오에 체류하다 조선 교우 성직자 영입 운동에 감복… “조선 선교는 저의 운명” 프란치스코 샤싱 주교. 1826년 10월 브뤼기에르 주교가 마카오에 도착했을 당시 교구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1826년 10월 중순 마카오에 도착하다 저는 1826년 10월 중순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 아래 있던 마카오교구는 작은 형제회 출신 프란치스코 샤싱(Francisco de Nossa Senhora da Luz Chacim) 주교가 1804년부터 교구장으로 재임하고 있습니다. 또 포르투갈에서 파견된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아우구스티노회, 예수회, 라자로회 수도자들이 사목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마카오에는 교황청 포교성성 대표부와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들의 거주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움피.. 2024. 4. 15.
5. 선교 보호권과 교황청 포교성성 스페인·포르투갈 선교 보호권 악용 폐단 없애려 포교성성 신설 교황 파견 선교 사제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넉 달 보름 동안 선교사 양성 교육을 받은 후 1826년 2월 5일 선교지인 코친차이나를 향해 출항했다. 샤를르 쿠베르탱, ‘출발’, 1868,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이 그림은 쿠베르탱이 성 브르트니에르, 도리, 볼리외, 위앵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고 자신이 참석했던 1864년 7월 15일 거행된 이들 교황 파견 선교 사제들의 파견식을 회상해 그린 작품이다 선교사 양성 교육 받고 선교지로 향하다 저는 1825년 9월 17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해 넉 달 보름 동안 선교사 양성 교육을 받은 후 교황 파견 선교 사제로 임명됐습니다. 그리고 1826년 2월 5일 보르도 항에서 선교지 코.. 2024.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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