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회와 영성]/성지(국내)

[수원교구] 안양 수리산성지

by 세포네 2006. 9. 24.

한옥성당 정겨운 하루 일정 '맞춤 순례지'

 

<=  (사진설명)
▲수리산성지 마크 성최경환의 불타오르는 신앙심을 형상화했다. 순교자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으로 수리산을 표현했고 그 정점에 십자가로 성지임을 나타냈다. 산을 이루는 6개의 선은 기도, 희생, 보속, 극기, 봉사, 봉헌의 순교복음 정신을 상징한다.

▲굽이굽이 산길로 이뤄진 십자가의 길 14처.

▲십자가의 길 끝에 있는 최경환 성인 묘소와 순교 기념비.

▲최경환 성인 생가터에 황토로 지은 성당 내부. 독특한 복층구조를 지녔다.

 
 

 수원교구 수리산성지(전담 차재훈 신부) 순례를 마음 먹었다면 '성지'를 '순례'한다는 부담은 잠시 내려놓자. 가벼운 발걸음과 순교성인을 묵상하는 경건한 마음이면 충분하다. 가족들이나 가까운 이들과 함께 산에 오른다는 기분으로 나서도 좋다.

 안양 시내에 가까이 있는 수리산 성지는 대희년인 2000년과 2001년 신유박해 200주년 기념의 해를 지내며 전대사를 받았던 순례 성지로 지정됐다. 2000년 새롭게 문을 연 성지는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묘소를 비롯해 성당과 교육관, 십자가의 길, 성모동굴 등을 꾸며놓고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글=박수정 기자   사진=전대식 기자

▨ 수리산성지와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수리산성지는 유서깊은 교우촌이다. 여느 교우촌과 마찬가지로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아온 신자들이 수리산 자락으로 하나둘씩 모여들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성 최경환 가족도 예외는 아니다. 이성례 마리아와 결혼해 서울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던 최경환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와 탄압이 심해지자 강원도와 경기도 등지를 떠돌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정착했다. 최경환은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중 큰 아들은 우리나라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다.

 수리산에 정착해 살면서 수리산공소 회장을 맡은 최경환은 신자들이 신앙생활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또한 항상 가족들과 함께 기도를 바치는 성가정의 모범을 보이며 이웃들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포졸들이 수리산에 들이닥쳤다. 마을 신자 40여명과 함께 서울로 체포된 최경환은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곤장을 맞으며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최경환은 희미한 정신에서도 "내 평생 소원이 칼 아래서 주를 증거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 결국 숨을 거뒀고 유해는 수리산에 안장됐다.

 그후 최경환은 1925년 교황 비오10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한국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려 한국을 찾은 교황 요한 바오로2세로부터 성인품에 올랐다.

 안양 중앙본당 관할이었던 수리산성지는 1984년 시성식을 즈음해 성최경환 묘역에 순교 기념비를 건립하고 성지에 십자가의 길 14처와 제단을 설치, 성모동굴 등을 만들어나가며 성지개발을 이어왔다. 2000년 중앙본당 관할에서 순례사목을 위한 성지로 분리됐고 전대사를 받는 성지로 지정됐다.
 
▨ 성지 순례길과 다양한 성지 프로그램

 녹음 짙은 수리산성지에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는다. 하루 마음먹고 방문한 순례객부터 산에 왔다가 성당이 있어 잠시 들른 등산객들까지 각양각색이다. 그렇기에 성지는 모든 이들에게 항상 문을 열어놓고 몸과 마음의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수리산 성지는 지하철 1호선 안양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도 좋고 도보순례를 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걸어와도 좋을 거리에 있다. 수리산 입구에 자리한 성지에 들어서면 공기부터 확 달라진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조금 걸어올라가면 예수성심상이 두팔 벌려 순례객들을 맞이해준다.

 그 뒷편엔 성당으로 사용됐던 건물이 한채 서있다. 지금은 성최경환 기념관 및 교육관으로 꾸밀 예정에 있다. 대신 성당은 최경환 생가터에 황토집으로 옛 교우촌 초가 모습을 최대한 살려 아담하게 지어놨다. 성당 뒷편으로는 계단식 터가 넉넉히 이어져 풀벌레 소리와 상쾌한 산바람을 배경삼아 미사를 봉헌하기에 더없이 좋다.

 성지에선 매일 오전 10시 공동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11시에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굽이진 산길을 따라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올라가다보면 그 끝엔 성 최경환 묘와 성모동굴이 보인다. 신자들이 성인 묘소 참배를 통해 십자가의 길 기도로 경건해진 마음을 다시한번 가다듬을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이곳에도 야외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갖춰놨다.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뒤 간단한 성지소개를 받고 점심식사를 하고나면 오후엔 성지를 좀더 둘러보거나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하거나 자유롭게 순례를 하면된다. 하루 성지순례 코스로 제격이다. 등산길도 시간대별로 다양하게 나 있어 미사 때 들었던 성서 한구절을 되새기며 산에 올라도 좋다.

 성지는 날마다 미사와 성시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고 있다. 매주 수요일에는 연옥영혼을 위한 미사가 봉헌되며, 목요일 밤 9시부터 12시까지는 성시간이 이어진다. 금요일은 참회의 날로 오후 1시30분부터 십자가의 길 기도를 시작하며 이후 참회미사를 봉헌한다. 이날은 또한 상설고해소를 열어놓는다. 교우촌을 이뤘던 성가정성지인 만큼 토요일에는 가정성화를 위한 미사가 봉헌되며 매월 첫째 토요일에는 가정성화와 관련된 특강도 마련해놨다.

문의 : 031-449-2842, 평화신문 기자   pbc@pbc.co.kr 

 

성지 전담 차재훈 신부

 

"옛 교우촌 모습 되살리고 싶어요"

 

 "수리산성지가 간직해온 옛 교우촌 모습 되살리고 싶습니다. 최경환 성인이 공소회장으로 활동하며 살던 그 시설 그 모습 그대로 말입니다."

 수리산성지를 지키며 최경환 성인을 모시며 살게 된 것이 하느님의 큰 은총이라고 말한 차재훈 신부는 "수리산성지가 교우촌이었다는 사실보다는 최경환성인 한분에게만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어 안타깝다"면서 "부인인 이성례 마리아와 그 가족들 그리고 이곳에 살았던 교우들 삶의 흔적과 신앙생활에 더 관심을 갖고 이들 삶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차 신부는 "순교 사실도 중요하지만 순교하기까지 지키며 믿어온 신앙을 기억해야한다"고 강조하며 "수리산성지를 찾은 이들이 성지 곳곳에서 그런 신앙과 순교열정을 느끼고 갈 수 있도록 성지를 개발하겠다"고 덧붙였다.

 차 신부 계획은 현재 최경환 성인 생가터에 마련된 성당에서 엿볼 수 있다. 초가형태를 띄고 황토로 지은 성당을 보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느낌이다. 차 신부는 수리산성지에서 옛 교우촌 생활 체험이 이뤄질 수 있도록 초가 두어채를 더 지을 생각이다.

 "신자들이 가족단위로 성지에 와서 초가에 앉아 옛 기도문을 바치고 교우들이 살았던 그 생활을 재연해보는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지금은 성지에 들렀다가지만 나중엔 신앙생활 체험을 하고 돌아가는 성지로 만들 예정입니다."

 차 신부는 "내년쯤이면 최경환 성인과 이곳 교우촌에 대한 학술연구회도 열며 성지개발에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성례와 아들들 삶

 

젖먹이까지 옥살이... 막내는 끝내 굶어 죽어

 

<=  (사진설명)
최경환성인 가족이 마을 어귀에 앉아 기도를 바치고 있는 그림. 옛 교우촌과 수리산을 볼 수 있다.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단칼에 하늘나라로 가도록 해주십시오."

 누더기 옷, 다 헤진 짚신, 누가봐도 거리 아이들 같은 4형제가 망나니를 찾아가 하루종일 동냥으로 얻은 돈 몇푼과 쌀자루를 내밀며 굵은 눈방울을 뚝뚝 떨궜다. 망나니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다음날, 망나니는 이성례가 끌려 나왔을 때 아이들이 부탁한대로 단칼에 머리를 내쳤다. 이를 먼 발치서 바라본 아이들은 저고리를 벗어 하늘로 던지며 신앙을 지킨 어머니 순교를 기뻐했다.

 성 최경환 부인 이성례 마리아도 성인 못지 않은 독실한 신자였다. 마지막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참수를 당해 순교했지만 성인품에 오르지 못한 것은 아이들을 차마 굶겨 죽일 수 없어 배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큰 아들이 사제가 되려고 유학길에 올랐다는 사실에 성최경환 가족은 3살바기 젖먹이 아들까지 모두 옥살이를 해야했다. 그러다 막내아들이 굶어 죽자 이성례는 나머지 자식들도 굶겨 죽일 수 없어 배교하겠다며 풀려나왔다.

 하지만 차마 신앙을 저버릴 수 없었던 이성례는 얼마되지 않아 아이들만 남겨둔 채 다시 감옥으로 들어갔다. 이때 아이들이 찾아와 목놓아 울며 어머니를 찾았지만 이성례는 또 마음이 흔들릴까 아이들을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평화신문 기자   pbc@pbc.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