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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성지(국내)

고촌성당에 모셔져 있는 송해붕(세례자요한) 선생을 아시나요?

by 세포네 2007. 4. 15.

 

 

옛 고촌공소의 모습과 송해붕 선생

고촌공소는 일찍이 송해붕 세례자 요한 선생을 통해 가톨릭 신앙이 꽃피어난 곳으로서 의미가 깊다.
고촌지역에 천주교가 전해진 것은 1901년경이었다. 그 후 1947년 송해붕이 야학을 운영하면서 본격적인 전교 활동을 펼쳐 공소 설립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49년 송해붕은 교회 건물을 건축하고자 하였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강습소 명목으로 건물을 건립하였고, 이 건물이 고촌공소로 이어졌다.
맨 위 사진은 초기 공소의 모습이며 공소 옆 종탑의  종은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그 아래 그림은 초기공소의 모습을 그린 작자미상의 작품이며, 아래 사진 2장이 공소를 설립한 송해붕 선생과 현재 보관되어 있는 종 사진. 오른쪽 사진은 초기 공소 건물의 대들보로서 공소가 성당으로 승격되어 철거하게 되면서 현재 대들보만 성당 한 켠에 보관되어 있다.

 

두번째 사진은 1954년 고잔공소를 짓기 전 공소로 사용하였던 이순이 할머니의 옛 자택으로 1953년 노기남 주교와 촬영한 견진기념 사진이다. 이순이 할머니가 고잔으로 시집 올 당시 7가구의 신자 가족이 있었으며 후에 고잔공소가 생기기 전까지 신자 집에 모여 교리 공부와 공소 예절을 하였다.(당시 이순이 할머니의 남편이 제3대 공소회장 김상희 아우구스티노이다.)

고촌에서 송해붕 선생이 강의를 하러 오면 모든 신자들이 모여 한 말씀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들었고, 동네 신자들의 대소사에 모두 모여 밤새 기도를 해줄 만큼 이웃간의 정이 깊었다. 4대 축일에는 새벽부터 밥과 반찬을 준비하여 모든 신자 가족들이 반나절 가량을 걸어가 답동 성당에서 미사 참례를 하였다. 옛분들의 신앙생활은 현재 우리들에게 잔잔한 감동과 교훈을 준다.

 

▨ 송해붕(세례자요한)
1926년 경기도 부천구 계양면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모태 신앙을 갖고 태어났다. 1944년 4월 덕원신학교에 편입해 사제가 되려고 공부를 하던 중 1945년 광복 이후 신학공부를 포기하고 김포 고촌 은행정 마을로 들어가 야학을 운영하며 활발한 전교 활동을 벌였다. 1950년 6ㆍ25 전쟁 당시 천주교가 마을에 전파되는 데 반감을 가진 주민 일가의 밀고로 공산주의자 몰려 총살형을 당했으며, 유해는 현재 고촌성당에 안치돼 있다.

 

 

 

 

 

 인천교구(교구장 최기산 주교)가 경기도 김포지역 복음화 사도이며 6ㆍ25 전쟁 때 순교한 평신도 선교사 송해붕(세례자 요한) 시복시성추진위원회를 구성, 시복시성 청원을 위한 공식 절차에 돌입했다.

 인천교구는 최근 총대리 이학노 몬시뇰을 위원장으로 하는 시복시성추진위를 구성하고, 시복시성 안건을 추진할 청구인(actor)에 차동엽(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장) 신부, 시복시성 안건을 처리할 청원인(postulator)에 정광웅(교구 가정사목국장) 신부를 각각 임명했다.  이미 성인반열에 오른 103위 성인과 현재 시복시성사업을 추진 중인  박해시대 순교자 '하느님의 종 윤지충 등 123위' 외에 한국교회가 일제 강점기와 6ㆍ25 전쟁 등 근대 이후 순교자 시복시성 및 현양사업을 구체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처음이다. 교구는 올해 송해붕에 관한 문헌과 자료 발굴, 증언 채록 등 시복시성 청원을 위한 기초자료 수집 및 검증에 중점을 두는 한편 그의 일대기를 담은 「스물넷, 못다 사른 불꽃」과 자료집을 제작ㆍ배포하는 등 구체적 시복시성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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