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 때 교우들의 피난처이고 처형지이며
유해가 묻혀 있는 완벽한 순교 성지
대구에서 북쪽으로 24Km쯤, 행정구역으로는 경상 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동에 자리한 한티는 산골 중에서도 깊은
산간이다. 산줄기로 치면 팔공 산괴의 맥에 걸쳐져 있고 해발 600m를 넘는 이 심심 산골은 박해 때 교우들이 난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요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완벽한 순교 성지이다.
예로부터 대구를 지키는 군사적 요새 팔공 산괴의 주령인 인봉에서 가산까지는 20km 정도로, 한티는 가신과
주봉인 팔공산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가산산성(사적 216호)은 임진왜란 이후 대구를
지키는 외성으로 난이 일어날 때마다 인근 고을 주민들이 피난했던 내지의 요새였다. 한티 역시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나온 교우들이 몸을
숨기고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한티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인근의 신나무골과
비슷한 때인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후에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살지
않았나 추정된다. 하지만 매우 일찍부터 한티에는 교우들이 자리를 잡아 대구와 영남 지방 교회의 터전이 돼 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1837년 서울에서 낙향해서 신나무골에 얼마간 살았던 김현상 요아킴 가정이 1838년과 1839년 기해박해 때
신나무골보다 더욱 깊은 산골인 인근의 이곳 한티에 와서 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그의 가족들은 1860년 경신박해 때까지 이곳에 살다가 대구로
나가서 대구읍내 첫 신자 가정들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초창기 대구교회 창설에 큰 공을 세웠다.
1860년 경신박해로 뿔뿔이 흩어진 신자들은 박해가 뜸하자 다시 모여들어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성장한다. 그리하여
1862년도 베르뇌 주교의 성무 집행 보고서에는 "칠곡 마을의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는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수차례의 박해를 간신히 넘긴 한티 마을은 마침내 1866년 병인년의 대박해로 '최후의 날'을 맞는다.
1868년까지 3년간에 유례없이 혹독하게 이루어진 병인박해는 평화롭던 마을을 순신간에 피바다로 만들어 버렸고 수십 명의 신자들이 한자리에서
몰살을 당하는 비극을 남겼다. 첩첩 산중 길을 가다 보면 옹기 조각, 사기 조각이 발길에 채이는 한티 성지는 수십 명을 헤아리는 순교자들이
무더기로 처형된 비극의 현장으로 군데군데 그들의 묘가 산재해 있다. 이들 중에서 이름과 그 행적이 밝혀진 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묘비가 세워진
대구 날뫼 출신 서태순, 이 공사가 등과 박해를 피해 신나무골로 피신했다가 다시 한티의 옹기골에 숨어들었던 배손의 일가족, 조가롤로와 부인 최
발바라, 동생 조아기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무명 순교자로 이름을 남기지 않고 있다.
한티 마을 입구 송림사 앞쪽에는 대구 대교구가
운영하는 '성가 양로원'이 있는데 순례자들은 대개 이 앞에서 발을 멈추고 묵주의 기도를 시작, 걸어서 한티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는 1983년
피정의 집이 건립되었다. 대구 시내에서 이곳 피정의 집까지는 포장 도로를 말끔하게 닦아 두었고 팔공사 관광 도로가 바로 한티를 지난다.
칠곡(漆谷)군 지천(枝川)면 연화(蓮花)동에 있는 또 하나의 사적지인 신나무골에서 한티까지의 30리 산길은 도보 순례 코스로 아주
적당하다.
한티와 신나무골에 남은 신앙
을해박해와 정해박해로 흩어지게 된 경상도 북부의 교우촌 신자들은 저마다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나서야만 했다. 북부의 상주와 문경은 물론 남부의 양산, 울산, 밀양 등에 있는 산간 지대가 바로 그들이 찾은 새로운 은거지였다. 칠곡의 한티와 신나무골 교우촌도 이 무렵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혜의 은거지로 손꼽히는 '한티'(칠곡군 동명면 득명동)는 대구에서 5번 국도를 따라 군위로 향하다가 시군 경계를 벗어나자마자 우회전하여 동명 저수지를 안고 돈 다음 11km 정도를 올라가면 나온다. 북서쪽으로는 가산(해발 901m)을, 남동쪽으로는 팔공산(해발 1193m) 자락을 안고 있는 이 곳은 그야말로 내지의 요새로, 박해자와 밀고자들의 추적을 따돌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교우들은 1850년대 이후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순방을 받게 되면서 다시 신앙의 활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티의 교우들은 1860년에 불어 닥친 경신박해로 다시 한 번 혼쭐이 난 뒤에야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 경상도 지역의 사목을 맡게 된 성 다블뤼 주교는 1862년 교구장인 성 베르뇌 주교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 있는데, 이 곳에서는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습니다."("한국 천주 교회사" 하, 340면)라고 적고 있다. 바로 한티 교우촌을 지칭한 것이다.
같은 칠곡군에 있으면서도 '신나무골'(지천면 연화동)은 한티에 비해 찾기 쉬운 곳에 있다. 왜관에서 4번 국도를 따라 5km 남짓 대구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기 때문이다. 이 곳에 새 터전을 잡은 교우들은 박해가 있을 때마다 한티 쪽으로 피신을 갔는데, 경신박해 때는 칠곡에 거주하던 이선이(엘리사벳) 가족이 신나무골로 피신했다가 다시 한티로 피신하던 중에 체포되어 아들 배도령(스테파노)과 함께 포졸들이 가져온 농가의 작두날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 때 배교하고 살아남은 엘리사벳의 남편은 뼈저리는 아픔 속에서도 모자의 시신을 이 곳에 묻었다가 훗날 부인의 시체만을 찾아내 선산이 있는 칠곡 안양동으로 이장하였다.
한티와 신나무골 교우촌에 은거해 살던 신자들은 병인박해로 다시 한 번 수난을 겪게 되었다. 그 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이 곳은 대구 본당 설립의 전초 기지가 되었으며, 경상도의 첫 담임 신부로 임명된 로베르 신부에게 첫 본당 중심지로 설정되었다. 이러한 의미를 기리기 위해 왜관 지역에서는 1973년부터 이 곳을 사적지로 개발하기 시작하여 1977년에 선교 기념비를 건립하였고, 1984년에는 왜관 성 베네딕토 수도회의 주선으로 칠곡에 있던 이선이(엘리사벳)의 무덤을 옮겨 와 안장하였다. 한편 한티에는 그 후 유명·무명 순교자들의 묘역이 조성되고, 1983년에는 피정의 집이 세워지면서 새로운 신앙의 안식처가 되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52호(2000년 1월호), pp.90-91]
조 가롤로는 상주의 구두실이 고향으로 그의 집안은 1839년이래 정권을 장악했던 풍양 조씨로, 그들은 1839년(기해박해)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는 박해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으므로 문중이 얼마나 천주교인을 미워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 가롤로가 천주교를 믿었으므로 그는 문중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친척들이 집을 불살라 버렸고 정든 고향에서도 살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가족들은 3년 동안 충청도 황간과 상촌 등지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칠곡 한티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움막을 짓고 그 속에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며 숯을 굽기 시작하였다. 그 후 한티로 피난 오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주일이면 신자들과 함께 자기 집에서 열심히 기도하며 신앙 생활에 충실하던 그는 신자들을 지도하는 회장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티 부락에 열심한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서익순과 서태순 형제는 증조부 서광수 대(代)부터 하느님을 믿어온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충주 장원에서 살다가 박해를 피해 강원도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어 1857년 상주에 도착한 이들은 2년간 살다가 1859년 장조카 서상돈 아우구스티노가 살고 있는 대구로 왔다.1866년 경상도에서 전교하던 리델 신부가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대구에 와서 박해에 관한 소식을 전하자 신자들은 흩어져 피난을 갔는데, 서태순은 문경 한실로, 그의 형 서익순 가족과 서상돈 가족은 한티로 피난을 갔다. 서태순과 부인 김데레사와 7세된 남자아이는 1866년 문경에서 잡혀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조카 서상돈이 장사를 하기 위해 오가면서 서태순의 옥바라지를 해 주었는데, 한번은 서태순이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옥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참혹한 광경에 이후 서상돈은 평생 쌀밥을 먹지 않았다 한다. 서태순 베드로가 1866년 12월 18일에 34세의 나이로 순교하자 그의 시신을 형 서익순이 한티에 안장하였다.
미사시간
평일미사 매일 오전 7시(피정자의 프로그램에 따라 조정)
주일미사 하절기(4월∼10월) 오전11시, 동절기(11월∼익년3월) 오후2시
후원회 월례미사 매월 넷째 월요일 오전 11시 대구대교구청내 성모당에서 미사 봉헌
순례미사 단체 순례의 경우 사전 요청시 미사 봉헌 가능(관장 신부님 집전),
신부님 동행시 언제든 미사 봉헌 가능
■ 찾아가는 길
'[교회와 영성] > 성지(국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주] 배론 (0) | 2006.03.27 |
---|---|
[서울] 절두산 (0) | 2006.03.27 |
[대전] 공세리 성당 (0) | 2006.02.14 |
[대전] 갈매못 (0) | 2006.02.12 |
[인천] 반주골 - 이승훈 베드로 (0) | 2006.02.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