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놀에 살아나는 순교의 피
충남 대천과 광천 중간 지점에 주포(周浦)가 있고 여기서 서해안을 향해 30리쯤 달리면 바다와 만나게 된다. 충청도 수영(水營)에서도 바닷가로 더 나가 광천만이 깊숙이 흘러 들어간 초입, 서해를 내다보며 자리한 순교 성지 갈매못. 한국 가톨릭 최고의 성지로 꼽을 만한 곳이다.
충남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 바닷가에 있는 이 순교 성지는 서해안 지역에서 유일하게 개발돼 있는 성지라는 점에서 꼭 한번 순례해 볼 만한 곳이다. 특히 일몰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순교의 현장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갈매못은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안 주교, 오매트르 신부, 위앵 민 신부, 황석두 루가, 장주기 회장 등 다섯 명과 5백여 명의 이름 모를 교우들이 순교한 곳이다. 1845년 조선 땅에 입국한 다블뤼 주교는 조선 교구 4대 교구장이었던 베르뇌 주교의 순교로 1866년 3월 7일 제5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됐다가 4일 만인 11일 그의 복사였던 황석두 루가와 함께 내표 지방에서 체포됐다.
다블뤼 주교는 대원군과의 상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신자들이 마구 잡혀 처형되자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스스로 체포될 것을 결심한 뒤 다른 동료 선교사들에게도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 후 붙잡혔다. 다블뤼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들은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도 자진해서 잡혀 서울로 압송됐다.
그러나 때마침 고종이 병을 앓게 되고 국혼(國婚)도 가까운 시기여서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은 좋지 못한 징조라 하여 이들을 250여 리 떨어진 보령수영(保寧水營)으로 옮겨 처형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이들 네 명은 갈매못으로 향하는 250리 죽음의 행진을 떠나게 됐는데 여기에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 장주기가 합세, 모두 5명이 함께 자진해서 죽음을 향해 떠나갔다.
이들 세 성직자와 두 전교회장이 갈매못을 향해 가는 도중에 길목인 내포 땅 아산군 음봉면 길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마지막 설교를 한 다음 성가를 부르며 끌려갔다는 대목은 장엄하기 까지 하다. 그 때 그 바위는 지난 1973년 음봉 삼거리에서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광장으로 옮겨져서 '복자 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1984년 다섯 분 모두 성인품에 오른 후 '오성 바위'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이들 5인의 순교 성인 중 황석두 루가 성인의 유해는 가족들이 거두어 연풍에 안장했고 나머지 네 분의 유해는 사흘 뒤 사형장 부근에 매장됐다가 홍산으로 옮겨졌고 브랑 신부에 의해 일본 나가사키로 이장, 다시 1900년에 명동 대성당, 1960년대에 시성 시복 운동이 전재되면서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장됐다. 갈매못이 순교 성지로 눈길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1975년 9월 대전교구 대천 본당 주임이었던 정응택(요한) 신부가 순교 당시의 위치를 확인하고 순교복자 기념비를 세우면서부터이다. 그 후 1985년 9월에 다섯 분의 순교 성인 기념비와 야외 제단이 세워졌다. [편집자주 : 갈매못에는 현재 전담 사제와 수녀가 상주하며 순례객들의 방문을 안내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신리와 갈매못 - 성인들의 체포와 순교지
여사울이 초기 교회의 못자리였다면, '신리'(당진군 합덕읍 新里) 일대는 박해 후기의 사적지였다. 내포 공동체는 거듭되는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지만 끈질기게 복음의 생명력을 이어가면서 언제나 새로운 지도자들을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거더리(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출신의 성인 손자선(孫 토마스)을 기억하고 있다. 1866년에 공주 관아에서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한 분으로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 거더리와 붙어 있는 마을이 바로 신리이다. 현재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두 마을이 구분되어 있지만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나는 거더리와 신리는 결국 같은 지역으로, 성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체포되었던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었다.
다블뤼 주교는 1845년 10월, 한국에 입국한 이래 주로 내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한국 순교사와 교회사 자료 수집에 열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저 유명한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備忘記)가 이 곳 신리에서 작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1863년 주교의 거처에 화재가 발생하여 오랫동안 수집해 놓았던 귀중한 자료들이 타 버리고 말았다. 다행한 것은 다블뤼 주교가 그 전에 이미 순교사와 교회사를 정리하여 프랑스로 보낸 점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다블뤼 주교는 신리(거더리)에 있는 손치호(니콜라오) 회장 집에 머물고 있었다. 손 회장은 바로 손자선 성인의 숙부이다. 주교는 그 때 이웃에 있던 오매트르(Aumaitre, 吳) 신부와 위앵(Huin, 閔) 신부를 불러오게 하여 피신할 방도를 의논하고 헤어졌는데, 3월 11일 포졸들이 거더리로 몰려와 주교와 복사인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를 체포하고 말았다. 이어 위앵 신부가 멀지 않은 소재(예산군 봉산명 금치리)에서 체포되었고, 오매트르 신부가 거더리에 들렀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다블뤼 주교 일행은 서울로 압송된 후 몇 차례의 신문에 이어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 때 제천 배론에서 체포된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이 그들 일행에 포함되었다. 그런 다음 이들 5명은 새 처형 장소로 결정된 '갈매못'(보령군 오천면 영보리의 고마 수영)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에 순교하였다. 굳이 이 곳까지 순교자들을 끌고 와서 처형한 이유는 궁중에서 고종비(高宗妃)의 간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여사울의 이존창 생가 터와 신리의 주교 댁은 오랫동안 잊혀져 오게 되었다. 그러나 신리의주교 댁만은 인근 교우들 때문에 성 손자선이 태어난 곳이며, 다블뤼 주교의 거처라고 알려져 왔다. 이에 합덕 본당의 페랭(Perrin, 白) 신부는 1927년에 교우들의 협조를 얻어 이를 매입한 뒤 순교 기념비를 건립하고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당시가지도 신리 공소는 초가집이었으나, 훗날 지금과 같이 함석 지붕을 새로 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여사울은 내포 교회가 시작된 곳이며 신리는 내포 교회가 박해를 극복해 나가던 교우촌이었고, 갈매못은 성인들의 순교 터였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역사의 끈으로 이어져 왔으며, 그 끈은 오늘의 교회를 지탱해 주고 있는 생명선과 같은 것이 되었다. 체포되기 직전에 다블뤼 주교가 동료인 만주 교구장에게 쓴 1866년 3월 10일자 서한에서 순교자의 마지막 행로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선교사들이 체포되었습니다. 피할 길이 없습니다. 내 차례도 올 것이니, 제가 싸움터에서 견디어 낼 수 있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교회사 연구] 제2집, 1979년, 199면). [출처 : 차기진, 사목 248호(1999년 9월호), pp.116-117]
< 성 다블뤼 주교 프랑스 후손들 방한 >
프랑스 아미앵교구 방한단(대표 버나르드 가페)이 2004년 4월 20일 열흘간 일정으로 방한, 아미앵교구 출신으로 제5대 조선대목구장을 지낸 성 다블뤼(1818~1866, 한국명 안돈이) 주교의 사목현장과 순교성지 그리고 한국 문화 전반을 직접 체험했다.
서울대교구 갈현동본당(주임 용동진 신부) 초청으로 내한한 방한단은 아미앵 교구장 장 룰 부이에레 주교를 포함한 25명으로, 이들은 다블뤼 주교 사목거점이었던 대전교구 당진군 합덕면 신리공소와 갈매못성지를 찾아 다블뤼 주교의 신앙적 숨결을 직접 호흡하고. 미사를 봉헌하고 다블뤼 주교의 유품인 중백의(수단 위에 입는 흰 웃옷)를 기증하였다.
갈매못 성지측은 방한단 방문에 맞춰 이날 성 다블뤼 주교 성상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젊은 조각가 김송필(클라우드)씨가 '성 황석두루가 회장' 성상과 함께 6개월 간에 걸쳐 제작한 다블뤼 주교 성상은 높이만 220㎝ 크기로, 오른손으로 구원의 세례를 베풀고 왼손에는 소박한 나무 목장을 들고 있는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성지내 성당 정문 좌우에 세워졌다.
≫ 성 안 주교님이 바치신 기도 중의 하나 ≪
"주님, 핍박 중에 있는 교우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저들 불쌍한 형제들의 원을 들어주소서.
저들은 당신의 사랑을 원하나이다.
그러나 주님, 이땅은 지금 당신을 알고,
당신 말씀을 따르기에는 너무 벅찬 고난의 시기이옵니다.
핍박과 환란이 오늘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박해를 피해 집을 버리고,
논과 땅도 버리고 산으로 피했습니다.
그들은 고통 중에도 당신을 찾고 있사옵니다.
고통속에서도 당신 이름을 찬양하옵니다.
그들에게 빛을 주소서.
그들에게 용기를 주소서.
그들에게 지혜를 주시어
당신과 함께 님을 알기에 충분한 신덕을 주소서
당신 나라가 이땅에 임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아멘. "
▒ 언제나 몸 붉어져 (갈매못에서) <김영수> ▒
일렁여서 장엄한 바다 바라보며
드높아서 황홀한 하늘 바라보며
칼 받는 순간들마다
파도들 마구 뛰었을 것입니다
땅들 마구 뒤집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평선 더욱 밝았을 것입니다
지금 빈 터에는
하얗게 흰 옷인 듯 클로버꽃들 가득하고
멀리 해질녘 바다에는
어둠 뚫는 그리움이 예언처럼 붉습니다
오늘밤 나는
꿈에서라도 칼 한 번 받아볼까요
나는 언제 몸 붉어져
갈매못 이슬 하나로 서서
바다 마시며 바다로 출렁이고
하늘 마시며 하늘로 흐를까요
■ 순교자
◆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Daveluy) 주교(1817-1866)
한국 이름은 안돈이(安敦伊), 조선교구 제 5대 교구장.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는 한불사전, "신명초행", "영세대의"등 많은 번역과 저서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10여년에 걸친 각고 끝에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만들어내는 큰 업적을 이룩했다.프랑스 '아미앙'의 상류 가정에서 자란 관계로 한국 풍속에 익숙해지기가 퍽 어려웠고 더더욱 위장병과 신경통으로 고통이 심하였으나 굳은 의지로써 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고 한국말을 잘하고 또 보신탕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이었다. 그는 김대건 신부의 저 유명한 '라파엘호'를 타고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하여 전교 신부로 12년, 보좌주교로 9년, 그리고 제 5대 교구장으로 22일, 실로 20여 년 간 이 땅의 양떼를 위해 봉사하다 마침내는 순교의 영광까지 누렸다.
안 주교는 병인년 박해가 일어나자 3일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동반 순교자인 민 신부와 주교의 복사 황석두 루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너 포악한 형벌을 받았다. 때마침 왕이 병중이고 또 곧 결혼하게 되어 그의 처형은 서울 대신 충청도 수영 '갈매못'으로 결정되었다. 안 주교 일행(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장주기)은 곧 서울을 떠나 3월 30일 수영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형리들은 주교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했는데 마침 이날이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었으므로 안 주교는 그들의 계획을 반대하고 당일 사형집행을 굳이 요구하여 청대로 실행되었다.
형장인 '갈매못'은 수영에서 약 10리 떨어진 보령 지방의 강가인데 순교 장면의 목격자인 이 힐라리오는 "포졸이 맨 먼저 주교를 칼로 쳤다. 목이 완전히 베어지지 않고 반만 잘렸다. 주교의 몸이 한 번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렇게 망나니가 목을 반만 벤 다음 수사에게 자기의 수고 값으로 양 400꿰미를 요구했다. 수사는 주겠다고 승낙했다. 망나니는 다시 안 주교에게 다가가 한 번 더 목을 치니 안 주교의 목이 몸에서 완전히 떨어졌다"고 전했다. 안 주교의 그 때 나이는 49세, 그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 날 어쩌면 바로 그 시간에 순교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Aumaitre) 신부(1837-1866)
한국성은 오(吳),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66년 병인년에 순교한 프랑스인 선교사. 프랑스 '앙굴램' 교구 출신인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 신부는 1862년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인 1863년 6월 임지인 조선 땅을 밟았다. 그는 경기도 수원 근방 샘골에서 한국말을 익히고 곧 충청도 홍주의 '거더리'에서 전교에 종사했다. 그러나 1866년 박해가 일어나고 동년 3월 안 주교가 체포되자 한때 피신코자 배를 탔으나 거센 역풍으로 뜻을 못 이루고 다시 '거더리'로 돌아와 즉시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그는 동반 순교자인 안 주교, 민 신부 등과 함께 일단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충청도 수영 '갈매못'에서 3월 30일 처형되었다. 오 신부는 안 주교 다음 두 번째 칼날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였다.
◆ 성 민 루가 위앵 (Huin) 신부(1836-1866)
한국 성은 민(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프랑스 '랑그르' 교구 출신인 민 신부는 1861년 사제가 된 후 1865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는 도착지인 충청도 내포에 머물면서 안 주교로부터 한국말을 배운 후 홍주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안 주교의 지시로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악형을 겪은 후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형장이 충청도 수영으로 결정되어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3월 30일 수영에 도착, 그곳 '갈매못'에서 당일로 군문효수되었다. 그는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 품에 안겼다.
◆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1813-1866)
일명 '재건'으로도 불리는 성 황석두 루가는 충청도 연풍에서 양반집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성장하여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보러 상경하던 중,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했다. 그 후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이나 벙어리 행세를 해가면서 교리서적을 탐독하였고 그 결과 박대하던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였다. 이같이 뛰어난 덕행과 교리지식으로 그는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또 회장으로 활동했다. 또 고 페레올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 받고 독신생활을 하였다.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를 도와 교리서를 번역하여 교회서적 출판에도 참여했다. 1866년 3월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안 주교를 몇 십리나 따라가 결국 체포되어 주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3월 23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장주기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을 받고 54세로 순교했다.
◆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1803-1866)
일명 '낙소'로도 불리는 성 장주기 요셉은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재 경기도 화성군 양감면 요당리)에서 출생했다. 1826년 영세 입교한 후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로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여 회장직을 맡아보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게 하는 한편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토지의 농사일과 잔일을 맡아 했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에서 신 뿌르띠에 신부와 박 쁘띠니꼴라 신부가 체포될 때 그는 제천 부근의 '노럴골'로 피신했으나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참아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의 '거더리'에서 압송되어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루가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 그외 순교자들
◆ 박 베드로
박 베드로는 본디 충칭 신창 사람이라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도리를 배워 열심히 수계하더니 창말서 살 적에 무진년에 홍주 포교에게 잡혀 "네 천주학을 하느냐?" 묻거늘 "내 과연 성교를 하노라" 하매 즉시 잡아 본관에 가 문목한 후 수영으로보내어 진 친 곳에서 베어 죽이니 나이 34세더라. 증인은 면천 찻티 사는 그 아우 박 필립보이다 (증언록 130번 224쪽,치명일기 727번, 수영).
◆ 손치양 사도 요한
손치양 사도 요한은 기해년에 치명한 손 안드레아의 사촌이며 흥주 거더리에 살더니 무진년에 경포에게 잡혀 서울로 가 몇 달 동안 갇혔더니, 이에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묘 굴총하던 배 주인이라 하여 큰 죄인으로 잡아 수영까지 보내어 치명하니 나이 50세요, 때는 무진년 5월이라 증인은 재종손 요한이라. (증언록 85번 143쪽, 치명일기 728번, 충주)
◆ 이영중
본래 공주 서면 사람이라 무진년에 경포에게 잡혀 서울에 갇혔더니, 이에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때 태워 온 배의 주인이라 하여 손치양과 한가지로 수영까지 끌고가 효수하니 나이 45세더라 (치명일기 729번, 수영)
◆ 이 발토로메오
본디 충청 덕산 사람이라 그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수계하더니 병인년 군란 때 경포에게 잡혀가다 도망하였더니 경오년에 수원 포교에게 잡혀 수영으로 가 진터에서 참수되니 나이 24세더라 (증언록 130번 222쪽, 치명일기 730번, 수영)
◆ 임운필
임운필은 임 토마스(치명일기 636번 순교자)의 재당숙이라 여러 일가의 문장되므로 수하 사람을 잘 교훈하여 성교에 열심하더니 병인년 군난 때 모든 가족들이 많이 잡혀가 죽고 나미 많은고로 피하여 나가지 못하여 집에 있어 끝을 보려 하더라. 홀연히 수영 포교가 들어와 잡거늘 "내 집은 성교함으로 인하여 아랫사람들이 많이 죽고 나도 성교를 봉행하니 너희뜻대로 하라" 한즉 잡아 수영으로 가 수사가 문초한 후 즉시 교하여 죽이니 나이 70세라. 증인은 해미 마새 사는 그 재종손 임 베드로이니 나이 43세다. (증언록 )120번 237쪽)
미사시간
평일미사 (화 - 토) : 순례미사 봉헌 (순례 1주일전 예약 하면 오전 11:30분 순례미사 봉헌)
평일미사 (월)신부님과 함께 동반해 오시면, 성지에서 미사준비를 해드리고 미사를 봉헌하실 수 있습니다
주일미사 오전 8:00 (본당 신자들을 위한 미사), 오전 11:30 (순례자를 위한 미사)
■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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