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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성지(국내)

[서울] 당고개 성지

by 세포네 2006. 2. 10.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성지


당고개(堂峴, 원효로 2가의 문배산 자리)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 2가 만초천(蔓草川)변의 옛 이름이며 용산 전자상가에서 도보로 불과 5분 거리인 작은 언덕에 있다.
특히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던 곳으로 1839년(헌종 5)의 기해박해때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전국에서 200여 명이 순교하였는데, 이곳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참수되었다.

기해박해가 거의 끝나 가던 12월 27일(음력)과 28일에는 당고개에서 다시 한번 망나니들의 칼날이 10명의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당고개 순교지는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성지이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서 41명의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은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이곳 저자거리를 중심으로 장사를 하던 장사치들은 음력설 대목장에는 처형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서소문 밖 형장을 피해 조금 한강가로 나간 곳이 당고개이다. 이곳은 1840년 1월 31일과 2월 1일 양일에 걸쳐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기해 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곳이다.


특히 이들 가운데 어린 자식을 거느린 세 어머니는 천주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 모성애까지도 초월하고 순교의 월계관을 차지했다.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서 박종원, 홍병주·영주 형제, 손소벽, 이경이, 이인덕, 권진이, 이문우, 최영이 등 9명이 성인품에 올랐다. 하지만 당고개의 순교자이면서 최경환 성인의 부인이요,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만은 시복 조서에서 제외돼 성인품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124위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에는 포함되어 있다.


본래 부모와 함께 어린 아이를 투옥시키는 일은 국법에도 없었으나 큰아들 최양업을 사제로 봉헌하기 위해 외국에 유학 보낸 이 집에 대해서는 예외였다. 어머니와 함께 옥에 갇힌 아이들은 국법에도 없는 일이라 밥도 나오지 않고 어쩌다 한 덩어리 밥이 나오면 어린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굶기 일쑤였다. 세 살짜리 막내는 그나마도 얻어 먹지 못해 빈 젖을 빨다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어린 자식의 죽음을 눈앞에서 당한 어머니는 자칫 네 자녀를 모두 죽이고 말 것만 같아 짐짓 배교하겠노라고 하고 옥을 나왔다. 지극한 모성애와 극도의 슬픔 속에서 그는 어쩔 수 없는 인간적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성례 마리아는 아이들과 문전 걸식으로 목숨을 부지하다가 남편 최경환이 홀로 감옥에서 겪을 고통을 생각하고 아이들이 동냥 간 사이 다시 남편 곁으로 돌아와 다시금 갇힌 몸이 된다.


6세부터 15세까지 네 형제가 부모를 가둔 옥에 찾아와 울부짖자 철이 든 맏이 희정은 어머니가 다시 배교할 것을 우려해 어린 동생들을 달래 발걸음을 돌린다. 그후 동냥한 음식을 틈틈히 부모에게 넣어 주면서 이성례가 참수되기 하루 전 어린 형제들은 동냥한 쌀과 돈 몇 푼을 메고 희광이를 찾는다.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한칼에 하늘 나라에 가도록 해주십시오."
이에 감동한 희광이들은 밤새 칼을 갈아 당고개에서 그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먼 발치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본 어린 4형제는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용감한 어머니의 순교를 기뻐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  나의 질그릇에도 (당고개에서)  <김영수> ▒

          설레면서 살아야 설레면서 죽고
          설레면서 죽어야 영원히 사는 것입니까
          하늘 닿은 기념탑 꼭대기에서
          아리게 들려오는 얘기, 나의 질그릇에도
          생명 익는 햇살 있기를
          나는 서늘히 눈을 감고
          순간에 씻기는 영원 내다 봅니다,
          내가 떠돌이의 추억으로
          흔히 건져 올리는 건
          설음과 미움의 가시 돋친 바람들이라면
          여기 당고개 드높은 언덕에서
          이제는 말없이 돌아올 때도 되었습니다
          어느 약속인들 뜨겁지 않을까만
          모든 것 버린다는 약속보다
          깊은 눈물 있을까요
          깊은 환희 있을까요
          나는 언제 죽음으로 피 걸러내며
          사랑에 영원히 닿을까요
                                

■ 순교자

 



◆ 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노(1792-1840, 회장, 기해박해 때 참수)

'이선'으로도 불리던 박종원(朴宗源) 아우구스티노는 서울 중인 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범 라우렌시오 주교의 입국 후, 회장직을 맡아보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 일에 헌신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어서 피신했다. 피신해 있으면서도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교우들과 연락하며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주다가 피신한 지 8개월 만인 10월 26일 잠시 집에 들렀다가 체포되었다. 이튿날 그의 아내 고순이 바르바라도 체포되어 같은 옥에 갇히게 되었다. 박종원은 포청에서 아내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했고 또 아내와 함께 혹형과 고문을 견디어 냈다.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堂峴)에서 48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 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노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 본당 모든 교우들이 전교에 대한 열의를 지니도록 빌어 주소서.

◆ 성 홍병주(洪秉周) 베드로(1798-1840)

명문 양반의 후예로 서울에서 태어난 홍병주 베드로는 1801년 신유박해로 할아버지 홍낙민(洪樂敏)이 순교하자 아버지를 따라 충청도 서산(瑞山)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자랐고, 대대로 이어온 신앙을 물려받아 독실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동생 홍영주 바오로와 함께 충청도 내포(內浦)지방의 회장이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9월 말 홍병주는 동생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몇 차례의 형문을 당한 후 형조로 이송되었는데, 친척인 형조판서는 인정상 직접 신문하지 않고 하관(7출)에게 모든 수단을 다 써서 홍병주, 홍영주 형제를 배교시키라고 명하여 홍병주는 가장 지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홍병주는 끝까지 버텨냈고, 결국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42세의 나이로 동생보다 하루 먼저 순교했다. 성 홍영주(洪永周) 바오로는 동생이다.

○ 성 홍병주 베드로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 교우들이 신앙적인 형제의식을 갖도록 빌어 주소서.

◆ 성 홍영주(洪永周) 바오로(1801-1840)

명문 양반의 후예로 서울에서 태어난 홍영주 바오로는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의 여사울에서 자랐다. 대대로 이어온 신앙을 이어받아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형 홍병주 베드로와 함께 충청도 내포지방의 회장으로 교회 일에 헌신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서양 신부들이 체포된 후 9월 말에 이르러 홍영주는 형과 함께 서양 신부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죄로 체포되었다. 마침내 1840년 2월 1일, 하루 먼저 순교한 형의 뒤를 따라 2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39세였다. 성 홍병주(洪秉周) 베드로는 형이다.

○ 성 홍영주 바오로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 사이에 직장이나 학력의식에 따른 불목이 없도록 빌어 주소서.

◆ 성녀 손소벽(孫小碧) 막달레나(1801-1840)

서울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손소벽 막달레나는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가 순교하고 또 어머니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7세 때 최창흡 베드로와 결혼하면서 냉담했던 생활을 떠나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했고,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퍼지자 남편과 함께 대세와 성체성사를 받고부터는 더욱 더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6월 손소벽은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사위 조신철(가롤로)이 북경에서 가져온 교회 물건의 출처 때문에 주뢰 3차, 태장 260도를 맞는 혹형을 당해야 했고, 형조에서도 3차의 형문을 당해야 했다. 마침내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39세로 순교했다.
성 최창흡(崔昌洽) 베드로는 남편이며, 성녀 최영이(崔榮伊) 바르바라는 딸, 성 조신철(趙信喆) 가롤로는 사위이다. 성 최창흡(崔昌洽) 베드로, 성녀 최영이(崔榮伊) 바르바라와 함께 체포되었다.

○ 성녀 손소벽 막달레나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어떠한 시련에서도 주님을 외면하지 않는 신앙정신을 갖도록 빌어 주소서.

◆ 성녀 이경이(李瓊伊) 아가타(1813-1840)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경이 아가타는 시골에서 교우가정에서 태어났다. 혼기에 이르러 어떤 내시에게 속아 결혼했으나 곧 집으로 돌아왔다. 범 라우렌시오 주교는 그 결혼을 무효화시켰다. 그 후 아버지를 여의고 생계가 막연해지자 어머니를 시골에 사는 외삼촌에게 맡기고 상경하여 한영이(막달레나), 권진이(아가타) 모녀의 집에서 살며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7월 17일 한영이, 권진이 모녀와 함께 체포되었다. 평소 권진이의 아름다움을 탐내던 밀고자 김순성의 간교로 한영이만 포청에 갇히고 이경이는 권진이와 사관청(仕官廳)에 갇히게 되었다. 사관청에서 포졸 하나가 권진이를 납치하려 하자 이경이는 권진이와 사관청을 탈출했으나 얼마 안되어 숨어 있던 교우의 집에서 다시 체포되었고 마침내 1840년 1일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27세의 나이로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성녀 한영이(韓榮伊) 막달레나, 성녀 권진이(權珍伊) 아가타와 함께 체포되었다.

○ 성녀 이경이 아가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가 육신의 허영을 물리칠 수 있는 용기를 갖도록 빌어 주소서.

◆ 성녀 이인덕(李仁德) 마리아(1818-1840)

언니 이영덕 막달레나와 함께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인덕 마리아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 해 6월 어머니, 언니와 함께 체포되어 이듬해 1월 31일 당고개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22세의 꽃다운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했다. 성녀 이영덕(李榮德) 막달레나는 언니이다. 성녀 이 가타리나, 성녀 조 막달레나, 성녀 이영덕(李榮德)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었다.

○ 성녀 이인덕 마리아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수도자들의 꾸준한 정덕 수행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녀 권진이(權珍伊) 아가타(1819-1840)

서울에서 태어난 권진이 아가타는 어려서 아버지 권 진사가 임종 대세를 받고 죽으면서 남긴 유언에 따라 어머니 한영이 막달레나와 함께 입교했다. 13세 경 결혼했으나 남편의 집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남편의 친척인 정하상 바오로의 집에서 살았다. 1833년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입국한 후부터 신부의 시중을 들었다. 그 후 유방제 신부가 조선을 떠나게 되자 어머니에게 돌아가, 한 집에 살게 된 이경이 아가타와 함께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7월 17일 한영이, 이경이와 함께 체포되었다. 평소 권진이의 아름다움을 탐내던 밀고자 김순성(일명 여상)의 간교로 어머니 한영이만 포청으로 끌려가고, 권진이는 이경이와 사관청(仕官廳)에 갇히게 되었다. 사관청에서 한 포졸이 권진이를 납치하려 하자 권진이는 이경이와 함께 사관청을 탈출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숨어 있던 교우의 집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도망쳤던 죄로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 했으나 권진이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40년 1 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21세의 아까운 나이로 순교하였다. 성녀 한영이(韓榮伊) 막달레나는 어머니이다. 성녀 한영이(韓榮伊) 막달레나, 성녀 이경이(李瓊伊) 아가타와 함께 체포되었다.

○ 성녀 권진이 아가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회안에 새로 태어나는 교우 가정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이문우(李文祐) 요한(1809-1840)

일명 '경천'으로도 불리는 이문우 요한은 경기도 이천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5세 때 양친을 여의고 서울의 오 바르바라라는 여교우에게 입양되어 성장했다. 독신생활을 원하였으나 양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과 순종으로 양어머니의 뜻에 따라 결혼했고, 몇 년 후 아내와 두 어린 자녀가 사망하자 주위에서의 재혼 권유를 거절하고 독신으로 살면서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는 한편 주교를 보좌하며 지방을 순회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사방에서 희사를 모아 체포된 교우들을 돕고, 박해 상황을 주교와 신부들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던 중 11월 11일 자신도 체포되었다. 이 때 "주님께서 특별한 은총으로 나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부르심에 대답하지 않을 수 있는가?"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고, 오히려 당황해 하는 포졸들을 재촉해서 포청으로 끌려갔다. 포청과 형조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참아낸 끝에 사형을 선고받고, 1840년 2월 1일 당고개에서 2명의 교우와 함께 31세의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 성 이문우 요한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모든 교우들이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활성화하도록 빌어 주소서.

◆ 성녀 최영이 바르바라(1818-1840, 부인, 기해박해 때 참수)

서울에서 태어난 최영이(崔榮伊) 바르바라는 어려서 아버지 최창흡 베드로와 어머니 손소벽 막달레나의 모범을 따라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20세 때, 상처한 조신철(가롤로)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영이는 친정으로 피신해 있다가 6월에 친정 식구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체포될 때 어린 아들을 생각하는 모정으로 인해 배교할까 두려워 아들을 친척에게 맡겼다. 남편이 중국에서 가져온 교회 서적과 성물 때문에 포청에서 두 차례의 주뢰와 태장 260도를 맞는 혹형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고 형조에서도 3차의 형문을 이겨내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1840년 2월 1일 2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22세의 몸으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성 조신철(趙信喆) 가롤로는 남편, 성 최창흡(崔昌洽) 베드로는 아버지, 성녀 손소벽(孫小碧) 막달레나는 어머니이다. 성 최창흡(崔昌洽) 베드로, 성녀 손소벽(孫小碧)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었다.

○ 성녀 최영이 바르바라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회내 모든 가정주부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 (1801-1840)

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는 내포 지역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의 집안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성처럼 씩씩한 정신을 지녔던 그녀는 18세 때 성 최경환(프란치스코)과 혼인하여 홍주 다락골의 새터(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살면서 1821년에 장남 최양업(토마스)을 낳았다. 마리아는 언제나 집안 일을 지혜롭게 꾸려나갔고, 일가 친척들이 불화 없이 지내도록 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나이가 어린 남편을 공경하고 그의 말에 순종하면서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나갔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는 가족과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으며, 박해의 위험이 있자 다시 강원도를 거쳐 경기도 부평,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 3동)로 이주하였다. 그 동안 장남 최양업은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떠났다.
이처럼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자주 이주하는 가운데서도 마리아는 모든 어려움과 궁핍을 기쁘게 참아냈다.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서 칭얼거릴 때면, 요셉과 성모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 산을 오르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인내심을 갖도록 하였다. 또 수리산에 정착한 뒤로는 남편을 도와 이 마을을 교우촌으로 일구는 데 노력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남편 최경환이 한양을 오가면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묻어주고 교우들을 돌보자, 마리아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식들을 보살폈다. 그러던 중 포졸들이 마침내 수리산 교우촌으로 들이닥쳤다. 이때 그녀는 음식을 준비해서 포졸들을 대접한 다음, 남편 일행의 뒤를 따라 어린 자식들과 함께 한양으로 향하였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마리아는 남편이나 다른 자식들과 격리되어 젖먹이 스테파노와 함께 여인들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문초와 형벌을 받아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으나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마리아는 이러한 육체적인 고통보다 갓난아기에 대한 모성애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느껴야만 하였다. 젖은 나오지 않았고, 먹일 것이 없어서 두 살밖에 안 되는 스테파노가 굶어 죽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남편이 매를 맞다가 순교하고, 스테파노가 더러운 감옥 바닥에서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던 그녀는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마리아는 자신의 본래 마음과는 달리 현세적인 구원을 도모하려는 그릇된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내 그녀는 다시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자하심으로 당신 여종의 나약함을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베푸셨다. 형조에 이르자, 이성례 마리아는 용감한 신자들의 권면으로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 이제 그녀는 이전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쳤고, 재판관 앞으로 나가 전에 한 말을 용감하게 취소하였다. 또 모성애를 비롯하여 모든 유혹을 용감히 이겨냈으며, 막내 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하였다. 이 무렵 그녀의 둘째 아들 최의정(야고보)이 한 달 이상 감옥을 오가면서 모친과 신자들의 시중을 들어주었다.
마리아는 관례대로 마지막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감옥으로 찾아온 자식들에게 “형장에는 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녀는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말아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1840년 1월 31일(음력 1839년 12월 27일), 마리아는 동료 신자 6명과 함께 형장으로 정해진 당고개로 끌려나갔다. 그런 다음 영광스럽게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 순교 당시까지 그녀는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모성애 때문에 잠시 배교하여 성인이 되지 못한 이성례 마리아와 아들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하루빨리 시복시성되도록 기도해야겠다.

○ 성녀 권진이 아가다, 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성녀 손소벽 막달레나, 성녀 이경이 아가타, 성 이문우 요한, 성녀 이인덕 마리아, 성녀 최영이 바르바라, 성 홍병주 베드로, 성 홍영주 바오로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박종원, 홍병주, 홍영주, 이문우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전교에 대한 열의를 키우도록 빌어 주소서.
○ 성녀 손소벽, 이경이, 이인덕, 권진이, 최영이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 우리 교회 내 모든 가정 주부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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