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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

[91] 전례운동

by 세포네 2005. 11. 12.

<=  전례운동은 한마디로 교회 전례에 가능한한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키려는 운동이다. 오늘날과 같은 일반 신자들의 적극적 전례 참여의 역사는 그리 오랜 것이 아니다.

 

 

 적극적 능동적 미사참례 길터
벨기에 독일서 시작 유럽으로 확산
성서 보급 운동도 새롭게 나타나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에게 거대한 비극을 체험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정신적 상황의 조성으로 이어졌다. 낡은 사고와 구속이 폐기되고 새로운 시작이 요청됐다.
물론 이것은 교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놀라운 변혁의 시기였다. 교회 안에서 새롭게 일기 시작한 자각과 쇄신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20세기 초반의 전례운동과 성서운동이었다.


이 운동들은 이미 지난 세기부터 일부에서 부분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던 교회 쇄신의 노력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확산된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들은 나아가 공동체로서의 교회, 그리스도 신비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인식과 함께 금세기 최대의 교회 쇄신 노력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로 이어지게 된다.


전례운동은 한마디로 교회 전례에 가능한한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키려는 운동이다. 오늘날 일반 신자들이 미사를 포함한 전례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러한 적극적인 참여의 역사는 사실 그리 오랜 것이 아니다.
전례운동은 모든 신자들이 전례, 특히 미사를 정확히 알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에는 라틴어로 돼 있던 사제의 기도를 이해하도록 하는 운동으로 일종의 교회 내적인 개혁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19세기말 베네딕도 수도회를 중심으로 벨기에와 독일에서 일어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각국으로 확산됐다. 벨기에에서는 1882년 일반 신자 대상의 미사 전례서가 출판되면서 신자들이 전례에 더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자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교황 비오 10세는 1903년 발표한 교서에서 신자들의 쇄신을 위해서 성사생활과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1905년에는 교령을 통해 자주 미사에 참례하고 영성체할 것을 권고했다.


새로운 전례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1909년 벨기에 멕헬른에서부터이다.
벨기에의 가톨릭 신자대회에서 베네딕도 회원인 보뒤앵은 『전례를 민주화해야 한다』고 외쳤고 대회를 소집한 메르시에 추기경은 미사 전례서가 기도서로 보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메르시에 추기경은 특히 미사 전례 본문과 주일 저녁기도는 자국어로 번역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요청은 미사 전례서가 모두 라틴어로만 쓰여져 있는 상황에서 큰 반향을 불러왔다.
그 메아리는 즉시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으로 파급됐다.


독일에서는 가톨릭 청년운동을 중심으로 전례 쇄신의 바람이 불어왔다. 가톨릭 청년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인 로마노 과르디니는 저술과 강연을 통해 전례정신을 배양하고 심화시켰다. 국가 사회주의의 탄압으로 교회 활동이 침체돼 있던 독일에서 교회 전례의 공동체적 구성력이 새롭게 체험됐다.


청년 신자들은 전례의 공동체성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영적인 힘과 활력을 얻게 됐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등으로 고난과 비참의 시대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전례를 통해서 이러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전례의 공동체성에 대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의 교회상이 부각되는 계기가 됐다.
전례운동의 급속한 확산에 교회 당국은 처음에는 다소 당황했지만 이내 개방적인 자세를 취했다.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1943년 회칙 「신비체」(Mysici corporis)를 반포하고 1947년에는 전례에 관한 회칙 「중재자이신 하느님」(Mediator Dei)을 발표하며 이 운동에 개방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 문헌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헌장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갖고 있다.
전례운동은 전례쇄신 그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 그것은 전례정신에서 신자들의 쇄신을 이루려는 것이고 『성령을 그의 교회를 통해 침투시킴으로써』(비오 12세) 그것을 체험하게 하려는 것이다.


전례운동이 확산되면서 새롭게 나타난 경향이 바로 성서 보급 운동이다.
18세기초 독일, 영국과 미국의 개신교에서는 다양한 성서학회들이 생겨나 성서 연구 및 보급 운동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프로테스탄트의 성서신학에 대한 대응이 주된 과제였고 성서의 보급은 침체돼 있었다.


하지만 교황 레오 13세가 1893년 회칙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통해 성서를 읽도록 장려하고 1898년에는 성서를 읽는 신자들에게 대사를 부여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어 다양한 성서학회가 설립돼 가톨릭의 성서 연구와 보급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전례운동의 확산과 맞물려 더욱 활발하게 진행됐다.
교황 비오 12세가 회칙에서 강조한 전례정신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구현됐다. 그 결정판이 바로 공의회 문헌인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이다.


전례운동은 그리스도의 위대한 보화들이 모두 전례 안에 구체화돼 있기 때문에 전례에의 참여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즉 전례에의 능동적인 참여를 통해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유일하고 위대한 중재자이며 유일한 사제, 희생과 구원의 근원임을 알게 된다.
전례는 하느님 나라, 거룩한 공동체로의 참여이며 따라서 전례를 통해서만 신자들은 참된 공동체 참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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