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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그리스도의 향기

하느님의 말씀 주일 맞아 다시 보는 예로니모 성인

by 세포네 2024. 1. 21.

‘사자 같은 용기로 교회 위해 한몸 바치다’ 불꽃같았던 신앙 열정
라틴어 성경 ‘불가타’ 번역
정확한 번역·대중성 인정 받아
성경이 지니는 중요성 설파하며
이단에 맞서 혼신의 힘 다해

2019년 9월 30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의 교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Aperuit illis)를 통해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공표했다. 교서가 발표된 날은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선종 1600주기였다. 평생 말씀을 연구하고 번역한 예로니모 성인은 신구약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해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불가타(Vulgata) 성경」(대중 라틴말 성경)을 남겼고, ‘늘 성경을 읽고 사랑하라’며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경이 지니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 예로니모 성인 기념일에 반포된 것은 이런 업적 및 면모와 무관하지 않다. 하느님의 말씀 주일을 맞아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의 삶과 영성을 돌아본다.

니콜로 안토니오 콜란토니오 ‘서재에 있는 성 예로니모’. (1443~1444년)

예로니모 성인의 생애

347년 이탈리아 북부 스트리도니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성인은 12세 때 로마에 가서 문법, 수사학, 철학을 공부했다. 당시 세속적 학문에 몰두했지만, 사도 및 순교자 성지를 순례하면서 신앙에 관심을 느꼈다. 특히 카타콤바를 방문하며 느낀 바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19세에 리베리오 교황으로부터 세례성사를 받고 독일 트리어에 갔다가 수도 생활에 관심을 느껴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했다.

예수님께서 살았던 흔적을 쫓아 예루살렘을 순례했던 성인은 안티오키아에 머물며 라오디체아의 아폴리나리우스 주교로부터 성경 주석 방법과 그리스어를 공부했다. 그리고 칼치스 사막에서 은수생활을 하며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익혔다.

은수자들 사이에서 아리우스 이단 문제로 대립이 생겨나자, 그곳을 떠난 성인은 379년 안티오키아에서 ‘일정한 사목직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비올리노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380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 강의를 듣고 오리게네스의 성경 주석 방법에 매료돼 니사의 그레고리오 주교와 교류를 가졌던 성인은 이때부터 오리게네스의 수많은 저서를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번역했다.

로마로 돌아와 다마소 1세 교황 비서로 임명되면서 신·구약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작업과 함께 상류층 미망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수도 생활에 대한 이상을 교육했던 그는 그에 대한 오해와 의심, 비난으로 로마를 떠나 386년 베들레헴에 정착했다.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본격적으로 수도 생활을 시작하며 저술과 번역 활동에 몰두했다. 이 시기에 4복음서와 바오로의 편지들, 시편의 사본 제작, 이단 반박서, 호교론 등 막대한 양의 저술이 이뤄졌다.

오리게네스주의 논쟁이 일면서 성인은 오리게네스 신학의 열렬한 추종자였음에도 반대자 입장에 섰고,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와 연락하면서 펠라지우스 이단을 몰아내는 데 힘을 보탰다.

성인은 419년 9월 30일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72세로 선종했다.

불가타(Vulgata) 성경

라틴어로 ‘불가타’는 ‘일상적’ 혹은 ‘대중적’이라는 뜻이다. 불가타 성경을 번역한 것은 예로니모 성인이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이 최초로 라틴어로 번역된 것은 2세기 말엽으로 추정된다. 4세기 말 무렵 라틴어역 필사본이 양산되며 순수성이 훼손되자 라틴 교회 안에서 사용되던 성경을 개정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다마소 1세 교황이 예로니모 성인에게 라틴어판 성경 개정을 맡긴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교황은 문체가 거칠고 오류가 많은 ‘고대 라틴어 역본’(Vetus Latina)을 수정하라고 명을 내렸다.

성인이 번역 과정에서 중점 두었던 부분은 라틴어 성경을 정화시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구약성경의 경우 성경 본래 언어로 된 히브리어본을 번역했는데,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에 나오는 70인 역을 히브리어 원문과 직접 대조해 가며 전부 다시 번역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어 필사본 중 가장 나은 것을 번역 문헌으로 삼았다.

‘불가타’(Vulgata)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13세기경이었다. 트리엔트공의회에서는 「인수페르」(Insuper)라는 칙령을 통해 불가타만이 라틴어 역본들 가운데 정통성을 띤다고 선언했다.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이면서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 성경으로 공인됐다는 의미를 지닌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성인의 라틴어 번역 사업을 높이 평가하고 칭송했다고 한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

평생을 성경 연구와 번역에 매진한 성인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성경 공부가 매우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늘 성경을 읽으십시오. 아니 당신 손에서 성경이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편지」 52,7)라고 늘 성경을 가까이할 것을 독려했고, 말씀을 사랑하는 가치를 강조했다.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지혜가 그대를 사랑할 것입니다. 성경을 사랑십시오. 그러면 성경이 그대를 보호해 줄 것입니다. 성경을 흠모하십시오. 그러면 성경이 그대를 감싸줄 것입니다. … 그리하여 그대의 혀는 그리스도 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것들이 아니라면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을 것입니다.”(「편지」 130, 20)

「이사야서 주해」 서문 1·2의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는 말은 성경의 중요성을 설파한 성인의 가장 유명한 말이다.

교회에 대한 사랑도 뜨거웠다. ‘이전의 어느 교부도 예로니모만큼 교회에 대한 사랑을 명확하게 표현한 교부는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단에 맞서는 등 교회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교회 간 대립하는 문제가 생길 때는 늘 로마 교회 편에 섰다.
성인을 묘사한 성화 중에는 은수자 모습에 펜을 들고 저술에 몰두하는 모습이 많다.

그 옆에 사자가 함께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전승에 따르면 이 성화는 성인이 가시 찔린 사자를 도와 가시를 빼주자 그 후 사자가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사자와 같은 용기로 교회를 위해 싸우고, 결점 악습과 같은 가시를 제거하는 데 끊임없이 노력한’ 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신학교의 수호성인’, ‘수덕생활의 수호성인’으로 불리는 성인은 사제이면서도 생애 대부분을 수도자로 살았고, 최초의 수도 규칙서인 ‘파코미오 규칙’과 서간 등 수도생활 관련 문헌들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남녀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자 학교를 세워 직접 강의하며 지도하기도 했다.

예로니모 성인은 라틴 교부 중 가장 박학했고 동 시대인 중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유일한 학자였다.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와 더불어 서방교회 4대 교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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