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감상실]/한국인이 좋아하는 클래식 100선

[74] 생상스 / 동물의 사육제

by 세포네 2023. 9. 20.


        Le Carnaval des Animaux

             생상스 / 동물의 사육제 전곡(1곡~14곡)
             Saint-Saëns, Charles Camille 1835-1921




<동물의 사육제>는 생상스의 작품 중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곡이다. 프로코피예프의 <피터와 늑대>, 브리튼의 <청소년을 위한 관현악 입문>과 함께 어린이 클래식 입문곡으로 꼽힌다. 생상스가 이 곡을 작곡한 것은 1886년의 일로 당시 쉰한 살이었다. 사실 이 해는 작곡가 입장에서는 <동물의 사육제>보다도 <오르간 교향곡>을 작곡한 해로 기억할 법하다. 웅대한 악상과 놀라울 정도로 치밀한 짜임새를 지닌 대작 교향곡과 이 아기자기하고 기지에 넘친 소품집이 한 해에 나란히 작곡되었다는 사실은 뭔가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생상스 자신의 말에 따르면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듯이 운명처럼 작품을 썼다"고 한다. 이 곡에는 '두 대의 피아노, 두 대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 플루트, 클라리넷, 하모니움(소형 오르간의 일종. 풍금을 생각하면 된다), 실로폰, 첼레스타를 위한 동물학적 환상곡'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여기서 '동물학적'이라는 단어는 물론 각 곡이 특정 동물을 묘사한 것임을 암시하지만, 굳이 이런 표현을 쓴 것 자체가 일종의 익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슬쩍 암시된 기지와 해학은 작곡가가 각 곡에서 악기나 악상을 취급하는 방식에서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작품집을 구성하는 열네 곡 가운데 작곡가가 생전에 출판을 허락한 것은 열세 번째 곡인 '백조' 단 하나뿐이다. 그가 왜 이 작품집에 이렇듯 냉담한 반응을 보였는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우선 생상스는 자신이 '진지한' 작곡가로 여겨지길 바랐고 이 작품집에서 보여준 것처럼 소탈하고 격의 없는 모습을 대중 앞에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이 곡을 사적인 유흥거리로 여겼으며, 무엇보다도 이 곡의 풍자적인 성격이 논란거리가 되는 것을 꺼렸다. 결국 이 곡은 유언에 따라 작곡가 사후에야 전곡이 출판되었다(1922).

제1곡 서주와 사자왕의 행진(Introduction et Marche royale du Lion)
2대의 피아노와 현악 5부 편성.
피아노와 현악기로 사자의 늠름한 모습을 묘사했다. 동물의 왕다운 위풍을 보이는 호화스런 행진곡이다. 사자의 위엄이 절로 느껴진다. 서주에서 피아노의 부산한 연타와 저음현의 위협적인 연주가 크레셴도로 연주된 다음, 피아노가 당당한 행진곡 리듬을 연주하는 가운데 여섯 번째 마디부터 등장하는 묵직한 현악 합주가 사자왕의 등장을 알린다. 이 주제는 위엄을 띠고 있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우스꽝스럽다. 행진곡 리듬의 간주 뒤에 주제가 세 번 반복되면서 셋잇단음 음형이 출현하는데 이것은 사자왕이 으르렁거리는 소리이다. 이윽고 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반음계의 움직임으로 변하여 위압감을 더해 간다.

제2곡 암탉과 수탉(Poules et coqs)
클라리넷과 2대의 피아노, 바이올린, 비올라 등으로 편성.
전체 서른다섯 마디에 불과한 소품이다. 이 곡은 18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작곡가였던 라모의 ‘암탉’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준다. 피아노가 수탉을, 클라리넷이 암탉을 묘사하고 있으며 두 마리가 홰를 치며 다투는 듯한 분위기가 잘 살려져 있다.

제3곡 야생당나귀(Hémiones)
2대의 피아노로만 연주.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당나귀의 분방한 움직임이 16분음표만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무궁동풍 악상으로 묘사되었다(‘무궁동’이란 8분음표나 16분음표, 32분음표 등 짧은 음표로 이루어진 선율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느낌을 주는 화려하고 짧은 곡을 가리킨다). 현란한 기교에 치우쳤던 당대의 피아니스트들을 조롱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제4곡 거북이(Tortues)
1대의 피아노와 현악 5부 편성.
겨우 스물두 마디짜리 소품이다. 시종일관 지속되는 피아노의 약한 셋잇단음표 리듬이 거북의 느린 걸음을 표현하는 가운데 셋째마디부터는 현악기군이 거북의 굼뜨고 태평스런 움직임을 연상케 하는 선율을 연주한다. 이것은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천국과 지옥>에서 인용한 캉캉 선율로, 원래는 눈이 돌아갈 만큼 빠른 곡이다. 이런 곡을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연주함으로써 색다른 느낌을 자아냈다는 데 생상스의 재치가 엿보인다.

제5곡 코끼리(L'Éléphant)
2대의 피아노와 더블베이스로 편성.
거대한 코끼리가 왈츠 리듬에 맞춰 춤을 춘다. 이 곡 역시 패러디를 사용하고 있다. 더블베이스가 연주하는 선율은 베를리오즈의 오페라 <파우스트의 천벌> 중 ‘바람 요정의 춤’(Ballet des Sylphes)을 비틀어 인용한 것이다. 베를리오즈의 조롱에 대한 나름의 응수였던 것일까?

제6곡 캥거루(Kangourous)
2대의 피아노로만 연주.
전체 열아홉 마디이다. 독특한 리듬이 긴 뒷다리로 뛰어다니는 캥거루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며, 템포와 강약의 변화와 4박자와 3박자의 절묘한 교차가 이 효과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제7곡 수족관(Aquarium)
플루트, 하모니움, 2대의 피아노, 첼레스타, 현악 4부 편성.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나긋나긋한 움직임이 첼레스타의 영롱한 선율로 묘사된다. 제13곡 ‘백조’와 함께 유명한 곡이다.

제8곡 귀가 긴 등장인물(Personnages à longue oreilles)
2대의 바이올린으로 연주.
전체 스물여섯 마디이며 템포는 자유롭다. 매우 단순하며 서로 겹치지 않는 두 음형이 고음역과 저음역으로 나뉘어 연주된다. 여기서 말하는 등장인물이란 집당나귀혹은 노새를 가리킨다. 원래 이들 동물은 우둔하고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곡 역시 일종의 풍자 내지는 조롱이라고 볼 수 있다.

제9곡 숲속의 뻐꾸기(Le coucou au fond des bois)
2대의 피아노와 클라리넷으로 연주.
피아노의 단순한 화음이 숲의 적막함을 표현하는 가운데 클라리넷이 뻐꾸기의 울음소리를 흉내낸다.

제10곡 커다란 새장(Volière)
플루트와 2대의 피아노, 현악 5부 편성.
플루트 주자에게 대단히 뛰어난 기량을 요구하는 곡이다. 도입부의 트레몰로가 새들의 날갯짓을 묘사한 뒤, 이어지는 고음 선율이 새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묘사한다. 새들이 지저귀는 모습이나 다른 새의 등장도 암시하면서 화려하게 전개된다. 큰 새장 속에서 분주하게 날아다니는 새들의 모습을 공간적으로 잘 묘사한 곡이다.

제11곡 피아니스트(Pianistes)
2대의 피아노와 현악 5부 편성.
생상스는 이 곡에 대해 ‘연주자는 초보자가 치는 모양과 그 어색함을 흉내내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 피아니스트는 <동물의 사육제>에 등장하는 유일한 인간이지만, 어쨌든 인간도 동물이라면 동물이다. 피아노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주 어렸을 때 연습했을 쉬운 음계를 첫머리 부분만 고집스럽게 연주하고 있다.

제12곡 화석(Fossiles)
클라리넷과 실로폰, 2대의 피아노, 현악 5부 편성.
전곡 가운데 마디 수로는 ‘피날레’에 이어 두 번째로 긴 곡으로, 전곡 가운데 가장 인용이 풍부한 곡이기도 하다. 처음에 실로폰이 연주하는 주제는 생상스 자신이 쓴 교향시 <죽음의 무도>의 주요 주제이며, 계속해서 프랑스 동요 ‘난 좋은 담배를 갖고 있다네’ ‘아 어머니께 말씀드리죠’(모차르트의 변주곡으로 유명하며, 우리나라에는 ‘반짝반짝 작은 별’로 알려져 있다)를 비롯해 여러 노래가 차례로 인용된다. <죽음의 무도> 주제로 되돌아온 뒤에는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로지나가 부르는 아리아 선율이 등장한다.

제13곡 백조(Le cygne)
첼로와 2대의 피아노.
‘백조’는 <동물의 사육제>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으로 백조의 우아함을 첼로로 표현했다. 여기서는 앞의 두 곡과는 달리 풍자적인 느낌이 전혀 없고 고전적인 우아함이 넘친다. 앞서 밝혔듯이 전곡 가운데 생상스가 생전에 출판을 허락한 유일한 곡이기도 하다. 빼어난 선율미 때문에 다른 편성으로 편곡해 연주하는 경우도 많다.

제14곡 피날레(Finale)
플루트, 클라리넷, 하모니움, 실로폰, 2대의 피아노, 현악 5부 편성.
지금까지 사용된 악기 거의 전부가 등장한다. 피아노와 현이 연주했던 서주 악상이 다시 등장한 뒤, 클라리넷이 가볍고 재치 있는 주제를 연주하는데 이것은 오펜바흐의 <천국과 지옥>의 피날레 선율이기도 하다. 이어 당나귀, 암탉, 캥거루, 노새 등 지금까지 등장했던 동물 대부분이 연이어 모습을 보이면서 떠들썩하게 전곡을 마무리한다.

왜 '사육제'란 명칭을 붙였을까?
생상스가 이 곡에 ‘사육제’(謝肉祭)라는 명칭을 붙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표면적으로는 작곡가가 연주 여행 중에 오스트리아의 어느 시골에서 사육제 행렬을 목격한 데서 이 곡의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겠지만, 사육제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는 축제인가를 모른다면 쉽게 대답할 수는 없는 문제이다. 사육제, 카니발(carnival)이란 가톨릭 문화권에 속하는 지역에서 매년 2월 중․하순경에 열리는 대중적 축제를 가리킨다. 엄격히 말하면 '공현절'(1월 6일. 개신교에서는 주현절이라고 부른다)부터 이른바 '기름진 화요일'(Mardi gras)까지의 기간을 의미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의미가 약간 바뀌어 기간 자체보다는 이 기간에 열리는 다양한 행사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시기와 지역에 따라 행사의 내용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으로 일상에서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 자유분방함과 탈선이 상당한 수준까지 허용된다는 점은 언제나 같다. 즉 사육제를 지배하는 정신은 ‘일체의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라 할 수 있다. 아마 생상스가 이 제목에서, 그리고 이 곡 자체에서 드러내고자 한 것 또한 엄격한 구성이나 형식미와는 무관하게 그저 웃고 즐길 수 있는 소탈한 자유분방함이었을 것이다.

생상스
생상스(Saint-Saëns, 1835-1921)는 작곡가이자 오르간 연주가, 피아니스트, 지휘자였습니다. 2살 때부터 절대음감을 갖고 있었고, 3살 때부터 글을 읽을 수 있었고, 5살 때 첫 공개 콘서트에 참가했고, 7살 때 수준급 라틴어를 구사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지리학, 고고학, 식물학, 인류학 등을 공부했고, 수학에 뛰어났습니다. 따라서 음악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유명 인사들과 토론을 할 수 있을 정도였죠. 그는 철학 논문도 썼고, 시도 썼으며, 연극도 썼습니다. 게다가 프랑스 천문학 협회의 멤버이기도 했습니다. 일식에 맞춰서 콘서트를 열 정도로 (취향 한번 특이합니다) 조예가 깊었다고 하네요. 부지런하달까요 천재랄까요~~ 그래서 베를리오즈는 약간 비꼬는 투로 “생상스는 모든 분야에 뛰어나지만 경험하지 않은 분야에 대해서만은 부족하다”(Il sait tout, mais il manque d'inexpérience.)라고 말하기도 했지만(그러나 ‘오늘날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하나’라고 극찬한 적도 있다), 그의 왕성한 탐구심과 근면함(그는 죽기 바로 전날까지도 작곡을 했다네요)은 여러 장르에 걸쳐 많은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생상스는 유럽의 유명 작곡가들과 친구 아니면 적이었다고 합니다. 리스트와 포레와는 친구였지만, 드뷔시의 음악을 매우 싫어했다고 하네요. 드뷔시도 생상스를 싫어했고요. 스트라빈스키의 공연 도중 연주가 마음에 안 들어서 뛰쳐나갈 정도였다고 하니, 그냥 음악적 견해가 맞지 않으면 확실히 의사를 나타내는 타입이었나 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