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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감상실]/협주곡 100선

협주곡 100선 [69] 카를 슈타미츠 / 플루트협주곡 사장조

by 세포네 2023.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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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lute Concerto in G major, Op.29
             칼 슈타미츠 / 플룻 협주곡 G장조
             Carl Stamitz 1745 -1804 
 


슈타미츠는 1770년(모차르트가 만하임 궁정을 방문하기 8년전)까지 그곳에 있는 유명한 궁정 관현악단의 제 2바이올린 주자였다. 그의아버지인 요한 슈타미츠는 작곡가인 동시에 카펠마이스터였는데, 그의 업적은 현대적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기초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의 아들 카를슈타미츠는 모차르트와 마찬가지로,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책임이 부과되고 예술적으로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궁정작곡가 생활을 거부하고, 불안정한 순회 연주자(바이올린과 비올라)의길을 떠나 자유로운 예술가로서 유럽의 여기저기를 여행하였다. 그는 1783년 11월 헤이그에서 12세의 베토벤과 함게 공연한 적이 있었는데, 베토벤은 이 나이많은 연주자보다 공연료를 더 많이 받았다. 이 당시 그는 운이 기울어,죽기전에 빚을 청산하기 위해 작곡 초고들을 팔려고 내노았으나 어느 누구의 주의도 끌지 못하였고, 그러는 와중에 그의 많은 작품들이 소실되었다. 그의 플루트 협주곡들도 그랬다. 그는 일곱편의 플루트협주곡을 작곡하였으나 대부분 소실되었다. G장조 협주곡 op.29는 만하임 시절(1762-70)의 것으로 멜로디가 풍부하고 균형잡힌 형식을 취하고 있다. 현악반주로 된 이 협주곡은 플루트의 잠재력을 최대한 탐구하고 있다. 첫악장 알레그로는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이고, 

1악장 Allegro

2악장 Andante
3악장 Rondo

슈타미츠, 요한 안톤 Johann Anton Stamitz (1717~1757 / 보헤미아)
바이올린 주자, 작곡가. 처음에는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이어서 예술회가 경영하는 일라바의 김나지움(1728~34)과 프라하 대학(1734~35)에서 공부했다. 1741년 만하임 궁정단원이 되었고 1743년에 제1바이올린 주자에, 1745년 또는 1746년에 콘서트 마스터에, 그리고 1750년에는 기악감독에 임명되었다. 그의 지도 아래 만하임 궁정악단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악단이 되었고 또 만하임은 전 고전파 교향곡의 발전사 가운데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도시가 되었다. 1754년에 그는 파리에 가서 9월 8일에 종교음악회에 데뷔했으며(이곳에서는 이미 그의 교향곡 가운데에서 적어도 한 곡이 연주되었었다), 이 도시에서 1년간 머물렀다. 그리고 그때에 그의 오케스트라 트리오 op. 1이 출판되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대부분은 이 프랑스의 수도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협주곡과 실내악곡, 그리고 8곡의 성악곡을 작곡했는데 특히 D장조의 미사곡은 그의 생존시부터 유명했다(1755년 8월 4일에 파리에서 연주되었다). 그러나 그를 중요한 존재로 만들고 있는 것은 현재 58곡이 알려져 있는 교향곡과 현악기만을 사용한 10곡의 오케스트라 트리오이다. 트리오는 오케스트라 음악과 실내악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이 곡들은 각 파트를 하나 또는 둘 이상의 악기로도 연주할 수 있다). 그의 초기의 교향곡은 현악기와 2대의 호른을 사용했다. 이 시기에 이은 다음 시기에는 그밖에 두 개의 플루트와 두 개의 오보에도 사용하게 되었고 초기의 것에는 두 개의 클라리넷도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초기 교향곡 가운데 5곡에서는 두 개의 트럼펫과 팀파니도 사용했다. 교향곡의 반 이상, 그리고 10곡의 오케스트라 트리오 중 9곡까지는 미뉴에트를 제3악장으로 한 4악장형식이다. 그는 크레셴도의 용법을 연구해서 오케스트레이션의 기법, 주제의 기법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는 이 기법들을 창작한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 이탈리아에서 기원한 이 양식적 특징을 이제 막 생기려는 교향곡이라는 장르에 적용시켰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점에서 또 그가 최초의 대표적 작곡가가 된 만하임악파에게 부여한 영향에 의해서 요한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20세기 초에 특히 후고 리만의 노력에 의해서 재평가되었다. 그러나 요한 슈타미츠를 하이든의 주요 선구자라고 한 리만의 견해는 오늘날에 와서는 이미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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