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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가보고싶은 공소

29. 원주교구 우천본당 정금공소

by 세포네 2023. 8. 6.

본당 성전 신축 기금으로 새 공소 먼저 봉헌

원주교구 우천본당 새 정금공소는 사랑 베풂의 현장이다. 원주교구장 조규만 주교가 7월 29일 정금공소 성전 봉헌식에서 성수를 뿌리고 있다. 원주교구 제공

원주교구 우천본당 정금공소는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정포로 56에 자리하고 있다. 1916년에 설립된 정금공소는 지난 7월 29일 원주교구장 조규만 주교 주례로 새 공소 건물 축복식을 가진 유서 깊은 신앙 공동체이다.

횡성은 동으로 평창군, 서로 양평군, 남으로 원주시와 영월군, 북으로 홍천군과 접하고 있다. 지형은 태백산맥에서 남서로 뻗어 나간 차령산맥에 둘러싸여 동쪽은 높고 서쪽은 완만한 동고서저(東高西低) 특성을 보인다. 횡성(橫城)이라는 이름은 남한강 지류에 속하는 섬강이 남북으로 흐르지 않고 동서로 가로질러 흘러 한자로 가로를 뜻하는 ‘횡’(橫)을 쓰게 된 데서 유래한다. 우천(隅川)은 강원도 횡성군 중앙에 자리한 면(面)으로 마을 모퉁이로 시내가 흘러 ‘우냇’ 마을로 불린 데서 생겨났다.

아울러 정금리(鼎金里)는 마을 동북쪽 죽림산과 동남쪽 봉화산, 서쪽의 정금산에 둘러싸인 산간구릉지대로 우물처럼 생겼다고 해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우밀’이라고 불렀다. 그러다 192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숲’, ‘어둔이’, ‘발화골’이 병합돼 ‘정금리’가 됐다. 마을 앞에 있는 정금산이 솥을 걸어 놓은 것과 같은 모양새라고 해서 우리말로 ‘쇠낌’이라 했고, 한자어로 ‘정금’(鼎金)으로 표기했다. 정금리는 본래 안흥면 지역이었으나 1973년 우천면으로 편입됐다.

원주교구 우천본당 정금공소는 병인박해 순교자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정금공소 전경

1866년 병인박해 이전 신앙 공동체 형성

정금 마을에 가톨릭 교우들이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산 것은 1866년 병인박해 이전이다. 지금의 정금공소 인근 대숲 마을 교우들 가운데 여럿이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 이들 가운데 순교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이들이 박요셉ㆍ윤가타리나 부부이다. 「포도청등록」에 따르면 박요셉ㆍ윤가타리나 부부는 횡성군 우천면 정금리 대숲에 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1867년 10월 원주 포졸에게 체포됐다. 박요셉은 강원 감영에서 7~8차례 문초를 겪으며 배교를 강요당했다. 하지만 그는 평소 함께 순교하는 것을 간절히 바랬기에 단호히 배교를 거절했다. 박요셉은 가족에게 보낸 옥중 편지에서 “하느님께 순교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으며, 엄한 형벌들이 저의 보속이 되어 즐겁고, 순교가 정해진 날이 20여 일 남아 매우 기쁘다”고 전했다.

박요셉은 한양과 여러 지방에 알려질 만큼 저명한 의사였다. 당시 원주 판관 정익영의 아들 정원화가 백약이 무효할 만큼 위중했다. 박요셉의 의술을 잘 알고 있던 한 아전이 원주 판관에게 “옥중 죄인 박 생원이 명의이오니 진료를 보게 하옵소서”라고 청하자, 정익영은 즉시 이방으로 하여금 그를 옥에서 불러내어 아들을 치료하게 했다. 위중했던 판관의 아들 정원화는 박요셉의 처방으로 금세 병이 나았다. 이 일로 박요셉은 감형돼 평안도 희천군으로 유배됐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1868년 1월 대왕대비 조씨의 회갑을 기념해 내린 사면령으로 유배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박요셉과 윤가타리나 부부는 그해 4월 서울에서 배교한 친구의 밀고로 또다시 체포돼 1868년 5월 9일 함께 좌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1916년 곽씨 집안 교우들이 공소 설립

병인박해로 순교자들을 탄생시켰던 정금 마을에 1916년 곽씨 집안의 교우들에 의해 공소가 설립됐다. 그러다 교우들이 정금 마을에서 공소 예절을 지속하고 활성화한 것은 1948년 무렵부터라고 한다. 1950년께 곤의골 출신 동정녀 김계훈(요안나)씨가 화전리에 살면서 정금 마을을 비롯해 횡성 지역 여러 곳을 다니며 전교를 했다. 우천면으로 이전한 정금초등학교 터에 1953년 미군 부대의 도움으로 새 정금공소가 지어졌다. 교우들도 흙벽돌을 찍어 나르고 양철지붕을 얹는 등 힘을 보탰다고 한다. 정금공소 교우들은 그 공소를 70년간 사용해 왔다. 공소를 지을 당시는 6ㆍ25 전쟁 휴전 직후여서 성당에서 많은 구호물자를 제공해 교우수가 급속히 늘던 시절이었다. 정금공소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교우수가 늘고 가톨릭 농민회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이후 급속한 이농 현상으로 지금은 연로한 교우들만 남아 있다.

정금공소는 우천본당 교우들이 본당 승격을 하면 새 성전을 짓기 위해 마련한 돈으로 70년 만에 새 단장을 했다. 정금공소 내부.

거룩하고 고귀한 희생으로 봉헌된 정금공소

2020년 횡성본당 관할 우천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하면서 우천본당 관할로 편입된 정금공소는 지금 활기 가득하다. 초대 우천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정의준 신부는 본당 교우들과 상의해 성당 건축 기금으로 모아온 3억 5000여만 원을 더 오래되고 낡아 새 건물이 시급한 정금공소에 모두 투입해 지금의 새 공소를 지었기 때문이다.

우천본당 역시 70년 넘는 역사를 지닌 공소였다. 변변한 보금자리가 없어 1948년 양적리와 두곡리 등지를 거쳐 1994년 지금의 횡성군 우천면 우항리에 자리 잡았다. 본당 승격과 새 성전 건립을 희망하며 한푼 한푼 10년을 넘게 모아온 귀한 종잣돈을 우천본당 교우들이 더 어려운 형제들을 위해 기꺼이 내놓은 것이다.

거룩하고 고귀한 희생으로 봉헌된 정금공소는 소나무 동산 한 가운데에 아름답게 지어졌다. 외벽은 소나무의 푸르름을 반영해 초록으로 칠해졌다. 내부는 성당과 회합실로 구분돼 있다. 공소 마당에는 예수성심상과 성모상, 성 요셉상이 꾸며져 있다. 새 정금공소는 ‘베풂’의 현장이다. 베풂은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의 본성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에게 베푸는 것이다. 따라서 정금공소는 ‘사랑의 집’이다. 사랑의 새 보금자리가 열매 맺어 우천본당 교우들이 기뻐할 더욱 아름다운 사랑이 집이 곧 탄생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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